어느 수구신문에 출판전문기자라는 이가 쓴 칼럼을 보고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그의 주장은 한 마디로 다음과 같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지난 9년간 보수정권에서 벌어진 각종 해괴한 사건들의 실체를 밝히는 적폐 청산 작업이 피로하니 “이 모든 것을 끝내자”는 것이다.

 

그런데 글쓴이는 자신의 블로그 혹은 일기장에나 쓸 법한 이야기를 돈을 받고 칼럼으로까지 발표하는 놀라운 패기를 보여주었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다른 경우도 아닌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을 예로 들었다는 점이다. 분명 배운 분이실 텐데, 누가 그런 주장을 하는지 그런 엉터리 논거와 주장을 펴는 주체에 대해서는 쏙 빼놓고 말씀해 주시는 신공을 보여 주셨다. 아무래도 나는 일제와 독재권력을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이 찬양했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자사의 주장은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당시 프랑스를 점령했던 나치 독일과 그 독일에 부역했던 비시 괴뢰정부에 협력했던 꼴라보들의 만행에 대해서는 달랑 한 문단으로 압축해 버리고, 상대적으로 나치 독일의 패퇴 이후 당연한 수순으로 권력을 쟁취한 레지스탕스들이 재판도 없이(이게 핵심이다!) 다수의 꼴라보들을 약식 처형했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단 5년 동안의 꼴라보들의 부역 행위에 대해서도 프랑스는 9년 동안의 단죄를 단행했다. 나치 독일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1944년 여름, 권력의 진공상태에서 벌어진 민중의 복수를 저지할 공권력이 프랑스에 존재했던가.

글쓴이는 영악하게도 오로지 적폐 청산이 피로하니 이제 그만하자는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자신의 전문 영역인 출판의 도움을 빌기에 이른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질서로 이루어진 현대를 그린 이안 부루마의 저서 <0년>의 내용을 ‘부역 처벌이 상징적일 뿐 공정하지 않았다’로 퉁치는 패기를 다시 한 번 보여준다. 이 책에는 정말 다른 이야기들이 많이 실려 있는데, 자신의 논조를 뒷받침하기 위해 자신이 필요한 부분만 취사선택해서 쓴 것이다. 왜 난민들의 비참한 실상에 분노한 미군 중위가 기관총을 동원해서 300명의 독일경비병들을 총살했다는 살벌한 이야기는 안했을까. 이안 부루마 교수의 책에는 당시 독일을 점령한 미군 중에는 나치친위대의 만행에 분노해서 난민들의 복수를 눈감아 주었다는 기록도 등장한다.

 

나치 부역 청산에 대해서도 오로지 한쪽의 일방적인 이야기만 부각시키는 신공을 마다하지 않는다. 나치 부역 청산에 적극 찬성한 레지스탕스 출신 작가 알베르 카뮈의 “공화국 프랑스는 관용으로 건설되지 않는다” 같은 명문은 애써 외면한 걸까. 바로 그 지점에 글쓴이의 저의가 숨어 있는 것이다. 우선 보수정권 9년 동안 일어난 국기문란 행위를 철저하게 파헤치고 엄하게 처벌해서 다시는 그런 국정농단이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 게 국가권력에게 주어진 사명이 아닌가. 파면 팔수록 기가 막힌 블랙리스트, 특활비 수수정황, 국가권력의 사유화, 사법부에 맞춤 재판 주문을 한 삼권분립이라는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도 망각한 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지면을 장식하는 마당에 적폐 청산을 이제 그만 하자는 저의가 궁금할 따름이다.

 

마지막으로 프랑스에서 1953년 두 번째 사면법으로 과거사 청산 작업을 사실상 끝냈다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해방 40년이 지난 뒤 레지스탕스 후예들이 대독항전 당시 자유프랑스군을 상징하는 장 물랭을 고문 살해한 ‘리옹의 도살자’ 게슈타포 클라우스 바르비를 남미에서 송환해서 4년간에 걸친 재판 준비 끝에 반인류죄로 종신형에 처한 것은 무엇으로 설명한 것인가. 이게 바로 프랑스식 적폐 청산의 모델이다. 혹시라도 그런 프랑스의 예를 따라 앞으로 40년 동안 적폐 청산에 나설 것을 주문하는 것이라면 대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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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5 16: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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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5 17: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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