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대망의 이언 매큐언 전작 읽기의 화룡점정이었다. 왜 그렇게 다들 <속죄>가 이언 매큐언의 대표작이라고 하는지 직접 읽고서야 알게 되었다. 어느 작가의 최고 작품을 다 읽고 나서 다른 작품을 떠올려 보니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가 있었다. 어쩌면 작가는 이런 작품을 쓰기 위해 글쓰기라는 혹독한 고행에 나서는 지도 모르겠다. 장장 5개월이나 걸린 나의 <속죄> 읽기는 그리고 올해 목표로 했던 이언 매큐언 전작읽기는 완료됐다. 최소한 작가의 아직 번역이 안된 작품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의 그것과 비슷한 시기인 1935년 영국의 서리 지방이다. 소설 <속죄>는 유복한 탈리스 집안의 세실리아와 미래의 작가를 꿈꾸는 공상가 브리오니 그리고 파출부의 아들로 옥스퍼드를 졸업하고 의사 지망생 로비 터너, 이 세 명 주인공의 엇갈린 운명을 촘촘하게 집어내고 있다. 모두 알다시피 전간기에 해당하는 1930년대는 히틀러가 집권한 독일에서 촉발된 전쟁의 암운이 유럽대륙에 퍼지고 있던 시기였다.

 

솔직히 말해서 다소 산만해 보이는 1부에 해당하는 이야기까지 지난 여름에 읽다가 잠시 멈췄었다. 그리고 시작했지만 끝내지 못한 전작 미션을 완수하기 위해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1부를 지나고 나니 놀랄 만큼 독서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탈리스 집안의 여러 식구들이 모여 축제 같은 밤이 되었어야 하는 시간에 브리오니의 쌍둥이 사촌동생들인 피에로와 잭슨이 사라지고 그들을 찾아나섰던 누나 15세 소녀 롤라 퀸시가 어둠 속에서 누군가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그리고 세실리아의 비밀연인 로비 터너가 공상가 브리오니에 의해 범인으로 지목된다. 브리오니는 그날 있었던 몇 가지 사건에 근거해서 자신이 직접 사건을 목격한 것도 아니면서 당당하게 로비를 범인이라고 증언한다.

 

그리고 시간은 5년 뒤로 이동한다. 영국원정군의 일원으로 프랑스에 파견된 로비는 그 유명한 덩케르크로 볼썽사납게 퇴각 중이다. 아니 연애소설이라고 생각했던 소설에서 갑자기 전투 씬이 등장하는 건 또 웬 말인가. 아직 영화 <덩케르크>를 보지 못해 아쉽지만,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에서는 당시 상황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자못 궁금해졌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3년 6개월의 형을 감옥에서 살던 로비 터너는 자원 입대한다는 조건으로 감형을 받고, 전선으로 파견된 것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아르덴 숲을 돌파해서 그 유명한 에르빈 롬멜을 선봉으로 한 기갑사단을 중심으로 파죽의 진격 중인 독일군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본국으로 철수하기 위해 메이스와 네틀 상병과 함께 퇴각 중인 로비 터너. 아무리 생각해도 로비는 자신을 범인으로 지목한 브리오니를 용서할 수 없다.

 

1부에 비해 생사가 순간에 엇갈리는 순간들의 연속이 이어지는 2부는 마치 한 편의 전쟁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삶의 이유인 연인이 기다리는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로비는 아비규환 속에서 무조건 살아남아야 한다고 결심한다.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 때문에 한창 나이에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던 남자의 심정이 절절하게 들어와 박힌다. 그런데 그 장본인이 사랑하는 연인의 하나 뿐인 여동생이라니. 꼬맹이의 뒤틀린 감정이 한 사람의 운명을 파국으로 인도할 수도 있다는 작가의 설정은 잔혹하기만 하다.

 

게다가 로비가 생존 투쟁을 벌여야 하는 공간은 바로 비참한 패배를 당하고 도주 중인 전쟁터다. 독일군의 째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슈투카는 패주 중인 병사들에게 총격과 폭탄을 떨어뜨리길 주저하지 않는다. 피와 살이 튀는 현장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압도적이다. 죽음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아마 그 와중에 로비도 부상을 당한 모양이다. 어찌어찌 해서 마침내 덩케르크 해안에 도착한 로비는 부디 본국으로 무사히 귀환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다시 장면은 영국으로 전환된다. 5년 전에 자신이 저지른 치명적인 잘못을 깨닫게 된 공상전문가이자 문학청년 브리오니는 로비와 세실리아에게 속죄하기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하녀들이나 하는 허드렛일을 하기 위해 자진해서 수련간호사에 지원한다. 공상과 일기 쓰기를 즐기는 브리오니에게 마침내 덩케르크에서 퇴각한 처참한 몰골의 병사들이 도착하기 시작한다. 그 중에 혹시 로비가 있는 지 확인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을까. 이제 20세가 된 롤라 퀸시가 운명의 그날밤 자신을 폭행한 남자와 결혼식을 치르게 되었다는 사실에 그저 놀랄 따름이다. 그리고 자신과 의절한 언니 세실리아를 찾았다가 함께 있던 로비와 조우하게 되는 브리오니. 마침내 그들에게 속죄하고 싶다는 말을 건넨다.

 

그리고 다시 64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1999년, 77세의 저명한 작가가 된 브리오니는 이제는 호텔로 변신한 탈리스 집안의 영지를 방문한다. 말미에 독자는 세 번째 이야기가 모두 브리오니의 상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940년 로비 터너는 독일군의 폭탄 세례가 떨어지던 덩케르크 해변에서 패혈증으로 죽었고, 언니 세실리아 역시 벨엄에서 독일군의 폭탄공격에 사망했다.

 

과연 그것으로 브리오니 탈리스의 속죄가 완성된 것일까라는 작가는 묻는다. 당사자들의 용서가 뒷받침되지 않은 속죄가 무슨 의미란 말인가. 브리오니의 무고가 없었다면 로비 터너는 의사가 되어 비교적 안전한 본국에 남아 전선에서 후방으로 이송되어온 환자들을 치료하며 안전하게 살아 남을 수 있지 않았을까. 언니 세실리아 역시 굳이 집안과 의절하고 간호사의 길을 걷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로비와 세실리아의 삶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었으리라는 점은 보증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초기 작가 시절, 조금은 엽기적인 서사로 독자들을 놀라게 만들었던 이언 매큐언은 소설 <속죄>로 영미문화권을 대표하는 작가로 거듭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촘촘한 구성을 바탕으로 어떻게 해서 공상가 브리오니가 자신이 한 때 사랑한다고 믿었던 청년을 무고해서 억울한 삶을 살게 했고, 언니 세실리아의 사랑도 망가뜨려 버렸는지 독자에게 충실하게 전달한다. 1940년 전쟁과 사회적 계급마저 훌쩍 극복해낸 로비와 세실리아의 운명적 사랑에 안도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브리오니의 소설적 상상이었다는 점에 분노하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동화적이지 않고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더 분노하게 되었던 것일까. 나는 모르겠다.

 

이제 원작소설을 다 읽었으니 구해 놓은 영화 <속죄>를 만나볼 시간이다. 소설을 읽은 여운이 다하기 전에 서둘러서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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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1-06 17: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드디어 <시멘트 가든>을 샀습니다. 이 책 구입을 계기로 이언 매큐언의 소설을 읽어보려고 해요. ^^

레삭매냐 2017-11-06 17:29   좋아요 0 | URL
그러셨군요 ~ 전 오래 전에 사두기만 하고
읽지 않다가 이번에 신간 <넛셸> 출간을
계기로 완독하게 되었네요.

예전 책들이 절판되는 바람에 중고서점에
서 사냥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