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녀 이야기 (특별판, 양장)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요즘 드라마 시장에서 마가렛 애트우드 여사의 작품들이 강력한 소구력을 발휘하고 있다. 지난번에는 <시녀 이야기>로 대히트를 치더니, 이번에는 <그레이스>를 만들었다고 한다. 드라마를 다 보고 나서, 원작소설이 궁금해서 알라딘 한정판으로 나온 <시녀 이야기>를 구해서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드라마의 강력한 영향 덕분인지 한 백쪽 남짓 읽다가 접었다. 그리고 이달 들어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이게 한 번 본궤도에 오르니 멈출 수가 없더라. 새벽까지 달려서 다 읽었다.

 

원작소설을 보면서 드라마가 상당히 원작에 충실했구나 싶었다. 미래의 어느 시점, 미국 땅에 들어선 신정국가 길리아드에 사는 시녀 오프레드가 소설의 주인공이다. 대재앙(정확하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이후, 현직 대통령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정권을 잡은 사령관 일당들은 여성들의 권리를 엄격하게 제한하고 ‘눈’과 수호자 그리고 천사들이 중심이 된 신정국가 건설에 매진한다. 그들이 말하는 기존의 성적 타락과 방탕을 일소하겠다는 신념에 젖어 시민들의 삶을 극도로 억압하고 제한한다. 말로만 신정국가지 사실은 시민들의 모든 것을 감시하는 경찰국가 길리아드에서 정말 악질적인 것은 여성들을 사물로 취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재앙은 길리아드에게도 큰 재앙을 안겨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국가를 존속시키는데 절실하게 필요한 미래 세대를 생산해낼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출산율의 급격한 저하로 국가유지를 위한 아이들이 필요해지자, 아이를 생산해낼 수 있는 가임기의 여성들을 시녀라는 명칭으로 불임가정에 배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의 주인공 오프레드도 사령관 프레드의 집에 배치되어 아이 생산을 맡게 된다. 의례라는 터무니없는 형식으로 오로지 아이를 생산하기 위해 본처 세레나 조이가 지켜보는 동안 사령관과 오프레드는 재생산에 들어간다.

 

디스토피아적 상상이 실제로 벌어질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현재 미국 최고위직에서 터무니 없는 작태를 보이고 있는 권력자의 모습과 기묘하게 겹쳐졌다. 정말 무서웠던 것은 자유와 민주주주의 본고장이라는 나라가 순식간에 일단의 광신자들이 지배하는 경찰 신정국가로 돌변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왜 시민들은 길리아드의 그런 반동적인 움직임에 저항할 수 없었을까? 오프레드는 사랑하는 남편 루크와 딸을 빼앗기고 리디아 아주머니들의 철저한 재교육 과정을 통해 시녀로 거듭나게 된다. 그녀들의 존재는 게이샤나 매춘부들의 그것과도 현저하게 다르다. 소설에서 나오듯이 두 발 달리 자궁으로 오로지 재생산에 필요한 것 뿐이다. 그것을 거부한다면 열악한 환경의 콜로니에 배치되거나 비여성으로 분류되어 비참한 삶을 마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시녀 활동 중에 세 번 실패하게 되도 마찬가지 운명이다.

 

넷플릭스 드라마에서는 좀 더 극적인 장면들에 치중했다면, 소설은 자유로웠던 시절을 기억하는 영혼에서 비참한 처지의 시녀로 전락한 오프레드의 내적 갈등에 좀 더 치중한다. 언제나 수동적인 삶을 살았던 오프레드에 비해 그녀의 친구 모이라는 보다 적극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재교육 센터에서 탈출을 시도했다가 잡혀서 엄청난 구타를 당하기도 하지만, 이성보다 동성에 더 끌리는 모이라는 마침내 엘리자베스 아주머니를 인질로 삼아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그 후, 프레드 사령관을 따라 나섰던 일종의 일탈이었던 이세벨 하우스에서 그녀를 다시 만나는 장면도 드라마와 궤적을 같이 한다. 다만, 각고의 노력 끝에 모이라가 마침내 캐나다로 탈출하는데 성공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소설과는 다른 부분이다. 루크 역시 캐나다로 탈출하는 과정에서 죽은 것으로 소설에 나오지만 드라마에서는 탈출에 성공해서 모이라와 재회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소설은 오프레드가 사령관의 집에서 어디론가 끌려 가는 장면으로 끝나는 반면, 드라마에서는 시즌 1을 같은 장면으로 끝내면서 새로운 시즌 2를 예고했다. 어떤 식의 서술이 등장할 지 <시녀 이야기> 두 번째 시즌이 기대된다.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오프레드는 모두 수동적인 여인을 대표하는 모습으로 출발한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길리아드에서 자신이 체험한 모든 것으로 후대에 기록으로 남기는 그리고 드라마에서는 조금씩 자신만의 방식으로 시스템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는 드라마에 좀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아이를 위험에 빠뜨린 오브워렌 그러니까 재닌을 처벌하라는 리디아 아주머니의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한 드라마 에피소드 마지막 장면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주로 홀로 있는 밤에 과거를 회상하며, 복기하는 식의 서술 전개 방식도 탁월했다. 아무도 믿을 수 없고, 모든 것이 감시되는 엄혹한 시절에 대한 서사는 묘한 기시감을 전달해 주기도 했다.

 

다시 소설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물리적 힘으로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길리아드의 본질은 폭력이다. 그들은 폭력으로 헌정질서를 전복시키고, 자신들이 믿는 신념대로 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시민들이 치러야 하는 부당한 대우를 그들은 부차적 피해(collateral damage)라고 미화한다. 누구 좋으라고 이 짓거리를 하느냐며 빈정대는 오프레드의 항의에 대꾸하는 프레드 사령관의 논리는 빈약해 보인다. 그렇다면 시녀들이 좋아서 혹은 국가에 대한 애국심 때문에 자청해서 시녀가 되었단 말인가. 여성들은 오로지 미래 세대 생산을 위한 도구로 생각하는 야만적인 시각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장면에 소름이 돋았다. 하긴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어느 나라에서는 국가 기관이 예산을 들여 터무니없는 ‘출산지도’를 만들기도 하지 않았던가. 이런 시각이야말로 길리아드를 지배하는 사령관들의 시각과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 또, 일반 시민들에게는 종교적이고 엄숙한 삶을 강요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이세벨 하우스에서 쾌락을 만끽하지 않았던가. 마가렛 애트우드는 이런 방식으로 어느 시대에나 등장하는 지배권력의 위선적인 면모를 보기 좋게 저격한다.

 

소설 <시녀 이야기>의 마지막은 오랜 시간이 흘러 길리아드 시대가 끝난 뒤, 연구자들이 오프레드가 남긴 기록을 가지고 논쟁하는 장면이다. 나는 여기에서 다시 한 번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 지에 대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길리아드의 역사를 논의하는 학회에서 연구자들은 오프레드가 남긴 기록에 대한 신빙성에 대해 제기한다. 자랑할 만하지 못한 일들에 대해 공식적인 기록이 남아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일본도 정신대에 대해 공식적인 기록이 없으니 존재하지 않았다는 식의 말도 되지 않는 논리로 억지를 부리고 있지 않은가. 주제와 상관이 없겠지만 어제 본 <김어준의 블랙하우스>에 등장한 미국사람 타일러 라쉬가 설파한 강대국의 논리인 국가는 일체의 감정이 배제되어야 한다는 방식의 그럴듯한 논리가 불쑥 떠올랐다.

 

처음으로 읽은 마가렛 애트우드 여사의 책이었는데, 지난 초여름에 본 드라마 <시녀 이야기>와 비교하면서 읽는 재미가 대단했다. 드라마는 드라마 대로, 그리고 소설은 소설 대로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이제 <그레이스> 차례다. 이번에는 아무래도 소설부터 먼저 읽고 나서 드라마를 시작해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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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11-06 14: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드라마 보고 싶네요.
IP TV에서 하려나요?

책은 왠지 지루하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어느 지점에 꽂혀 내달리게 만드는 소설이 또
기가막히죠.^^

레삭매냐 2017-11-07 11:41   좋아요 0 | URL
아마 곧 풀리지 않을까 싶네요 :>

전 드라마를 먼저 보고 나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일종의 시너지
효과를 느꼈다고나 할까요.

원작소설의 탄탄한 구성과 서사구조
에 다시 한 번 감탄했습니다.

독서괭 2017-11-07 0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으면서 출산지도 사건이 떠올라 오싹했습니다...

레삭매냐 2017-11-07 09:31   좋아요 0 | URL
자그마치 21세기에도 이런 발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더 놀랐지
뭡니까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