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했던 샤를리즈 테론 주연의 <아토믹 블론드>를 봤다. 개봉하기 전부터 고대하던 작품이었는데 막상 보고 나니 좀 그랬다. 아무래도 기대만 못하다고 해야 할까. 우선 28년 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시절 베를린을 무대로 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젠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린 냉전 시기 영국 MI6, 소련의 KGB 그리고 미국 CIA 3파 첩보전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는 점이 아무래도 약점이었던 것 같다.

 

리메이크된 <매드 맥스>에서 퓨리오사라는 여전사로 줏가를 올린 샤를리즈 테론이 이번에는 매력적이면서도 못하는 게 없는 유능한 영국 MI6 소속 스파이 로레인 브로튼으로 등장해서 화끈한 액션을 선보인다. 장신의 여배우가 보여 주는 액션 시퀀스는 이제 하도 영화를 많이 봐서 닳아 버린 관객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전 세계 모든 스파이들의 정보가 담긴 시계, 그 다음에는 그 모든 정보들을 암기해 버린 동독 슈타지 출신 스파이글래스를 호위해서 안전한 서방세계로 넘기겠다는 로레인의 야심찬 계획은 이중스파이 역할을 맡은 배우 덕분에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린다.

 

도대체 누가 누굴 믿어야 하는지 모르는 아사리판 같은 베를린 첩보세계에 대한 짤막한 정보들은, 베를린 장벽 붕괴라는 압도적이고 역사적 사건 앞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 수가 없다. HBO 전쟁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신출내기 배우로 출연했던 제임스 맥어보이는 이중스파이 데이빗 퍼시벌 역을 맡아 열연을 보여준다. 하지만, 샤를리즈 테론 원탑에 사이드킥을 하다 보니 비중이 떨어지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샤를리즈 테론은 베를린 공항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그녀의 정체를 이미 파악한 KGB 브레모비치 휘하 스파이들의 집중 공격을 받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미 소련에서는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요즘 같이 않게 몸에 마이크를 장치하고 비밀을 상대방보다 조금이라도 더 얻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장면에서는 역시 과거로 돌아가는 무리수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영화가 느슨해지려는 순간마다, 샤를리즈 테론의 시원시원한 액션 씬들이 무시로 등장한다. 역시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대로 스파이글래스를 지키기 위해 몸을 내던져 가며 자신을 쫓는 스파이들과 계단에서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이 최고였다.

 

영화는 그렇게 격투로 만신창이가 된 로레인 브로튼이 CIA 참관 하에, MI6지부로 와서 베를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대한 보고를 듣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존 굿맨이 CIA 연락관으로 등장한다. 영국 정보 담당관은 예전에 드라마 셜록에서도 등장했던 분인데 이름은 잘 모르겠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모든 작전을 총지휘한 C라는 양반은 거울 뒤에 앉아서 자신의 눈 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의 정황을 치밀하게 듣고 있다. 뭐 그렇게 가는 거겠지.

 

<킹스맨> 1편에서 냉혹한 킬러로 등장했던 소피아 부텔라가 프랑스 정보요원 델핀 라살 역을 맡아 이중스파이의 정체를 밝히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동시에 샤를리즈 테론의 동성 애인으로 고혹적인 장면들을 연출하기도 했다.

 

 

영화 <아토믹 블론드>의 결말에 준비된 반전에 반전은, 아무래도 오래 전 영화 <노 웨이 아웃>에서 케빈 코스트너가 보여준 숨막히는 긴장과 반전을 능가하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역반전은 나름대로 신선했지만, 이미 샤를리즈 테론의 액션 장면을 숱하게 경험하다보니 마지막에 준비된 앙뜨레에서 이미 배가 불러 제 맛을 몰랐다고 해야 할까. 혹시 시퀄이 나오나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런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을 듯 싶다. 만화를 원작으로 삼아 그랬을까? 이야기 구조가 어느 순간, 뚝뚝 끊긴다는 느낌도 들었다. 샤를리즈 테론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했던 탓일까?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맥이 빠졌다.

 

영화에서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음악으로, 뉴오더의 <블루 먼데이> 리메이크 버전(by Health), 퀸과 데이빗 보위의 <언더 프레셔> 그리고 조지 마이클의 <파더 피겨>, 클래시의 <런던 콜링> 같이 한 시절을 풍미했던 음악들이 등장한다. 잘 나가던 뮤지션들이 이제는 모두 고인이 되어 버렸으니 지난 28년이란 시간이 더더욱 실감이 났다. 그 시절에는 이런 뉴웨이브 사운드가 대세였구나. 여담으로 <언더 프레셔>의 베이스 라인이 돋보이는 서주를 들으면서 난 바닐라 아이스의 <아이스, 아이스 베이비>를 생각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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