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절한 균형 아시아 문학선 3
로힌턴 미스트리 지음, 손석주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은행나무 블로그에서 이번에 퓰리처상 수상작인 콜슨 화이트헤드의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를 소개하면서 오프라 윈프리 북클럽에서 강력추천한다는 소설 5를 소개 받았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처음 들어보는 로힌턴 미스트리의 <적절한 균형>이었다. 나름 책 좀 읽는다고 생각했는데, 책의 세계는 일개독자에게 역부족이었다. 다시 겸손해져야겠다. 알라딘 중고서점을 검색해 보니 마침 인근 서점에 있어서, 냉큼 달려가 사서 읽기 시작했다. 사실 벽돌 사이즈만한 두께 때문에 사기 전에 1초 정도 망설였다. 하지만 책에 대한 궁금증이 그런 외향적인 부담감을 충분히 이겨낼 수가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읽기 시작했고, 벽돌 두께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극복해냈다. 아마 올해 내가 읽은 책 중에 가장 두꺼운 책이며, 그만큼의 충분한 성취감으로 나에게 보상해 주었다. 아 참 그리고 콜슨 화이트헤드 신간 서평단 신청한 건 보기 좋게 미역국을 먹었다. 그럼 어떠랴 사서 읽으면 될 것을.

 

뭐 언제나 그렇지만 또 시작하기도 전에 사설이 길었다. 로힌턴 미스트리 작가는 인도 뭄바이(구 봄베이) 출신의 파르시(인도에 사는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이들을 지칭하는 표현) 사람으로 지금은 캐나다에 정착해서 글을 쓰고 있는 디아스포라 작가 중의 한 명이다. 어때 바로 생각나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줌파 라히리. 로힌턴 미스트리보다 훨씬 더 자자한 명성을 가지고 있는 비슷한 삶의 유형을 겪은 작가다. 그런데 로힌턴 미스트리의 <적절한 균형>을 읽으면서 어느 매체에서 왜 줌파 라히리가 과대평가된 작가라고 혹평을 했는지 바로 알 수가 있었다. 로힌턴 미스트리가 구사하는 전통적 리얼리즘은 줌파 라히리가 체험한 피상적 인도의 그것을 능가하고 있었다. 국내에 출간된 로힌턴 미스트리의 나머지 책들 가운데 데뷔작 <그토록 먼 여행>은 이미 읽기 시작했고, <가족 문제>도 이번 가을에 읽을 계획이다. 새로운 작가를 만나는 즐거움과 그것이 주는 쾌락은 무엇에 비할 바가 없을 것 같다.

 

아직도 <적절한 균형>에 대한 이야기는 시작도 안했구나. 이제 시작한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1975년. 네루의 딸로 인도 총리가 되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인디라 간디가 집권한 시기가 겹친다. 당시 인도 정세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하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할 듯 싶다. 인디라 간디의 부정선거 개입으로 인도 고등법원의 최종심에서 유죄를 받으면서 총리직이 박탈됐다. 영국의 오랜 압제에서 해방된 조국 인도에 민주주의를 심고, 모든 국민들이 평화롭고 자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거라는 독립운동 세대의 취지는 이미 바랜지 오래다. 평화의 여신이라기 보다, 조국 근대화라는 미명 아래 수많은 빈민들을 궁지에 몰아넣은 파괴의 여신 칼리를 닮은 독재자에 가깝게 로힌턴 미스트리 작가는 인디라 간디를 묘사한다. 국가비상사태와 국가보안법으로 시민들을 억압하던 시절이 우리나라에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나 보다. 동시대 남부 아시아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소설의 곳곳에서 등장하는 어처구니없는 정치현실은 암살당해 죽은 독재자에 대한 냉소적 오마주라고나 할까.

 

수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뭄바이행 야간기차에서 만난 세 사람의 이야기로 소설 <적절한 균형>은 시작한다. 지긋지긋한 차마르(무두장이) 카스트를 벗어나 도시에서 재봉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상경한 이시바와 옴(프라카시) 다르지에게 도시는 그렇게 만만한 장소가 아니었다는 것이 곧 드러난다. 그들이 상경하게 된 배후에 도사린 카스트 제도가 빚은 비극에 대해서는 천천히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다른 17세 소년 마넥 콜라는 콜라 가문의 기대주로 뭄바이에서 기술을 배울 계획이다. 이들은 모두 청상과부 디나 달랄의 집에 모이게 된다. 로힌턴 미스트리는 기구한 운명을 진 네 명의 주인공들과 그들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얽힌 이들을 차례로 등장시키는 방식으로 소설을 전개한다.

 

우선 뭄바이 파르시 집안 출신의 디나는 의사였던 아버지가 봉사활동에 나섰다가 코브라에게 물려 죽으면서(지극힌 인도스러운 설정이려나) 삶이 예상치 못한 변곡점을 그리지 시작한다. 폭군 오빠 누스완에 함께 살던 디나는 가난하고 젊은 약제사 러스텀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곧 결혼에 골인한다. 비록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시절은 오래 가지 못하고, 자전거를 타고 조카들에게 줄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던 러스텀이 교통사고로 죽으면서 디나에게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다. 자존감 강한 디나는 죽을 만큼 재가하라는 오빠 누스완의 잔소리가 듣기 싫지만, 매달 호랑이처럼 집세를 걷으러 다니는 집주인의 하수인 이브라힘의 독촉에 오빠에게 돈을 빌린다. 그러던 중, 학창시절 친구 제노비아의 제안으로 옷을 만들어 수출하는 오레보아 사장 굽타 부인의 발주를 처리하게 된다. 문제는 40대 초반의 나이에 이미 눈이 안좋아진 디나 혼자만으로는 밀어 닥치는 굽타 부인의 발주를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고용하게 된 재봉사들이 바로 이시바와 옴이다.

 

디나 달랄 아주머니의 케이스에서 인도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젠더 이슈를 표명했다면, 이시바와 옴의 경우에는 카스트 제도에 대한 매서운 비판을 담고 있다. 불가촉천민 달리트 출신의 이시바와 나라얀은 무두장이 아버지 묵히 모치의 현명한 판단으로 읍내의에서 무자파 재봉사를 운영하던 이슬람교도 친구 아시라프 휘하에서 재봉 기술을 배워 성공하게 된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없는 사이에 칠판에 장난하던 형제를 선생이 혹독하게 매질한 사건을 마을에서 인정받는 브라만 판디트 랄루람에게 항의하러 갔던 둑히는 그의 처분에 분노하고, 법으로 폐기되었지만 여전히 민중들 사이에서는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카스트 제도에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 분리독립 와중에 분노한 힌두교 신자들에게 학살당한 뻔한 아시라프 씨를 이시바와 나라얀이 나서서 재치를 발휘해서 구해 내기도 했다. 이성이 마비된 광신적인 행동이 어떤 파국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에 대해서도 로힌턴 미스트리는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은 묘사로 처리해냈다. 그렇게 모든 것이 행복하게 진행되었으면 좋겠지만, 평소에 읍내에서 재봉사로 성공한 나라얀이 고향에서 떵떵거리고 사는 모습에 불만을 품고 있던 타쿠르 다람시의 잔혼한 린치로 다르지 가족은 몰살당하는 비극을 겪게 된다.

 

이런 디나와 다르지 가족의 비극에 비하면 분리독립으로 막대한 재산을 잃었지만 그런 대로 먹고 살만했던 마넥 콜라는 행복한 편이 아니었을까. 콜라 가문 대대로 이어지는 비급으로 만들어진 청량음료 케이시의 수효는 아버지 파록과 어머니 아반 그리고 어린 마넥이 먹고 살기에 충분했다. 물론 평안했던 마을에 도로가 뚫리고 미국의 진짜 콜라가 들어오면서 콜라 가문이 휘청거리긴 했지만 말이다. 마넥은 자신이 나고 자란 그 땅을 그렇게 사랑했고, 아버지의 가게를 물려받을 꿈에 젖어 있었지만 모름지기 남자는 도회에 나가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부모님의 설득으로 뭄바이에 오게 되었고, 기숙사 생활에 지친 마넥 역시 아반의 친구 디나 아주머니의 거처에 둥지를 틀게 된다.

 

이렇게 제각각의 사연을 안고 디나의 거처에 모인 이들의 속셈을 제각각이다. 디나는 더럽고 불결한 재봉사들의 자신의 일감을 언제 빼앗을 지 모른다는 그런 위협에 시달린다. 옴은 디나 아주머니가 자신들을 착취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불만을 표출한다. 사람 좋은 이시바는 어떻게든 돈을 부지런히 모아서 조카를 장가 보낼 계획에 여념이 없다. 옴과 동갑내기 마넥은 학업에는 관심이 없고 현재에 만족하는 삶을 보내고 있다. 기숙사 시절 만난 학교 선배 아비나시는 학생운동을 하면서 그에게 체스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나중에 밝혀지게 되자만 아비나시도 국가비상사태 와중에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 빨리 학교를 졸업해서 돈을 벌어 세 명이나 되는 여동생들의 지참금을 마련해야 한다고 노래하던 청년의 비참한 죽음 앞에서 할 말을 잃어 버렸다.

 

로힌턴 미스트리는 다시 이시바와 옴이 겪게 되는 상상을 초월한 사건들을 소설이라는 무대에 올린다. 우선 빈민가에 살던 그들은 출근하던 어느 날, 경찰들에게 잡혀 총리 연설장에 끌려 가게 된다. 과자와 돈을 준다는 말에 자발적으로 간 사람들도 있겠지만, 강제로 끌려간 것이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들이 머물던 판자촌은 도시미화라는 미명 아래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어 버린다. 이 때 알게 된 머리털 수집가 라자람과의 질긴 인연도 주목할 만하다. 옆에 살던 원숭이 키우던 아저씨 얘기도 그렇고. 책의 표지에 실린 <사비타, 장대 위의 소녀> 사진에서 영감을 얻었던 게 아닐까.

 

인도 각지에서 밀려드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거주공간이 전무했던 1970년대 중반 뭄바이의 실태를 이보다 더 세밀하게 묘사할 순 없을 것 같다. 그렇게 살 곳을 잃은 이시바와 옴의 거주문제는 더 큰 문제를 낳게 된다. 거리에서 노숙하던 그들은 이번에도 경찰에도 포획(?)되어 공사장에 끌려가게 된다. 노숙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부당한 일을 당해도 된단 말인가? 연설장에서 총리는 가난한 인민들을 위해 복무하는 하인이라고 말했지만, 그놈의 잘난 총리는 공사다망한 국가의 막중한 일들을 처리하느라 바빠, 정작 가난한 사람들이 당하는 비극이 어떤지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공사판에 같이 끌려간 거지, 일명 지렁이라 불리는 샨카와 서로 도와 가며 고난을 이겨내던 와중에 공사장에 우연히 들른 거지 왕초의 도움으로 공사장을 탈출하는데 이시바와 옴은 성공한다.

 

이런 우역곡절 끝에 디나, 마넥, 이시바와 옴은 마침내 서로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물론 그동안에 작은 장애물들이 끝없이 등장했지만,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 이시바는 고향으로 돌아가 옴의 색시를 찾아 주겠다는 자신의 마지막 임무에 나서게 되는데 이게 또 마지막 비극으로 귀결된다. 사실 어느 정도의 해피엔딩을 기대했던 독자의 계산을 로힌턴 미스트리 작가는 산산조각내 버린다. 뭐 다 그렇게 가는 거지. 마지막으로 이어지는 1984년, 인디라 간디가 시크 교도의 총탄에 쓰러지고 폭동과 학살의 유혈이 인도를 휩쓸던 시간에 아버지가 대장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8년 만에 두바이에서 인도로 돌아온 마넥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소설의 어딘가에 나온 문장처럼, 시간은 누군가에게 힘센 고문 기술자다. 어느새 주변에 벌어지는 모든 일에 대해 염세주의자가 되어 버린 청년 마넥은 신이 있다면 파면시켜 버리겠다고 했던가. 인도에 존재한다는 수많은 신 중에 어느 신에게 해당하는 말인진 모르겠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끝없이 벌어지는 비극에 대한 가장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책을 읽다가 든 생각 중의 하나. 카스트 제도는 이슬람 교도나 파르시 사람들에게는 적용되지 않고 오로지 힌두 교도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인가. 개인적으로 아시라프 아저씨와 이시바-나라얀 그리고 옴의 이상적 관계를 통해 인도에서도 타종교인들과의 공존도 가능한 게 아닐까라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 봤다. 종교가 가진 특성 중의 하나가 관용일진대, 그렇지 못한 현실에 대한 기술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다 뻐근해져 올 지경이었다.

 

개인의 삶에서 출발해서 정치와 사회경제, 종교 그리고 계급제도까지 아우르는 로힌턴 미스트리 작가의 대작에 다시 한 번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어지간한 책 두 권 분량에 해당하는 엄청난 분량이었지만 네 명이 주인공이 빚어내는 말빚에 그만 매혹되어 생각보다 금세 읽을 수가 있었다. 도저히 손에 책을 뗄 수가 없었다고 해야 할까. 왜 이제야 이런 멋진 작가의 글을 읽게 되었는지 아쉬울 따름이다. 이 책을 다 읽기 전에 주만한 데뷔작 <그토록 먼 여행>이 도착해서 그 책도 읽기 시작했다. 가족 3부작을 다 읽고 나서 아쉽다면 어쩌면 아직 국내에는 출간되지 않은 로힌턴 미스트리의 원서를 주문할 지도 모르겠다. 디아스포라 작가의 한계가 있을 진 모르겠지만, 정말 대단한 작품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아, 소설에서 이시바가 말한 대로 모든 풍상을 겪고 난 뒤에도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살 만하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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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09-05 1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마어마하게 알찬 리뷰네요.... 감사합니다. 어쩐지 감사하네요.

레삭매냐 2017-09-05 11:57   좋아요 0 | URL
감히 올해 읽은 책 중에 최고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이런 작가의 책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니...

오늘부터라도 주변에 책읽는 분들께 알리려고요.
이번달 독서모임에 가서도 신나게 떠들 생각입니다.

잠자냥 2017-09-05 1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벽돌만큼 긴(?) 리뷰군요! ㅎㅎ 저도 겸손한 마음가짐으로(이런 책이 있었군요;;)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레삭매냐 2017-09-05 12:04   좋아요 0 | URL
정말 후회하시지 않으실 거라고 장담합니다.

너무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들입니다.

coolcat329 2017-09-06 2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읽어보겠습니다.

레삭매냐 2017-09-11 09:16   좋아요 0 | URL
강추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