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으로
다니 라페리에르 지음, 박명숙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세상에 내가 아이티 출신 작가의 책을 다 읽게 될 줄이야. 뉴욕 시의 택시업계를 주름잡는 아이티 출신 운전사들 말고는 나와 딱히 인연이 없을 줄 알았던 뒤발리에의 후손들 중에도 특출난 재능의 소설가가 있었던 모양이다. 내리 쬐리는 뜨거운 남국의 태양 아래 넘실거리는 욕망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던 고수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이 바로 다니 라페리에르였다. 알라딘에 유일하게 리뷰를 남긴 Falstaff님의 리뷰를 보고 이 소설의 존재를 알게 됐고, 절판되었다는 소식에 바로 인근 알라딘 중고서점에 가서 업어온 책이 바로 <남쪽으로>다. 아니 이렇게 재밌을 수가!!! 왜 이제야 이 책을 되었단 말인가. 그전에 읽고 있던 배명훈 작가의 신간 <고고심령학자>를 내팽겨쳐 버리고 바로 달려들었다. 다시 돌아온 무더운 밤에 도저히 마지막 장까지 넘기지 않고서는 배길 자신이 없더라. 아, 참고로 중고책 컨디션은 최고였다. 책등까지 빳빳한 것으로 보아, 아무도 읽지 않은 새책이나 다름 없는 중고였다. 이런 책이 절판이 되었다니 아쉬울 따름이로다.

 

소설의 어디선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바로 권력, 돈 그리고 섹스라고 등장인물이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만물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변화무쌍하게 돌아가는 세상을 너무 도식적으로 표현한 게 아닌가 하는 노파심이 들지만, 작가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라 딱히 반박할 생각은 없다. 우리에게는 수년 전 강타했던 지진으로 수십만명이 죽어나간 카리브 해의 소국 아이티는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는 그런 매력을 지닌 섬이다. 이스파뇰라 섬을 동쪽의 이웃, 우리에게는 야구 잘하는 나라 도미니카 공화국과 나눠 가지고 있다. 대부분 스페인 식민지였던 카리브 해 인접국가들과 달리 아이티는 프랑스 문화권에 속해 있다. 물론 피부색은 검은색. 세계최초의 흑인 공화국이자 미주 대륙에서는 미국 다음으로 식민모국에서 독립을 쟁취한 나라라고 알려져 있다.

 

각설하고 프랑스어로 소설을 쓰는 다니 라페리에르는 스페인 식민지에서, 프랑스 식민지로 다시 미국의 침공을 받고 파파 독과 베이비 독 밑에서 30년간에 걸친 악명 높은 독재에 시달린 조국 아이티가 가진 관능을 소설 속에 가득 담아냈다. 까맣고 탱탱한 피부의 소유자들인 17세 꼬마 팡팡과 찰리 등등은 자신들이 가진 매력 아니 마성에 가까운 능력(?)으로 주변의 여성들을 호리는데 출중한 실력을 발휘한다. 더 노골적인 표현을 쓰고 싶으나, 19금 리뷰로 찍힐 까봐 살짝 이 정도로만 맛보기를 하자.

 

재봉사로 일하는 어머니의 고용주이자 자신의 여동생 마리즈가 다니는 부르주아 학교의 교장 프랑수아즈 생피에르 여사를 호린 17세 소년 팡팡. 도저히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남녀의 조합이 이색적인 과일이 넘쳐 나고, 뜨겁게 불타는 검은 태양 아래 딸 수 없는 금단의 열매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본능에 충실한 인간군상들이 넘쳐난다. 뉴욕 출신으로 고상한 문화취향을 자랑하는 미국 영사 부인 크리스티나는 도덕군자 같은 딸 준 갤러웨이가 너무 걱정이다. 우디 앨런과 필립 로스 같은 유대계 미국인들이 발표하는 작품들을 사랑하는 크리스티나의 걱정은 어느 날 밤 무참하게 박살난다. 공부 밖에 모를 거라고 생각해 왔던 얌전한 딸 준이 하인 압살롬과 뒤엉켜 있는 장면을 목격한 크리스티나의 심정이란. 뭐 그렇게 가는 거지. ‘얌전한 여자애들도 할 건 다 한다’라는 표제가 전광석화처럼 이해됐다.

 

주드 미셸 혹은 도도란 이름의 음악 신동을 후원한다는 미명 아래 자신만의 하렘을 꾸미고자 하는 노욕의 소유자로부터 시작해서, 남편과 아이 셋을 거느린 휴가여행에서 인생의 남자를 만나 아이티에 남게 된 런던 출신 여성 이야기는 도시전설에 버금가는 위력을 발휘한다. 전설은 새로운 전설을 낳는 법, 선진국 출신으로 무엇 하나 풍족한 것이 없이 살던 여성이 아이티에 쌀농사를 짓는 농부가 되고자 남았다고 했던가. 하긴 베르니사주에 참석했던 파리에서 날아온 좌파 출신 저널리스트가 부두교의 신 레그바와 부지불식 간에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은 또 어떤가. 모든 것을 다 기묘한 일이라고 치부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할 적마다 실패하게 되는 건 저주 탓만은 아닐 것이라는 추정에 도달하기도 한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아이티의 멋진 해변가 땅에 호텔을 지은 몰레옹 아저씨는 경영난에 시달리던 중에 기발한 아이디어로 기사회생의 찬스를 잡기도 한다. 모든 것이 부족한 아이티에 넘쳐 나는 자원인 미소년을 이용한 비즈니스 말이다. 불나방처럼 사랑에 굶주여 그들에게 달려드는 ‘북쪽’에서 온 여성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게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호텔 업주의 마음이겠지만.

 

나는 문득 소설을 읽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모름지기 다른 곳에서라면 몰라도 아이티에서는 잠시 이성적 판단을 멈추어도 좋겠구나라고 말이다. 준 갤러웨이의 아버지 해리처럼 노골적으로 자신의 본능에 충실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는 팡팡이나 찰리 같은 녀석들과 뒷거래로 자신이 원하는 아이티 아가씨들을 모아 주면, 미국 비자를 내주겠다는 파렴치한 제안도 마다하지 않는다. 유력한 대사의 조카딸로 기세등등하게 등장해서 찰리의 부모님들을 잔소리로 피곤하게 만들었던 도도하고 콧대 높은 미시 아벨을 찰리가 고전적인 방식을 동원해서 사랑의 포로로 만들어 버리는 장면은 흥미진진했다. 찰리와 아벨이 화장실에서 나누는 격렬한 정사 장면을 읽는 순간에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건만 얼굴이 다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생각만 해도 끈적거리는 습기와 열기 탓으로 돌리기에는 평소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의 현실화라고 해야 할까. 인간이란 존재는 금기 혹은 금단의 열매가 주는 유혹을 이길 수 없다는 작가의 확신에 찬 계시일까. 일상이 아닌 새로운 환경이 부여한 낯섬이 주는 파격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하는 걸까. 그동안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왔던 이들이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인식의 전환의 순간, 그 누구도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가치관의 극적 유턴이라고 해야 할까. 남편이고 자식, 알량한 재산 따윌랑은 내 알 바 아니다라는 선언이 이어진다. 그런 선택을 한 이들을 과연 비난할 수 있을까.

 

왜 이제 <남쪽으로>의 존재를 알게 되었는지 후회가 다 될 정도로 재밌는 책이었다. 바로 다니 라페리에르의 다른 책들도 혹시 국내에 출간이 되었나 수배해 봤다. 이 책에 앞서 두 권의 라페리에르 책들이 출간되었지만 역시나 절판됐다. <슬픔이 춤춘다>는 구할 수가 있었지만 관능과 에로티시즘 그리고 기묘한 열락의 세계가 넘실거리는 <남쪽으로>와는 결을 달리 하는 것 같아서 일단 패스했다. 뜨거웠던 여름날의 폭염이 가시는 무렵에 기념비적인 작품을 만나 너무 즐거운 독서의 시간이었다. 2017년 내가 읽은 베스트 탑 10에 올리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17-08-25 1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의 한 장을 영화화 한 로랑 캉테 감독의 <남쪽을 향하여>도 재미있습니다. 전 영화만 봤는데 책도 궁금해지는군요.

레삭매냐 2017-08-25 16:16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든 영화가
있었네요. 한 번 보고 싶습니다 :>

책은 엄청 재밌었는데 영화는 또 어떨지
궁금하네요.

전체 책이 아니라 한 부분만 영화한 모양
이네요.

transient-guest 2017-08-29 0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적절한 줄거리 정리와 함께 감상까지 정말 잘 정리하신 리뷰..ㅎ 저는 줄거리 정리가 너무 어렵더라구요.

레삭매냐 2017-08-29 09:34   좋아요 1 | URL
감상이나 분석을 더 넣어야 하는데
줄거리 정리만으로도 버겁습니다 :>

AgalmA 2017-09-04 16: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은 절판된 책들을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참 잘 업어오신단 말이죠ㅎ 능력자!

레삭매냐 2017-09-04 17:16   좋아요 1 | URL
<남쪽으로> 같은 경우에는 절판됐지만
중고서점에 많더라구요...

왠지 절판 품절책에 더 애정이 가더라구요.
신간도 바로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없다면
묵혔다가 중고서점에서 이용하게 되더라구요.

AgalmA 2017-09-04 17:19   좋아요 0 | URL
굿즈 탐욕 때문에 저도 신간을 눈물 머금고 사는데ㅎ; 지금 당장 읽지 않음 못 살겠어! 아님 좀 기다렸다 중고로 나오는 거 사는 게 낫죠^^ 중고라도 깨끗한 책이 많으니까요. 집에 읽을 책이 없는 거도 아니고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