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
폴 서루 지음, 이미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7년 7월
평점 :
절판


 

* 투시탈라 : 사모아 말로 ‘이야기꾼’라는 뜻이다.

 

어제 폭우를 뚫고 시흥 아웃렛에 갔다가 들린 북스리브로에서 벼르던 폴 서루의 <세상의 끝>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단박에 절반 정도를 읽고 나서, 왜 내가 진작에 이런 작가를 몰랐나 하는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국내에 모두 5권의 폴 서루 작가 책이 출간되었는데 <아프리카 방랑>은 절판되어서 구할 수가 없게 되었고, 한 권은 읽고 있는 중이며 나머지 3권을 차례대로 읽을 계획이다.

 

반세기가 넘도록 여행작가로 활동했다는 폴 서루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메드퍼드에서 이태리계 문법 학교 선생님이었던 어머니 앤과 프랑스계 캐다다 출신이었던 아메리칸 레더라는 소파 회사 세일즈맨 아버지 앨버트 슬하에서 태어났다. 메인대학교화 유매스 애머스트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말라위에 교사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말라위 수상이었던 헤이스팅스 반다의 정적들을 이웃 우간다로 피신시키는 일을 돕다가 말라위에서 추방되고, 평화봉사단에서도 퇴출되기에 이르렀다. 이 일화를 훗날 자신의 소설 <정글 러버스>에서 다루기도 한 폴 서루는 우간다에서 V.S. 나이폴과 교류를 하기도 했다. 우간다에서 성난 시위대가 폴 서루의 아내가 탄 차를 전복시키려는 사건을 겪은 뒤, 폴 서루 가족은 아프리카를 떠나 싱가폴에 체류하기도 했다. 그 뒤, 런던 남부의 도셋에 정착했고 지금은 하와이와 케이프 코드를 오가며 살고 있다고 한다.

 

모두 14편 그리고 에필로그 같은 이야기가 담긴 <세상의 끝 그리고 다른 이야기들>(원제)를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저자 폴 서루와 함께 런던으로, 코르시카로, 열기가 피어오르는 푸에르토 리코로 그리고 스산한 가을 바람이 부는 보스턴 혹은 하이애니스로 그렇게 공간이동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은 여행자의 기록이라기 보다 세계 어디에서고 일어날 법한 이야기들을 채집해서 한 데 모아 고추장을 넣고 쓱쓱 비빈 비빔밥 같은 글들이라고나 할까.

 

영국 모처에 실제로 존재하는 <세상의 끝>에 사는 미국 남자는 아내와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자부하지만 정작 그의 가정은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세상의 끝’으로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아이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모르는 엄마 친구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와 함께 갔던 박스힐로 연을 날리러 가는 장면 그리고 이어지는 고통의 순간들을 포착하는 작가의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모국 영국에서처럼 차가운 음료를 마시겠다는 일념으로 수레에 얼음을 싣고 집으로 돌아가는 와중에 벌어진 일을 담담하게 묘사한 <임피리얼 얼음 상점>도 음산한 잔영을 뿜어낸다. 과연 네 명의 남자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문학산업에 기생해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들에 대한 폴 서루가 구사하는 조롱과 해학도 소설집의 곳곳에서 번득인다.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들였지만, 지금은 예민한 인종 문제가 될 수 있다며 점점 술에 취해 가는 브리스토 양에게 소설집에서 제외하는 게 어떠냐고 묻는 출판사 직원과의 대화. 괴짜 시인의 습작을 손에 넣어 보겠다는 일념으로 접근했다가 호되게 당하고 물러났지만,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가 시인의 잡역부를 매수해서 마침내 시인의 습작 원고를 손에 넣는데 성공했지만, 육필원고가 아니라 잡역부가 정성스레 타이핑한 서류였다는 반전에서는 정말 빵 터져버렸다. 뭐 그렇게 가는 거겠지.

 

하바드 경영대학원 출신으로 파리에서 부정한 사업에 개입하게 된 남자는 아내에게 부끄러울 만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데카당스한 분위기에 젖어 외도에 돌입하게 된다. 하긴 파리에 가게 된 시작부터 외화를 몰래 반입하는 배달꾼의 역할이었지 아마. 낯선 곳에서 휴식일인 일요일은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지옥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직접 경험하기도 하면서. 그리고 보니 나도 할슈타트 여행에서 비슷한 체험을 했었다. 무언가 굉장한 볼거리 혹은 경험을 원하는 여행객에게 현지인들에게 휴식을 주는 주말은 따분하고 볼거리가 없는 그런 시간들이었다. 사람들이 쉬고 있는 시간은 나같이 기대에 부푼 관광객에게는 그저 따분한 시간들이었다.

 

원치 않는 임신으로 푸에르토 리코로 도망간 여인들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부모의 보살핌도 경제력도 없는 이들에게 ‘꽃의 섬’은 어쩌면 막다른 골목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성장해온 공간에서 분리된 이들에게 유일하게 필요한 것은 식료품비와 방세를 낼 수 있는 경제력이었다. 남자는 현지 레스토랑에 취업해서 돈을 벌면서, 원치 않는 출산으로 남은 삶이 파괴되는 것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런 예측가능한 미래를 잘 아는 여자는 남자에게 어서 자신을 떠나라고 부추긴다. 어쩌면 앞으로 닥칠 결혼생활에 대한 전조처럼. 어쩌면 그 순간 소설집의 처음에 등장한 <세상의 끝>으로 돌아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야기의 순환이라고나 할까. 코르시카에서는 처음 만난 유부녀에게 도망가자는 즉흥적인 제안을 던진, 이제 막 아내로부터 결별을 선고받고 상실감에 시달리던 미국 교수가 등장한다. 그런 즉흥적인 감정이 휘발해 버리고 나면 남은 것은 어떤 감정일지 폴 서루는 아주 잠시 맛만 보여준다.

 

소설집 <세상의 끝>에서 가장 재밌게 읽은 단편은 바로 <야드 세일>이다. 평화봉사단으로 활동했던 폴 서루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일까. 소설의 주인공 플로이드 역시 폴리네시아 서사모아에 가서 2년간 평화봉사단으로 지내면서 현지에 완벽하게 적응한 모습을 보여준다. 플로이드는 미국으로 돌아와 이혼한 부모 대신, 소설의 화자인 프레디 이모네 얹혀 지내면서 침대 대신 해먹을 더 편하게 생각하는 전형적인 히피 스타일의 청년이다. 청바지 대신 라바-라바라는 이름의 사롱(치마)을 더 편하게 생각하는 조카는 프레디 이모 앞에서 구운 박쥐 요리에 대해 떠들어 대고, 사모아에 두고 온 유사가족에 대해 사자후를 토해낸다. 미국식 관습 대신 사모아에 설교를 늘어놓는 조카 앞에서 프레디 이모는 코코넛 열매로 쉴새없이 종알대는 플로이드의 입을 명중시키는 상상에 젖는다. 어쩌면 사모에 대해 모르는 이모와 세상을 보고 배운 조카 세대의 차이라고나 할까. 그런 부분들을 유머스럽게 짚어낸 폴 서루의 글에 흠뻑 매료되어 버렸다 나는.

 

그동안 모르고 지내온 폴 서루 작가의 매력에 반한 나는 곧바로 중고서점에 달려가 1980년대 1년간 작가가 중국을 여행하고 남긴 <폴 써로우의 중국 기행>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우리에게는 여행작가로 더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는 정작 소설가로 먼저 작가 이력을 시작했다. 꽤 많은 작품들을 발표했지만 국내에 소개된 책들은 극히 일부분이다. <아프리카 방랑>도 읽어 보고 싶은데 절판의 운명인지라 애석하게도 구할 수가 없구나. 폴 서루는 국외거주자(expatriate)로 다년간의 해외 생활과 여행을 자신의 소설 속에 온전하게 녹여 내고 있다. 모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일들을 자신만의 문학세계로 구현하는 특출한 저자의 능력이야말로 소설 <세상의 끝>에서 내가 만난 즐거움이었다. 모름지기 소설이라면 이런 맛이 있어야지. 올해 내가 만난 최고의 소설 중의 하나로 꼽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뱀다리] 배곧 프리미엄 아웃렛 3층에 있는 북스리브로 그리고 스타벅스 콜라보는 지금까지 내가 방문한 서점과 커피숍의 조화 중에 정말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날이 좀 더 선선해지고 시간 여유만 있다면, 책을 보따리로 싸들고 가서 몇 시간이고 따뜻한 라떼를 곁들여 마시면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나에게는 그런 시간이 정말 필요하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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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kim 2017-08-17 17: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글 때문에 더욱더 읽고 싶어지네요.

레삭매냐 2017-08-17 17:11   좋아요 0 | URL
읽게 되신다면 후회하시지 않을 거라고 믿습니다 ~!

사마천 2017-08-18 0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리뷰만 봐도 참 재밌네요. 감사 ^^

레삭매냐 2017-08-18 15:4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너무 재밌어서 새벽까지 읽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