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가즈오 이시구로의 원작이 읽고 싶었으나, 대다수 현대일들처럼 내게는 얌전하게 앉아 책을 읽을 시간이 턱없이, 진심으로 부족했다. 그렇기 때문에 차선으로 영화를 선택해서 보게 됐다. 물론 책도 구해서 나의 책상 위에 잘 모셔 놓았다. 400쪽 가까운 책은 언제 읽으려나.




영화를 보는 내내 어쩔 수 없이 이완 맥그리거와 스칼렛 요한슨 주연의 <아일랜드>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다만 영화 <아일랜드>가 미래의 세계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소설/영화 <네버 렛 미 고>는 현재 시점으로 전개된다는 차이점 정도. 그리고 <아일랜드>의 주인공들은 철저하게 복제된 클론으로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진행될 것이라는 모르고 있다면, 가즈오 이시구로의 <네버 렛 미 고>에서는 그들, 기증자들이 순순히 체념하고 자신의 운명에 따른다는 점 정도. 사실 <아일랜드>처럼 자유의지를 가진 클론들의 반란을 예상했다면 그것은 온전하게 관객의 오류다.


마크 로마넥의 <네버 렛 미 고>에서는 소설에서처럼 간병사 캐시 H(캐리 멀리건 분)의 입장에서 관조적 시선으로 영화가 진행된다. 세 번째 기증에 나선 오랜 시절부터 친구이자 연인인 토미 D의 마지막 기증을 지켜보며 영화는 곧바로 플래시백으로 접어든다. 소설과는 다른 각색자가 각본을 맡은 만큼, 이 정도의 각색은 봐줄만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시작된 11살난 캐시와 토미(앤드루 가필드 분) 그리고 루스(키이라 나이틀리 분)가 유년시절을 보낸 1978년의 헤일셤으로 돌아간다.


이 어린아이들이 장래의 기증을 위해 키워지는 장면은 비극이다. 적당한 운동과 균형 잡힌 식사 그리고 갖가지 교육과 예술활동, 그들의 삶에 관련된 모든 것들이 미래의 단 한 가지 목표를 가리키고 있다. 1952년에 시작된 획기적인 발명으로 인류의 수명이 100살까지 늘어났다는 전제 아래 진행되는 국가기증프로그램(National Donor Program:NDP)의 실체가 바로 이 헤일셤에서 소리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정작 영화에서 다루는 무서운 진실은 모두가 NDP에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에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가 완벽하게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성인이 되었고, 카메라는 관객을 1985년의 코티지로 데려간다. 캐시와 토미 그리고 루스는 묘한 삼각관계를 이루며 서로 간에 긴장이 고조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 역시 기증자로서의 운명을 피할 수는 없다. 다만, 사랑에 빠진 헤일셤 출신의 남녀들에게는 기증 유예가 주어진다는 루머가 떠돌고 있다. 자신의 목숨을 건 굉장히 절박한 이슈임에도 영화에서는 그렇게 묘사가 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증자의 운명이 어떻게 진행된다는 것은 캐시가 본격적인 기증자들의 간병사로서 활동하기 시작하는 1994년에서 비로소 본격적으로 다뤄지기 시작한다. 아무리 영화라고는 하지만, 기증자들이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고 숙명을 그대로 받아 들이는 장면을 그대로 받아 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수년 간의 간병사 생활 끝에 캐시는 어린 시절의 친구 루스와 만나게 된다. 루스는 이미 두 번의 기증을 마치고, 가까스로 연명을 하고 있다. 오래 전에 토미와 헤어진 루스는 캐시에게 토미를 만나러 가자는 제안을 한다. 사실 그들의 애증의 관계를 뒤로 한 극적인 해후는 여전히 관객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다. 그들의 최종운명이 어떻게 될 지에 초점에 맞추어져 있을 뿐이다.


갤러리를 운영하는 마담이 그들의 운명을 좌우할 것이라고 믿는 토미는 캐시에게 자신이 수년간 작업한 그림을 보여주고, 캐시와의 진정한 사랑을 입증한다면 기증 유예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그리고 헤일셤에서의 예술활동은 그들의 영혼을 들여다보기 위한 프로그램 입안자들의 계획이라고 토미는 철썩 같이 믿는다. 과연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사실 상상했던 비극적인 장면은 루스의 마지막 기증 장면 외에는 거의 없지만, <네버 렛 미 고>는 최근에 본 가장 슬픈 영화다. 아무리 클론이라고 하지만, 인간의 존재론적이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해주었다. 영화에서는(혹시 소설에서는 어떨지 모르겠다) 어떻게 해서 헤일셤의 아이들이 선정되었는지, 그리고 기증의 구체적인 수혜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나중에 캐시의 독백처럼 기증받는 이들의 삶이 어떤 의미에서 기증자들의 삶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는지 전적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유년 시절부터 철저한 감시와 통제 아래 자란 캐시와 토미 그리고 루스가 처음 세상에 나가 다이너에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음식을 주문하는 것을 보고 씁쓸한 웃음이 났다. 그 순간 왜 그들의 운명에 대해 알려준 루시 선생님의 상황극이 바로 연상됐다. 어쩌면 그들의 비극적인 운명에 대한 전조는 비오는 날 루시 선생님이 들려준 기증자들의 암울한 미래에 대한 사실에서 시작된 게 아닐까. 그것보다 더 무서운 사실은 내게 주어진 삶을 조금 더 연장시켜 보겠다고 타인(클론)을 태연하게 희생시키는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이런 근본적인 문제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보지 못한 개인의 단상일지도 모르겠다. 과연 나에게 그런 똑같은 상황이 닥쳤을 때, 그들과 다르게 도덕률을 우선할 거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최근 <위대한 개츠비>에서 멋진 연기를 보여 주었던 영국 출신 배우 캐리 멀리건이 맡은 캐시 H 역에 호감이 갔다. 말로 이래서 좋다라고 꼭 집어서 표현하긴 어렵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녀의 연기에 몰입되어 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오히려 그녀보다 더 뛰어난 스타성을 자랑하는 키이라 나이틀리의 루스보다 낫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새로운 스파이더맨으로 자리 잡은 앤드루 가필드의 토미 D 역할도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주연을 맡은 세 명의 배우들은 서로 간에 펼쳐지는 사랑과 우정 그리고 갈등이 어우러진 미묘한 드라마를 성공적으로 만들어냈다.




그렇게 슬픈 영화를 보고 나서 허겁지겁 가즈오 이시구로의 원작을 펴들었다. 그리고 단숨에 60여쪽을 읽어내려갔다. 물론 원작소설과 영화는 달랐지만, 같은 뿌리를 가진 ‘클론’답게 공명하는 부분이 많았다. 영화가 감성적이라고 한다면, 소설은 디테일에서 도저히 영화가 추종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했다. 어서 빨리 원작소설 <나를 보내지 마>를 읽어야겠다.


정말 슬픈 영화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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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7-06-26 1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정말 좋아요!!! 꼭 읽으세요!

레삭매냐 2017-06-26 11:02   좋아요 1 | URL
소설도 책 읽고 나서 바로 읽었더라구요 :>
리뷰는 예전에 쓴 거 울궈먹기였습니다.

가즈오 이시구로 책 중에서(제가 지금까지 읽은)
가장 마음에 드는 책이더군요. 슬프고 비극적인.

유부만두 2017-06-26 1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쵸! 아름다운 비극! 영어문장이 꽤 아름다워요....

잠자냥 2017-07-20 1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통 소설을 영화화하면 원작보다 못한 경우가 다반사인데, 이 작품은 소설은 소설대로 영화는 영화대로 다 좋았어요. 캐리 멀리건과 키이라 나이틀리의 조합, 그리고 그 영화의 황량한 분위기 등등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더군요.

레삭매냐 2017-07-20 10:58   좋아요 1 | URL
격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캐리 멀리건이 덩그러니 남아 거리를 쳐다 보던
마지막 장면이던가요 정말 아름답고 슬펐던 것
같습니다.

말씀 하신 대로, 대부분 소설의 영화화가 기대
만 못한데, 영화는 영화대로 소설은 소설대로
멋진 작품이었습니다.

너무 슬픈 영화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