넛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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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넛셸>을 읽기 위해 그동안 모아 두기만 하고 읽지 않고 있던 이언 매큐언 작가의 소설을 네 권이나 읽었다. 그리고 <이런 사랑>도 읽기 시작했지만, 아직 완독에 이르진 못했다. <칠드런 액트>, <이노센트>, <체실 비치에서> 그리고 <암스테르담>을 읽으면서 그의 팬이 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하게 되었다. 이 모든 건, 바로 이 책 <넛셸>을 읽기 위한 몸풀기 운동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지난주에 신간 <넛셸>이 수중에 들어왔고, 다른 독서를 멀리하고 바로 이 책부터 읽기 시작했다. 이번달 독서모임 선정작이 <넛셸>이라는 건 비밀이 아니다. 대부분의 이언 매큐언의 소설의 주인공은 남성인데, 이번 작에서는 그런 일종의 편견을 부수었다. 소설을 이끌어 가는 주인공은 바로 모든 것을 청력(hearing)으로 판단하는 태아다. 아, 그리고 이 소설에서 빠뜨릴 수 없는 전범은 바로 <햄릿>이다. 위대한 고전 중의 고전이라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대한 오마주라고나 할까.


비극 <햄릿>에서 덴마크의 왕자 햄릿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숙부와 어머니에 대한 애증의 관계에서 결국 비극으로 끝난 스토리텔링의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누가 봐도 명백한 <햄릿>의 오마주 <넛셸>의 주인공 태아는 만삭의 어머니 트루디와 그녀의 애인이자 삼촌인 클로드의 아버지 존 케언크로스에 대한 살인모의를 엿듣는다. 곧 탄생을 앞둔 주인공 태아는 아무 것도 볼 수가 없다. 태아가 세상을 배우는 방법은 어머니 트루디가 즐겨 듣는 라디오드라마와 팟캐스트 방송이다. 지난달 독서모임에서 이 책을 이달의 토론책으로 정하자고 의견을 개진하면서, 내용을 설명하니 우리 독서 멤버는 바로 낙태반대에 대한 주장이냐고 강력하게 항의하셨는데 충분히 이해가 가는 지점이었다. 낙태 시점에 있어서 태아가 인간이냐 아니냐에 대한 논란이 매번 생겼었는데, 아무리 문학적 상상력의 발로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자유롭게 생각할 정도라면 당연히 인간으로 간주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 주장을 듣고 나니 단순하게 소설의 서사에만 집중할 수가 없다.


어쨌든 태아가 가진 실존의 문제는 다음과 같다. 태아는 시인이자 출판업자인 아버지 존을 죽이는 시도를 가진 어머니와 삼촌을 증오한다. 하지만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그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이다. <햄릿>에서 주인공이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로 고민했다면, 역시 1989년 발표되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마이키 이야기>에서 어른 뺨치는 대사로 관객들을 놀라게 만들었던 예의 태아처럼 이언 매큐언의 태아도 유사한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애증관계로 대변되는, 무엇 하나 복잡하지 않은 게 없는 인간사에 대한 고통과 번민이야말로 <넛셸>에서 작가가 진짜 하고 싶었던 주제가 아닐까.


노련한 작가 이언 매큐언은 다양한 장치로 서사의 전개와 반전을 마련했다. 우선 올빼미 시인 같이 주류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다시 말해서 팔리지 않는 시인을 육성하고 후원하는 무능력한 남편으로 아버지 존을 매도해서, 자신들의 살인모의를 정당화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촌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다는 팩트를 동원해서. 과연 그게 그들의 살인을 정당화시킬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그리고 그 방법으로는 부동액을 이용한 독살을 계획한다. 자신의 부정한 어머니를 ‘작은 생쥐’라 부르는 클로드는 트루디와 함께 임신 중임에도 불구하고, 음주와 쾌락을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의 출생에 대비해서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는 어머니에 대해 공포감을 느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세상에 내던져진 자신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체념적으로 받아들인다. 아버지를 죽음으로부터 구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을 탓하면서도 동시에 음모의 가담자라는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고 해야 할까. 한편, 태아의 복잡한 심정을 지나치게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이언 매큐언이 그동안 다른 작품에서 보여준 탁월한 매력들이 실종된 느낌을 받았다. 2~3일이면 다 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판단은 틀렸다. 다 읽는데 일주일이나 걸렸으니 말이다.


작가가 준비한 트루디와 클로드 악당 2인조에 대한 불의의 일격은 존이 갑자기 대동하고 나타난 올빼미 시인 엘로디라는 여성이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트루디를 여전히 사랑하는 존이 그녀의 마음을 돌려 보려고 준비한 회심의 일격이었지만 역설적으로 악당들의 살인 속도를 가속화시킬 뿐이었다. 존은 사랑에 빠져 9년 전에 찾았던 두브로브니크 시절까지 회상씬으로 돌려보지만, 욕정(lust)과 금전의 유혹에 빠진 트루디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는 제스처였을 뿐이다. 아, 악당들의 표적은 역시나 존의 막대한 부동산이었다. 결국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최종적 가치는 돈이었다만 말인가. 가치의 권위적 분배라는 정치적 함의가 실종된 시대에 금전이야말로 인간에게 허용된 유일한 욕망의 귀결이라는 사실에 다시 한 번 입맛이 씁쓸해졌다. 그 외에도 간간히 이언 매큐언은 난민들이 지중해에서 수천 명씩 빠져 죽는 시사적인 사건에 대해서도, 서구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IS 집단에 대한 이야기들도 시의 적절하게 다루고 있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점들은 다음과 같다. 태아가 트루디를 통해 대신 섭취한 와인에 대한 해박한 지식, 성인들도 전문적인 취향과 지식이 없다면 불가능할 생산지까지 파악하는 놀라운 능력 말이다. 아버지 존을 살해하고 경찰 조사에 대비해서 트루디와 클로드가 알리바이를 맞추는 장면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욕정으로 얽힌 관계는 상호불신으로 이어지고, 클로드의 배신을 예상한 트루디가 마련한 장치가 보여주는 기발한 발상. 뭐 그렇게 가는 거지.


문득 태아가 엄마 트루디의 뱃속에서 그런 놀라운 사유에 이르게 된 과정이 궁금했다. 우리 인간은 태어나고 자라면서 긴 시간을 거쳐 다양한 종류의 교육이라는 과정을 통해 이 사회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었던가. 아이를 기르다 보니 꼬맹이가 쉴 새 없이 궁금한 것들에 대해 질문하는 것을 듣는 중이다. 질문과 응답이라는 상호작용을 통해 무언가를 배우는 게 기본이 아닌가? 소설의 주인공 태아는 그런 일체의 과정 대신 라디오드라마와 팟캐스트만으로 특정한 지식(특히 시각적 정보)도 없이 삶을 이해하기 위한 그렇게 복잡한 개념들을 어떻게 배웠단 말인가. 아기들은 선천적으로 그렇게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청각이라는 기능을 이용해서? 이언 매큐언 작가의 기발한 상상은 어쩌면 처음부터 이런 한계를 품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자, 그렇다면 과연 악당들의 음모는 과연 성공할 것인가? 중반의 다소 지루한 전개에 비해 후반에 작가가 야심차게 준비한 설정(무려 태아의 복수!!!)은 이 대가의 실력이 역시 죽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준다. 역설적이지만 출생을 앞둔 태아의 복수는 필멸이라는 숙명을 진 인간 존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만들어준다. 부지불식간에 우리 의식 속에 자리한 선악의 구분에 대해서도. 아무래도 난 다시 한 번 <햄릿>을 읽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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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7-06-13 1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넛셸>을 읽기 위한 몸풀기로 <칠드런 액트>, <이노센트>, <체실 비치에서> 그리고 <암스테르담>을 읽으셨다니, 일어나 박수를 치고 싶은 심정입니다.^^

레삭매냐님의 이언매큐언 리뷰가 올라올 때마다 너무나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저는 <속죄>랑 <칠드런 액트>만 읽었고 다른 책들은 일단 대기중인데, 다른 책들보다 이 책 <넛셸>을 먼저 읽어봐야겠다, 생각이 드네요. 태아의 목소리라니 기대되고, 다시 <햄릿>을 부르는 작품이라니... 기대만발입니다. ㅎㅎㅎ

레삭매냐 2017-06-13 11:46   좋아요 0 | URL
이번달 저희 독서모임 책으로 제가 추천해서
더 열심으로 읽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 멤버 중의 한 분은 <이런 사랑>이 최고
라고 하셔서 그 책도 어렵사리 구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위화 작가의 <형제>와 요즘 드라마
로 핫한 <시녀 이야기>에 밀려 버렸네요.

다음 주말이 모임인데 그 전에 <이런 사랑>과
<토요일> 그리고 <시멘트 가든>까지 읽을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아, 이언 매큐언의 최고작이라고 하는 <속죄>
는 맨 끝에 읽어 보려구요. 최고라고 하니까요.

단발머리 2017-06-13 11:51   좋아요 1 | URL
레삭매냐님 독서모임 활동 열심히 하시나봐요. 저는 아이들이랑 아이들 엄마들이랑 6년째 독서모임 하고 있는데, 이제는 애들이 많이 커서 독서목록은 근사한데... 아이들이 열의가 별로 없습니다. 엄마들은 뜨거운데 ... ㅎㅎㅎㅎㅎㅎㅎ

다 읽으시려면 엄청 열씸히 달리셔야 될듯요. 그런데도 부럽습니다.
저는 레삭매냐님 페이퍼 보고 <시녀이야기> 특별판에 대한 갈증이....
좀 무섭기도 한데, 읽고 싶기도 하고 ㅠㅠ

<속죄>는 이렇게 부른다죠. 이언 매큐언 최고작 <속죄>

레삭매냐 2017-06-13 13:50   좋아요 0 | URL
6년이나 되셨군요~
저희도 7년 되었네요. 그동안 우여곡절
이 많았지만 어찌어찌해서 지금까지
왔습니다.

시간의 더께가 쌓이니 편안하고 좋더라구요.
꾸준하게 같이 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시녀 이야기> 무지 재밌습니다. 어젯밤에도
잡으니까 한 100쪽 정도 진도가 나가더라구요.

강추합니다. 최고작 속죄도 읽어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