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로자 - 만화로 보는 로자 룩셈부르크
케이트 에번스 지음, 폴 불 엮음, 박경선 옮김, 장석준 해제 / 산처럼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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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출간 당시부터 보고 싶어하던 케이브 에번스의 그래픽노블 평전 <레드 로자>를 드디어 어제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었다. 요즘 존 버저의 책을 한창 사서 모으면서 읽고 있는 와중인데, 도저히 다른 책을 살 여력이 없어서 이번엔 도서관 카드를 이용해 봤다. 그전에 읽던 <파리 코뮌>도 미처 다 읽고 반납을 했는데. 그런데 가만 보니 <레드 로자>의 주인공 로자 룩셈부르크가 태어난 해가 바로 그 반역의 해로 역사에 기록된 1871년이었다. 이런 우연이 있나 그래.

 

독일 사람으로 알았던 로자 룩셈부르크는 당시 러시아의 일부분이었던 폴란드 자모시치에서 태어났다. 평생을 통해 지속된 비주류 역사의 시작이었다고나 할까. 우선 로자는 여성이라 당시 보통선거권이 없었다. 게다가 러시아도 아닌 폴란드 출신 유대인이었다. 유년 시절 희귀병으로 몸에 장애까지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조숙했던 그녀는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로 이주한 후, 장차 만악의 근원이라고 그녀가 주장하게 된 자본주의 시스템의 병폐를 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바르샤바는 동구권에서 극심한 빈부의 차이를 상징하는 도시 중의 하나였으며, 로자가 훗날 투신하게 되는 사회주의 운동 탄압의 선두에 서 있었다. 바르샤바 상급교육기관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며, 지배국의 언어였던 러시아어, 모국어인 폴란드어, 제2의 조국이 될 독일의 언어 마지막으로 종교 언어인 히브리어까지 섭렵하게 된다.

 

당시만 해도 여성의 대학 진학은 상식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로자는 여성에게도 대학의 문호가 개방된 스위스 취리히 대학으로 진학을 결심한다. 아마 그런 배경에는 부모들의 재정적 지원에 힘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은 부르주아지에 대한 혐오를 감추지 않으면서도 엘리트 여성으로 프롤레타리아 보다 계급적으로는 부르주아지에 가깝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이 그래픽노블을 통해 읽게 됐다. 한편, 자유연애의 신봉자이자 혁명적 실천가이기도 했던 로자는 같은 리투아니아 출신 유대인이자 평생의 연인이라고 할 수 있는 레오 요기헤스를 만나 사랑을 불태우기도 한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로자는 <폴란드의 산업발전>이라는 논문으로 공법 박사 학위를 받는데 성공한다. 1898년 27세의 로자는 세계에서 가장 산업화된 나라 중의 하나였던 프로이센의 심장부 베를린으로 이주해서 위장결혼으로 시민권까지 취득한다. 여전히 그녀는 선거권도 가지지 못했지만 선진 산업국가 독일에서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칼 마르크스가 마르크스주의를 창시한 이론가라면,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의 이론을 이어 받은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사상가였다. 노동자를 착취해서 얻은 잉여생산으로 이윤을 축적해서 자본 형성에 성공한 자본가들의 멈출 줄 모르는 탐욕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무한정한 경제성장과 그에 따른 소비만이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자본주의 모순이야말로 만악의 근원이라고 로자는 규정했다. 아울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독일 사회민주당의 비주류를 자처하면서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의 점진적 개혁보다 자신이 주장하는 혁명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급진주의자의 길을 걷게 된다.

 

한 세기도 전에 자본주의의 실체와 제국주의적 속성을 정확하게 파악한 로자의 혜안은 정말 탁월했다. 글로벌리즘이라는 이름의 세계화의 개념이 잡히기도 전에, 국경을 초월한 자본의 이동과 흐름이 궁극적으로 군산복합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해서 지독하게 폭력적인 방식으로 저개발국가의 원료시장과 노동력을 착취하고, 산업국가에서 생산된 재화로 그들을 자국 상품의 소비시장으로 만들어 버리는 악순환을 예견이라도 한 걸까. 얼마 전 읽은 존 버저의 <제 7의 인간>에서 재화의 생산을 위해 부족한 노동력을 저개발국가에서 한시적으로 해당국가에 체류하는 이주노동자라는 방식으로 수급하는 1970년대 모습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에서 마르크스주의자 로자의 후예답게 존 버저 작가는 유럽 노동생태계에 대한 너무나 현실적인 르포르타주를 담아냈는데, 한 세기가 지나도록 자본에 의해 조종되는 노동현실이 바뀌지 않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로자는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아우구스트 베벨과 칼 카우츠키 등과 연대해서 베른슈타인이 주장하는 수정주의 노선에 대항해서 단호하게 맞서 치열하게 투쟁했다. 베른슈타인은 마르크스가 예언한 대로, 자본주의가 자체 모순 때문에 붕괴하는 대신 신용제도, 독과점과 통신기술 등을 이용해서 시대에 맞춰 생존을 도모할 것이기 때문에 노조 활동이나 의회 진출 같은 온건적 방식으로 점진적 개혁을 주장했다. 로자는 이런 베른슈타인의 주장에 대해 한낱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며, 더욱 치열한 계급투쟁과 전면적인 사회혁명을 강조했다. 인터내셔널 내부에서 이런 논쟁이 가속화되던 가운데, 그녀가 예언한 대로 전대미문의 전쟁인 1차 세계대전이 전 유럽을 포화 속으로 밀어 넣으면서 노동자 형제들의 단결을 주창했던 인터내셔널의 목소리는 개별국가 민족주의의 목소리에 묻혀 버리고 말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로 대변되는 사민당 우파는 로자의 급진주의적 혁명노선 대신 호전적인 빌헬름 2세 황제와 협력해서 전 국가적 자원을 총동원한 전쟁을 지지했다. 전쟁비용을 추가적으로 요청하는 제국의회에서 로자의 동지였던 칼 리프크네히트는 반대표를 던지면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행동하는 양심의 전범을 보여주기도 했다.

 

1917년 전쟁의 와중에 일어난 10월 볼셰키비 혁명으로 짜르는 퇴위되고, 1년 뒤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군항 킬에서 수병들의 반란이 일어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통치 능력을 상실한 프로이센의 빌헬름 2세 황제는 사민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퇴위하기에 이른다. 독일 사민당 세력에게는 공화정을 이루기 위한 획기적인 기회였지만, 바이마르 초대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된 에베르트는 생각이 달랐다. 군부와 결탁해서 급진주의 세력 박멸에 나서게 된다. 독일 우파들은 독일이 전쟁에서 진 이유를 노조와 사회주의자 그리고 유대인 탓으로 돌리면서, 1919년 1월 로자와 그녀의 동지들을 지지하는 스파르타쿠스단이 베를린에서 봉기를 일으키자 우파 의용군인 자유군단을 동원해서 무력진압에 나선다. 파멸적인 전쟁으로 조국을 몰아넣었던 황제마저도 자국 국민들에게 총구를 겨누지 않았지만, 자유군단은 반란세력에게 무력사용을 마다하지 않았다. 1월 15일, 스파르타쿠스단의 봉기를 분쇄하라는 제국총리 에베르트의 명령을 받은 자유군단은 로자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체포해서 처형했다.

 

47세의 나이에 자유와 평등 그리고 민주주의를 주장하던 “붉은 장미”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의 와중에 그렇게 죽어갔다. 그녀가 이 세상을 떠난 지, 98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자본주의는 전 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다. 그녀의 주장은 어떤 점에서는 맞고, 또 어떤 점에서는 틀리기도 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와 로자가 지적한 대로 자본주의의 외형은 조금 바뀌었을지 몰라도 본질은 그대로다. 대중을 위한 생산이 아니라, 오로지 자본주의 경제 순환 특히 이윤추구를 위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계속되고 있고, 경제성장 신화와 낙수효과 같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선전들이 난무할 따름이다. 군산복합체는 세계의 분쟁지역에서 자신의 이익을 불려줄 먹잇감을 찾고 있으며, 허울 좋은 신용사회의 허상은 비등점으로 치닫고 있는 중이다. 1세기만에 돌아온 대혼란기에 로자의 이상적 사회주의가 제어할 수 없는 야만의 시대에 대한 해결책이라는 주장이 낯설게만 들리지 않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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