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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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정뱅이 : 술에 취하여 정신없이 말하거나 행동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

 

술을 사랑한다. 어려서 아버지가 술 드시는 게 싫어서 나는 크면 나중에 술 먹지 않는다 했지만 다 거짓말이었다. 사반세기 동안 술을 마셔왔다. 요즘에는 여건상 예전처럼 들이 붓지 못하고 있지만 술꾼들이 그렇듯, 언제나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다. 그러던 차에 여기저기서 권여선 작가의 신간 <안녕 주정뱅이> 추천하는 글을 읽고는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구해다가 읽기 시작했다. 맥주 한 캔 마시면서 읽기 시작했으면 금상첨화였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아쉬웠다.

 

<안녕 주정뱅이>는 2013년 여름부터 2015년 겨울까지 발표된 모두 7개의 소설로 구성된 셋트상품이다. 그리고 기대했던 표제작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소설에 술이 등장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기대한 주정뱅이는 찾아볼 수 없다는 맹점이 있다. 소설집에서 술은 어떤 특성을 가진 매개체라기보다 소설에 등장하는 화자들을 이 소통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생각되어진다. 그리고 그 저간에는 상실이라는 공통분모가 자리 잡고 있다.

 

술을 끊지 못해 요양원을 들락거리는 여자와 병상에서 죽어가는 남자 수환의 이야기인 <봄밤>으로 주정뱅이 시리즈는 시작된다. 무시로 현재의 상황이 툭 던져지고,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는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작가는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독자에게 알려준다. 술에게서 위안을 찾지만, 술은 임시방편일 뿐 궁극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 막다른 골목에서 남자와 여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결국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일 따름이다. 일명 ‘알류커플’로 불리던 수환과 영경 역시 알고 있었을까.

 

자연이든 관계든 오래 지속되어온 것이 파괴되는 데는 번갯불의 찰나만으로도 충분하다(62쪽).

 

<삼인행>은 좀 더 흥미롭다. 어느 날 여행길에 나선 세 명의 친구들. 그 중에 둘은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기 위한 이별여행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스스럼없는 친구들의 이야기가 자못 푸근하게 다가온다. 여행길 즐거움 중의 하나는 역시 먹는 것이라는 걸 입증하기라도 하듯, 황기삼계탕과 수제버거 그리고 홍게를 알뜰하게도 챙기는 그들의 모습에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느낌이다. 결국 일정을 작파하고 황태 식당에서 소줏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일상의 단조로움으로 복귀하는 환영이 보이는 듯했다.

 

이어지는 <이모>와 <카메라>에는 좀 더 진중한 상실의 사연들이 담겨 있다. 결혼 전에는 미처 존재하는 지도 몰랐던 시이모의 일상을 관찰하게 된 화자의 이야기 그리고 2년 전 헤어진 애인의 누나가 보낸 카메라에 얽힌 사연은 물에 데친 브로콜리처럼 심상하게 다가온다. 자신을 희생하고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한 시이모가 절연하고 지내다가 결국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 과정 속에서 묽은 죽처럼 흘러가던 시간에 대한 단상과 죽은 시이모가 남긴 유산은 화자의 마음을 저릿하게 만든다. 여기에도 상실 코드 하나 추가. 그리고 우연히 만난 옛 애인의 누나와 함께 하게 된 술자리에서 아주 오랜 뒤에 애인이 사준다고 말한 카메라에 담긴 비밀을 알게 된다. 도대체 이 상실감을 어찌 할고.

 

<실내화 한 켤레>는 요즘 즐겨 보고 있는 <또 오해영>이라는 드라마 속 주인공의 학창시절 내내 트라우마였던 이쁜 오해영에 대한 피해의식을 떠올리게 해주는 그런 내용이었다(아, 그리고 보니 드라마에서 오해영도 새로운 사랑을 찾기 전까지 기승전술로 세월을 보냈었지). 미디어 범람 시대에 텔레비전에 동창생이 출연한 것을 보고 수배해서 결국 찾아내 습격하는 혜련과 선미 그리고 경안의 이야기다. 혜련과 선미의 기억 속에는 수학 잘하는 친구로만 기억되던 경안이 시나리오로 작가로 출세했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이것저것 사온 식재료로 술안주로 준비하고 거나하게 술판을 벌이는 친구들. 자기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경안 역시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고교시절 수학선생님의 칠판지우개에 맞은 급우들이 흰독수리떼 같아 보였노라는 증언은 정말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결국 술판을 거쳐 춤판까지 모두 마무리된 뒤에 남는 건 다시 찾아온 결핍 뿐. 작가가 후기에서 말한 것처럼 술자리는 필연적으로 결핍을 생산하기 마련이지 않은가. 그렇게 무한반복되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 알코올 하이에나로 변신해서 해질녘 어슬렁 거리던 나의 모습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초추의 양광’이라는 안톤 슈나크의 문장으로 기억될 <층>도 역시나 헤어진 남녀간의 이야기다. 인태초밥을 경영하는 인태는 왜 그가 혜연에게 차였는지 알지 못하며 그녀를 그리워한다. 어떻게 다시 한 번 만날 법도 한데 그럴 일은 없다. 해피엔딩으로 소설을 끝내기에는 상실과 결핍이라는 주제가 너무 강력하기 때문일까. 성실한 남자로 생각했던 남자가 마구 쌍욕을 해대는, 어쩌면 분노장애를 겪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여자는 연락을 끊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어느 술자리에서 그 시절을 떠올리며 맥락 없는 웃음을 짓는다. 어쩌면 우리의 기억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의적인 해석으로 기억을 재단하고, 추억하는. 나 역시 예외는 아니겠지만. 아주 오래 시간이 지나 그 시절을 다시 떠올려 보면 또 어떤 일로 상념 속을 헤매게 될지 모르겠다.

 

소설집을 다 읽고 나서 보니, 소설 속에 주정뱅이라는 말은 <역광>에 나오는 위현 작가가 화자에게 ‘새파랗게 젊은 주정뱅이 아가씨’는 누구냐고 외친 게 전부인 것 같다. 진짜 주정뱅이 이야기를 기대했었는데, 그 주정뱅이에게서 작가가 어느 술자리에서 들은 말처럼 위안과 친밀감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좀 더 찐한 술꾼의 이야기를 원한다면 요제프 로트의 <거룩한 술꾼의 전설> 정도는 읽어야 하나. 작가는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던지는 물음표로 남아 있는 질문들에게 사실을 들려주지는 않지만,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라고 독자들에게는 알려준다. 바로 그 점이 이 소설을 더 재밌게 만든 원동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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