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휴버트 셀비 주니어 지음, 황소연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오래 전에 영화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를 봤다. 하도 오래 전이라 영화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다. 한 때 끗발 날리던 제니퍼 제이슨 리가 여주인공 트랄랄라 역을 맡았다는 것 정도. 그리고 또 한참 시간이 지나, 한 겨울에 매서운 찬바람을 맞으며 브루클린 다리를 콧물을 줄줄 흘리면서 건넌 기억이 난다. 그로부터 또 십 수 년이지나 영화의 원작을 소설로 다시 만나게 됐다.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그 당시에 내가 왜 브루클린 다리를 기를 쓰고 건넜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시간이 또 지나고 나니 다 추억이지 싶다.

 

원작소설은 모두 6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초반에는 브루클린에 사는 하층민들의 이야기가 낯설었지만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여왕들의 파티 이야기(사실 조금 지루하다)를 거쳐 영화의 모태가 된 트랄랄라 이야기 그리고 선반공으로서는 최악이지만 파업 영웅 해리 블랙 이야기가 소설의 압권이었다. 이어지는 랜드샌드도 현실감 면에서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컬트 고전이라는 말이 있던데 컬트소설이라는 표현보다 사회소설이 더 맞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1950년대 미국 하층민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낸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지금은 윌리엄스버그를 중심으로 브루클린이 다시 뉴욕에서 뜨는 핫플레이스라고 하지만, 그 시절만 하더라도 맨해튼에서 밀려난 갈 곳 없는 따라지들의 집합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후진 동네였던 모양이다. 술집 그릭스를 중심으로 모인 동네 건달들이 시도 때도 없이 패싸움을 밥먹듯 벌이고, 마누라에게 손찌검을 해대는 가정폭력은 일상이며, 여왕들(드랙 퀸?)이 하루저녁 즐기기 위해 갖은 유혹을 벌이는 그야말로 욕망의 소용돌이 같은 곳이 소설에서 마지막 비상구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 브루클린이다. 개인적으로 놀란 것은 놀랄 정도로 지금의 화폐가치와는 다른 그 시절의 물가였다. 단돈 1달러로 한 가족이 아침에 먹을 장을 보고 담배까지 살 수 있었다니. 물론 지금의 가치와는 다르겠지만 말이다.

 

남자들이 실직해서 놀고먹으면서 마누라보고 돈을 벌어 오라고 하질 않나, 주택단지 여자들은 허구한 날 모여서 험담으로 날 세우며, 건달들은 뜨거운 밤을 보내기 위해 괜찮은 술집에서 여자들을 사냥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그런 퇴폐적인 분위기마저 자욱하게 흐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을 제대로 기른다는 게 가당키나 했을까? 하긴 아빠 엄마가 상스러운 욕지거리를 해대며 죽어라고 싸우는 장면만 없다고 해도 지금보다 훨씬 나아 보일 것 같다. 어쩌면 소설의 저자인 허버트 셀비 주니어가 어떤 부분에서는 과장했을 진 모르겠지만, 상당 부분 당대의 시대상을 그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의 주인공으로 나온 트랄랄라 역시 자신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거리에서 방탕하게 소진하면서 세월을 보낸 그런 아가씨다. 알다시피 영화에서의 결말처럼 소설의 엔딩 역시 비극이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땅개와 뱃놈들을 상대로 화려한 미모로 즐기고 한몫 잡아보겠다던 트랄랄라는 거리의 갱들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신세다. 도저히 교훈적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라고나 할까.

 

소설의 핵심은 역시 <파업>이 아닐까. 해리 블랙은 노조의 핵심 행동대원으로 고용주 측에선 일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선동을 도맡아서 하는 해리를 자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임금인상과 복지 프로그램 협상결렬로 시작된 파업이 해리에게는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는 하나의 화려한 무대였다. 파업사무실을 차리고 파업에 관련된 일에 열중하기 보다는 술마시고 두통을 달래면서 양성애의 세계에 빠져드는 타락한 모습을 작가는 정말 하나의 르포르타주처럼 현실감 넘치게 그려냈다. 어떻게 보면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모두 50년대 마초의 대표선수처럼 보인다. 사실은 그렇지 않으면서 자기야말로 제일 잘난 남자라는 듯이 으스대며 시시껄렁한 남성성을 과시하기 위해 몸이 달아 있는 그런 모습 말이다.

 

파업 와중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조의 최고 전술무기 해리를 잘라야 한다는 사명감에 젖은 사장과 이만하면 충분히 자신들의 실력을 보여 주었으니 협상을 마무리 짓고 일터로 복귀할 명분을 찾는 노조지도부 간의 샅바 싸움은 선수 끼리 왜 이래의 전형이다. 결국 파업이 끝나자, 그동안 자기 돈도 아니면서 흥청망청 맘대로 돈을 쓰며 게이 레지나를 유혹하던 해리는 끈 떨어진 갓신세마냥 바로 용도폐기된다. 그럴 줄 몰랐나. 그 정도면 다행이게, 동네꼬마에게 추잡한 짓을 하다가 그릭스 패거리에게 치도곤을 당해 곤죽이 될 정도로 얻어맞는다. 원래 자신의 것도 아닌 권력을 행사하다가 비참하게 추락하는 해리의 모습은 정말 일그러진 그네들의 초상이었다.

 

파업 도중에 무기력하게 피켓 시위를 하던 남자들과 그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던 경찰 간의 대결 장면도 자못 흥미진진하다. 작가는 대치되어 있는 두 세력 간의 갈등의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분석하고, 일촉즉발의 위기를 실시간으로 리얼하게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노조의 파업을 무력화시키고 분쇄하기 위해 경영진 측에서 동원한 하청의 전국화 수법도 선진적이었다. 자본가들의 음모에 맞서 그릭스 갱들을 동원해서 트럭을 폭파시키는 무지막지한 방법도 마다하지 않는 노조 측도 마찬가지였지만, 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를 무력화시키는 자본가들에 대항하기 위한 유일한 무기는 바로 전국적 연대라는 걸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을까. 신자유주의 각자도생의 시대에는 모두 무의미해져 버린 일이지만 말이다.

 

휴버트 셀비 주니어는 다시 현실세계로 모든 캐릭터들을 소환해서 우리에게 비상구가 존재하는지 묻는 것으로 소설을 끝낸다. 어쩌면 그들에게 여기(브루클린)은 비상구가 아니라 해방구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해도 모든 것이 허용되는. 다양한 군상들이 빚어내는 1950년대 미국의 초상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위력적으로 다가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