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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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의 열혈 팬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출간되는 그의 책들을 꾸준하게 사모으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정작 그의 책을 다 완독한 게 몇 권이나 되지? <휴먼 스테인>은 다 읽었고, <유령 퇴장>도 각별한 인연으로 만났었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와 <포트노이의 불평>은 읽다가 도중에 그만 뒀다. 그리고 다음 주에 있을 독서모임을 위해 그가 다 쓰고 나서 절필 선언을 했다는 <네메시스>를 집어 들었다. 지난 여름, 메르스 광풍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적당한 분량의 흡입력 있는 대가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생각이었을까 이번에는 무사히 완독에 성공했다.

 

소설 <네메시스>의 주인공 유진 “버키” 캔터는 올해 23살 먹은 뉴저지 뉴어크에 사는 청년이다. 버키의 어머니는 그를 낳다가 죽고, 아버지는 절도죄로 복역한 전과자 출신이다. 그래서 버키의 조부모가 부모를 대신해서 버키를 키웠다. 시대적 배경은 1944년 6월이다. 저지대 뉴어크를 강타한 폴리오의 발병으로 뒤숭숭하기 그지없는 시절이다. 자신이 직접 폴리오의 희생자였던 FDR(프랭클린 델라노 루즈벨트)의 영도 아래 미국은 대공황이라는 전대미문의 위기를 2차세계대전을 통해 탈출할 수가 있었다. 피끓는 청년들이라면 조국과 민주주의 수호라는 대의 아래, 일본과 독일을 상대하는 전쟁터로 향했겠지만 우리의 주인공 버키는 형편없는 시력 때문에 병역 면제를 받았다. 그것은 그에게 혜택이었을까 아니면 수치였을까. 필립 로스는 소설의 시작부터 독자에게 예민한 이슈들을 던지기 시작한다.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 대신 뉴어크 위퀘이크 거리에서 여름 놀이터를 감독하는 체육교사가 된 버키 캔터 선생님은 전쟁에 버금갈 만한 공포와 맞닥뜨리게 된다. 그것은 바로 폴리오라는 치명적인 전염병이었다. 다른 말로는 소아마비라고도 불리는 폴리오가 뉴어크 전역에 창궐했는데, 소설의 주무대가 되는 위퀘이크 지역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불량한 이탈리아 건달들을 혼자 힘으로 제압한 버키 캔터 선생님(분명 이 소설은 내레이터가 진행하고 있는데 왜 자꾸만 캔터 선생님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지 궁금했는데, 그 이유는 마지막 <재회> 편에서 설명이 된다)은 유대인 소년소녀 그리고 그들 부모의 우상이 되기에 이른다. 자신 역시 유대인이었던 필립 로스는 미국사회의 여전히 뜨거운 감자 같은 이슈라고 할 수 있는 인종문제도 살짝 터치해 주는 멋진 센스를 발휘해주신다. 소설의 모든 장치를 작가가 고안한다고 가정했을 때, 무엇 하나 허투루 볼 수가 없을 것 같다.

 

비록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전과자 아버지의 사랑도 받지 못한 채 할아버지에게 강인한 용기와 투쟁정신을 물려받고 어머니를 대신한 할머니로부터 따스한 사랑을 받고 자란 버키 캔터에게 또하나의 축복이 주어졌다. 그것은 동료교소 마샤 스타인버그와의 만남 그리고 사랑이었다. 폴리오의 공포로부터 멀리 떨어진 포코노 산맥에 있는 인디언 힐 캠프에 가 있던 마샤는 버키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사망자가 발생하는 위퀘이크로부터 안전하고 평화로운 그리고 사랑하는 애인이 있는 인디언 힐로 오라고 간청한다. 버키의 선택지는 하루가 갈수록 좁아진다. 위퀘이크의 놀이터에서 자신이 가르치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폴리오의 희생자가 되어 치르는 장례식의 비통함은 이루 표현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도대체 어떤 이유 때문에 아이들이 유대인들이 그렇게 믿는 야훼 신의 소위 “정당한” 분노의 대상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이미 신은 버키로부터 어머니를 빼앗아 가지 않았던가. 프랑스에서 전투 중에 전사한 친구 제이크의 경우는 또 어떤가. 생의 대부분을 함께 하고, 미래도 같이 하리라고 생각한 소중한 이를 아무리 우연의 작용이라고 하지만 잃은 후의 트라우마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버키가 느낀 종교적 분노의 연장선에는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되었던 1940년대 유럽대륙에서 히틀러의 나치일당에 의해 진행된 홀로코스트 비극이 맞닿아 있다. 수백만의 유대인들이 어떤 잘못을 했기에 신으로부터 그런 부당한 대우와 가혹한 죽음을 당해야 했단 말인가. 프래그머티즘과 합리주의적 사고가 지배하는 신대륙에서도 유대인들의 처지는 다르지 않다고 작가는 소설을 통해 증언한다. 폴리오가 공동체에 확산되어 가면서 서로를 불신하고 희생양을 찾느라 혈안이 된 가운데, 유대인들이 발병의 원인이라는 근거 없는 낭설이 퍼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필립 로스는 이성에 우선하는 죽음, 다시 말해 존재의 소멸이라는 극한의 공포가 주는 야만의 시대를 문학이라는 방식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한다. 우리도 이미 지난 여름의 메르스 사태를 통해, 확인되지 않은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가운데 함께 살기보다 각자도생을 권하는 사회가 숨기고 싶어했던 추한 민낯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에 비한다면 주인공 버키 캔터 선생님의 영혼은 순수하다 못해, 옛 제자에게 왜에 미친 순교자라고 불릴 정도다. 자신이 해야 할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포코노 산맥의 인디언 힐로 도망친 죄에 대한 “네메시스”를 평생지고 가야할 업으로 생각하고 자신이 그나마 가지고 있던 행복할 수 있었던 기회를 저버린 이야기로 이어지는 남자의 고백은 너무 슬프다. 폴리오를 겪고 나서 불구의 몸이 된 버키가 내린 되돌릴 수 없는 결정은 그야말로 마스터클래스급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폭풍우가 가신 뒤의 인디언 힐에 내리쪼이는 눈부신 햇살은 그만큼 불안의 전주곡처럼 찬란하다. 바로 그 지점에서 필립 로스는 다시 독자에게 묻는다. 왜 이렇게 우리 사회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청년(개인)이 그런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하느냐고 말이다. 소설 <네메시스>의 진짜 내레이터 아널드 메스니코프(오래전 놀이터 시절의 캔터 선생님의 제자)가 아무리 버키에게 논리정연한 죄사함을 들려준다고 해도, 지난 27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신 외에 누가 버키에게 보상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

 

필립 로스 작가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독자의 감정개입과 분리의 순간을 절묘하게 만들어주는 내레이션 기법과 인생의 정점에서 나락으로 추락하는 인물에 대한 심도 깊은 분석은 <네메시스>에서도 빛을 발한다. 버키 캔터 선생님이 시시각각 확산되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충실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삶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가? 필립 로스도 그가 할 줄 아는 전부가 삶에 천착한 놀라운 이야기들을 직조해내는 것이라면, 계속해서 그 일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리딩데이트] 2015년 11월 11일 ~ 20일 11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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