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식 세탁소 - 정미경 소설집
정미경 지음 / 창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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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언제쯤인가 한국 문학 중에서 정미경 작가의 소설집 <프랑스식 세탁소>와 한유주 작가의 <불가능한 동화>에 대한 신문 기사를 봤다. 사실 이전까지만 해도 두 작가의 글은 한 번도 읽어 보지 않은 지라, 호기심이 동했고 일단 습관처럼 정미경 작가의 <프랑스식 세탁소>를 샀다. 그리고 바로 읽기 시작했는데, 첫 번째로 수록된 <남쪽 절>을 읽고 나서 두 번째 <파견 근무>를 읽다가 접었다. 그리고 1년이란 시간이 지나갔다. 2주 전에 책장 정리를 하다가 미처 다 읽지 못한 정미경 작가의 이 책이 생각났고, 다시 집어 들어 부지런히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처음 읽기 시작할 때만 해도 금세 다 읽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그간에 무슨 사연 때문인지 다 읽는데 1년이 걸린 셈이다.

 

1년 전에 읽기 시작할 땐, 순서대로 읽자였는데, 다시 읽기 시작하니 마음이 바뀌어서 맨 끝에 실린 표제작 <프랑스식 세탁소>부터 읽기 시작했다. 수완은 있지만, 비리 사건에 연루된 사회재단 이사장의 이야기와 사보에 실린 어느 요리사에 대한 글이 묘한 대조를 이루며 전개된다. 어디가 닮았다고 꼭 집어서 말하기엔 그렇지만 왠지 정미경 작가의 글에서는 미국 작가 제임스 설터의 그것과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두 작가 모두, 아직까지 한 작품 밖에 읽지 않아서 구체적 비교가 불가하지만 말이다. 엄마를 위해 요리를 만들던 절대 미각의 소유자 마르셀 르와조의 요리를 통한 성공기가 자못 흥미진진하다. 유일하게 사랑했던 애인마저도 르와조의 요리에 대한 열정을 대신할 순 없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 이야기가 화자인 이사장의 횡령 그리고 비서 민미란과의 일탈로 이어지게 되는 걸까? 그냥 모든 것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리네 삶과 비슷하다는 점 때문일까. 르와조가 자신이 경영하는 레스토랑 <프랑스식 세탁소>가 박한 별점을 받았다고 엽총을 꺼내드는 장면이 섬뜩했다.

 

 

 

그런 점에서 다시 되돌아가 마저 읽은 <파견 근무>에 나오는 주인공 판사의 일탈도 일상의 한 부분일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당연히 사회적 존경을 받는 자리에 앉은 인물이, 사실은 카지노에 빠진 상습 도박꾼이라니. 어쩌다 어울리는 지방 유지들과의 술자리에서 무언가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자신이 맡은 사건 사고들에 대한 각색도 마다하지 않는다. 수하의 검찰조사관이 흘린 재판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정보와 노름판의 판돈을 마련하기 위한 주식 내부거래 정보의 교환에 대해 고민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를 볼 수도 있다. 그건 그들이 즐기는 생선 횟집에서 제 살을 허리에 접시에 놓여나온 생선과 같은 신세가 아닐까. 도대체 이런 표현은 어떻게 창조해낸 걸까. 우리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생선회에서도 요렇게 멋진 문구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솔직히 부러웠다. 이제 기존의 클리셰이가 되었으니, 누구라도 다시 써먹을 순 없겠지.

 

소설에 곳곳에서 그런 일상의 비루함이 눈에 띈다. 첫 번째 글인 <남쪽 절>에서도 기세 좋게 독립해서 출판사를 차렸지만, 기획력과 자금 부족 그리고 출판계의 단골타령인 단군 이래 최악의 독서시장 불황 덕분에 어쩔 수 없이 대박내고 싶은 욕심에 표절 작가에게 갖은 아양을 떨어야 하는 출판사 사장의 비루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주인공이 표절 작가와 어렵게 성사된 자리에 가기 위해 나선 길에는 용산 참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누구는 절박한 생존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는, 그런데 어떻게 보면 출판사 사장 역시 절박하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다만 자신이 처해 있는 삶의 조건이 다를 뿐.

 

<소년처럼>에서는 만족할 수 없는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이돌 그룹의 <소원을 말해봐>라는 노래에 빠져 사는 중년 남성의 이야기다. 진실이 아닌 만들어진 이미지가 소비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음악 산업 역시 예외는 아니다. 청춘을 잃어버린 이들에게는 그들이 바라 마지않는 풋풋한 젊음을, 스타가 되고 싶어하는 청춘들에게는 노력하면 너희들도 이렇게 될 수 있다는 판타지를 불어 넣는 아이돌 산업의 실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우연히 만난 은희라는 소녀로부터 자신이 가진 소년같은 판타지를 충족시키고 싶어하는 중년남자의 욕망을 날 것으로 그대로 드러낸다. 물론 작가는 자신의 딸보다도 어린 소녀로부터 그저 ‘옵빠’라고 불리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선에서 그의 자칫 위험해질 수도 있는 욕망을 제지시킨다.

 

이젠 낯설지도 않은 탈북자 출신 피아니스트, 아니 새터민이라는 명칭이 있었던가? 사지에서 벗어나 대한민국에 정착했지만 여전히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청년의 이야기, 멀쩡하게 의사 수업을 받고 있던 남자가 모르핀 중독 때문에 스님이 되겠다는 출가 선언으로 여자친구의 복장을 뒤집어 놓질 않나, 강아지도 안 먹는다는 돈의 부재 탓인 가난과 사랑의 비동시성 때문에 고민하는 청춘들의 이야기가 다소곳하게 이어진다. 나의 삶이 소설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그것처럼 버라이어티했다면, 과연 내가 이 소설을 읽었을까? 아마 그렇지 않겠지. 내가 체험하지 못한 타인의 이야기를 이렇게 열심히 읽는 건 아마도 일정 정도의 간접체험에서 오는 정신적 오르가즘 때문이 아닐까. 내가 알지 못하는 각각의 삶의 면면이 이렇게 다양할 수도 있겠다는 자조 섞인 감정이 슬쩍 스치고 간다. 물론 소설가는 그것들을 절묘하게 잡아내서 이렇게 글로 쓰는 것일테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이렇게 선구자가 남긴 글귀들을 쫓아갈 뿐.

 

어쨌거나 소설이라는 명명, 창작이라는 시뮬라시옹의 단계를 거쳐 삶의 진실을 반영하는 시뮬라크르에 도달하기란 난망한 것 같다. 작가라는 타인에 의해 창작된 현실의 복제물인 소설을 소비하는 독자로서 이렇게 책을 읽다가는 결국 불가지론(不可知論)에 도달하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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