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1 - 역사평설 병자호란 1
한명기 지음 / 푸른역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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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전성시대에 창비에서 만드는 라디오 책다방을 즐겨 듣는다. 비디오가 아닌 오디오로 만나는 책에 대한 정보가 참 쏠쏠하다. 얼마 전, 한명기 교수의 <병자호란> 방송을 듣고 바로 이 책 사서 읽어야지 결심했다. 분량은 두툼한데, 한 번 읽기 시작하니 다 읽지 않고서는 배겨날 재간이 없었다.

 

아주 오래 전에 한명기 교수의 또다른 역사평설 <광해군>을 읽고 나서, 그동안 서인정권이 극악한 폭군으로 매도한 광해군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됐다. 그 후에 나온 영화 <광해>는 말할 것도 없고. 한명기 교수의 역작 <병자호란>은 바로 그 광해군 시대를 종결하고,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 시대에 벌어진 시대의 비극 병자호란에 대한 역사평설이다. 지금으로부터 378년 전에 일어난 병자호란이 새로운 천년에 또 다른 관심을 갖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잠자는 사자에서 팍스 아메리카나에 도전할 정도로 굴기한 이웃 중국을 바라보는 우리의 미묘한 시각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은이가 이 책을 G2 시대의 비망록이라고 부른 이유를 비로소 책을 읽으면서 깨닫게 됐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난 17세기 전반은 조선이 개국 이래 상국으로 사대하던 중국의 명나라에서 만주족 청나라로의 교체가 진행되던 파란의 시기였다. 어느 왕조가 그렇듯, 동아시아의 패권국 명나라는 내우외환의 이중고를 겪고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환관의 엄당과 사대부의 동림당으로 나뉘어 국론의 분열, 정치에 직접 개인한 환관들의 만연한 부정부패 그리고 민생고에 시달린 백성들의 연이은 반란에 시달리고 있었고, 외부적으로 만주에서 발흥한 만주족 후금의 공세에 바람잘 날이 없었다. 만주족의 지도자 누르하치가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의 승리를 바탕으로 서정을 감행하면서 명나라의 동북 국경은 비상사태로 돌입하게 된다.

 

한편, 이런 국제정세 가운데 병자호란의 무대였던 조선에서는 임진왜란 후 광해군의 집권 이래 가까스로 안정을 찾아가던 차에 훗날 인조가 능양군을 추대한 이귀와 김류 등 서인 세력이 주도한 쿠데타(1623년)로 정권을 뒤집어지고, 광해군 시절 이래 명청교체기에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던 외교정책 역시 부정되면서 화이론에 입각한 서인 강경 척화파들이 정권을 이끌면서 조선 정국은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문제는 누르하치에 뒤를 이어 후금의 지배자가 된 홍타이지는 자신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신복(臣僕)을 거부하며 오로지 명나라의 재조지은(再造之恩)만을 앵무새처럼 되뇌는 조선 정벌을 구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1629년 황성(북경) 기습과 1631년 대릉하성 공략으로 대륙 정벌이라는 원대한 꿈을 꾸고 있던 대칸 홍타이지는 투항한 범문정 같은 한족 출신 이신(貳臣)들을 활용해서 만주족의 후금을 다민족국가로 거듭나게 만드는데 성공한다. 자신의 아버지 누르하치를 영원성 전투에서 패퇴시키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최신 무기 홍이포 도입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한편, 후금군의 약점으로 지적된 수군과 전함 확보에도 열심이었다. 이렇게 명나라가 지배하고 있던 만주는 물론, 요동과 차하르 몽골까지 정복해서 바야흐로 세계 대제국으로 발흥하고 있던 후금에게 도대체 조선은 무슨 깡으로 도전했던 걸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광해군 시대의 폭정을 규탄하며 집권에 성공한 인조정권은 광해군 정권의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위한 개혁을 약속했지만 반정에 공헌한 서인정권은 그럴 만한 능력도 그리고 개혁을 수행하기 위한 의지와 도덕성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격변의 시대에 대국적 견지에서 국가 보존을 위한 정책도 전무했다. 우선 노골화되는 후금/청나라의 침략에 대비해서 위해서 국가 재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나 임진왜란 이후 실시되지 못한 세수 확보를 위한 양전사업과 군대를 기르기 위해 필수적인 인구 조사를 위한 호패법의 실시는 민심을 교란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무산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이괄의 반란 이후, 연이은 역모 때문에 강화된 인조정권의 기찰로 지방 수비군들은 의심 때문에 제대로 된 훈련조차 실시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외부세력이 침략을 감행한다면, 그 결과는 명약관화했다.

 

인조정권의 정당성 문제는 명나라에서 파견하는 환관 칙사들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인조의 정권 인수 문제와 소현세자 책봉사로 파견된 명의 환관 사절들은 은 징색에 그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그들은 명나라에서 출발하는 순간에서부터 조선에서 한 몫 잡겠다는 생각으로 서울로 이어지는 사행로에서 인삼과 은을 조선 조정으로부터 뜯어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정권의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는 조선 조정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원하는 내줄 수밖에 없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전가되었다. 명에서 인조의 공식 책봉사로 파견된 호양보와 왕민정은 자그마치 13만 냥에 달하는 은을 착취해 갔다고 하는데, 이는 조선 연간 국가 경비의 1/3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상국으로 모시는 명나라가 자신의 정권을 인정해 주고, 자신의 핸디캡 중의 하나인 아버지 정원군의 원종 추숭 문제까지 명나라의 승인을 받고 감지덕지하는 인조의 모습에서 이것이 과연 주권국가의 수반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를 더 까다롭게 하는 점 중에 하나는 가도에 진주한 명나라 패잔병 모문룡 집단이었다. 조선 땅에 있으면서 후금을 후방에서 견제한다는 이유로 군량과 각종 물자를 끝도 없이 요구했다. 정당한 왕위계승을 하지 못한 인조정권의 약점을 파고들면서 모문룡은 가도에서 밀수왕초 혹은 해외천자로 행세하면서 조선 백성에게 행악을 마다하지 않았다. 후금은 후금 대로, 정묘호란으로 조선을 제압한 다음 가도의 모문룡에 대한 원조를 끊으라고 다그쳤지만 여전히 조선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정신과 후금은 오랑캐의 나라라는 중화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의식의 전환이 불가능했다. 언관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 사대부들과 정권 지도부는 명에 대한 의리와 대의명분만을 강조하면서, 점증하는 전란의 위기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않았다. 그 결과, 병자호란으로 수많은 조선의 죄없는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고 정부의 무책임한 견벽청야(堅壁淸野) 전략으로 국토가 유린되었다.

 

기본적으로 인조 정권은 서인 반정공신의 주도하여 능양군(인조)을 추대한 군신복합체였다. 이들은 광해군의 실정을 지적하면서 집권했지만, 실제로 전대의 문제들을 개혁하는데 실패했고 격변하는 국제정세에 둔감했으며 대처할 능력도 없었다. 오로지 인조를 중심으로 한 정권안보에만 유능했던 김류와 이귀를 중심으로 한 서인정권은 그야말로 운명공동체였다. 훗날 강화도 함락 당시 멸공봉사(滅公奉私) 정신의 화신이었던 정권최대의 실세 김류의 아들이자 반정공신이었던 김경징에 대한 처벌을 두고 인조가 주저했다는 사실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아무리 과거가 현재의 거울이라고 하지만, 실패한 역사가 반복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다. 17세기에도 그랬듯이 서북의 중국(후금/청나라)과 동남의 일본 사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는 21세기에도 변하지 않고, 우리에게 냉정한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재조지은이라는 명분으로 미국은 미래의 가상 적국 중국을 포위하는 한미일 삼각 미사일 디펜스 대전략에 우리나라를 포함시키기 위해 매진하고 있다. 최근 우리를 방문한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과거에 전쟁까지 불사했던 적국에서 친척이 되었노라고 선언하면서 우리의 최대 무역파트너가 중국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다. 동남 일본의 아베 정권은 고노담화를 포기하고, 집단자위권 행사라는 해괴한 논리를 동원해서 노골적으로 무장국가로 가는 우경화를 견지하고 있다. 이런 변화무쌍한 국제정세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역사평설 <병자호란>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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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경보 2021-01-17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현재 미국은 경제와 패권전쟁서 명 처럼 패배한게 없으니 패권을 내어줄리 만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