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스크랩 - 1980년대를 추억하며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5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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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게 8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를 들라고 한다면 주저 하지 않고 마이클 잭슨을 꼽을 것이다. 모두가 다 아는 1982년 말에 발표된 그의 전설적인 앨범 <스릴러>는 미국 내에서만 3,000만장이 팔린 메가 히트 앨범이었다. 그런데, 코널 대학 출신의 휴이 루이스가 이끄는 밴드 “휴이 루이스 앤 더 뉴스”는 2014년을 사는 사람 중에 모르는 이가 더 많을 것 같다. 이제는 세계적인 대작가가 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스크랩>에는 그런 1980년대 소위 정크시대를 그리는 회상으로 가득하다.

 

우선, 당시만 하더라도 일본에서 신인작가에 지나지 않았던 하루키는 미국 내 가십을 주로 다루는 잡지들인 <피플>과 <배너티 페어>를 비롯해서 <뉴욕 타임즈>, <뉴요커> 같은 다양한 소스를 통해 자신의 밥줄인 글거리를 찾아낸다. 바로 위에 등장하는 마이클 잭슨만 하더라도, 진짜를 보기 원하는 팬들을 위해 프로모터들이 미국 전역에서 마이클 잭슨을 닮은 흑인 청년을 선발해서 지방 쇼 무대에 올렸다고 한다. 그들이 진짜 마이클 잭슨처럼 노래를 부를 리는 만무하고, 립싱크로 춤만 제대로 춰도 하루 일당으로 300달러나 벌었다고 하니 놀랄 지경이다. 이런 요지경 속의 삶을 하루키는 정확하게 포착해낸다.

 

<스크랩>의 특징은 미소의 냉전 대결이 극한으로 치닫던 1984년에 개최된 LA 올림픽에 대한 하루키의 심드렁함으로 대변된다. 그가 예전부터 달리기를 좋아하는 마라톤 팬이라는 건 알았지만, 정작 올림픽에 대한 글을 쓰기로 하고서도 딱히 관심 없어하는 “쿨”함이라니. 하긴 오늘날의 하루키라면 그래도 누가 뭐라고 그러겠냐만 초짜 작가 시절에도 그럴 수 있다니, 그의 배짱이 놀랍기만 하다. 보통 그런 배짱은 일가(一家)를 이룬 다음에 하는 게 아니었던가.

 

하루키의 관심 분야는 정말 다양하다. 1980년대 새로 등장한 질병인 헤르페스를 필두로 해서, ‘미스터 악터버’로 알려진 레지 잭슨이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미국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지나가는 이들에게 손 인사를 하는 낙에 산다는 고물상 부자에 이르기까지 정말로 다양하다. 그리고 보니 이제는 영화업계나 정치판에서 거물이 된 “터미네이터” 아널드 슈워제네거도 등장하는구나. 이미 그 시절에 부자였던 슈워제네거가 영화에 출연한 건 단지 취미였다는 말에 그만 깜짝 놀라기도 했다.

 

달콤한 팝송 “Top of the World"의 주인공 카렌 카펜터가 가수 시절 내내 오빠에게 콤플렉스로 시달렸다는 점도 이 책을 통해 알게 됐다. 사실 어떤 건 딱히 관심도 없는 부분이었는데, 역시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하루키는 사실의 표면 밑에 숨겨 있는 핵심을 집어내는데 역시나 탁월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나는 하루키의 열혈 팬은 아니면서도, 그의 책을 꾸역꾸역 읽어대고 있다.

 

<미국의 송어낚시>로 유명한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아직 그의 대표작을 읽어 보지 못했지만, 그의 이름은 알고 있었는데 그가 일본에서도 널리 읽혔다는 건 또 처음 알았다. 하루키의 글을 읽다가 브라우티건의 죽음과 선배 작가 헤밍웨이의 그것이 비슷한 건 또 왜일까하는 궁금증에 도달하기도 했다. 좋지 않은 선례는 계속해서 반복되는 법일까 싶기도 하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도 철도와 의료 민영화 이슈가 뜨거운데, 선진국이라는 미국에서는 교정 시설(교도소)까지도 이미 정크시대에 사설화가 이뤄진 모양이다. 이미 그 시절(66만 명)로부터 30년 정도가 지났는데 지금 교정시설에 수감된 죄수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다. 그들에게 소용되는 연간 비용이 평균 14,400달러라고 하는데 비용절감 차원에서 관영(?) 교도소보다 훨씬 더 적게 비용이 드는 사기업 형태의 교도소가 늘어나는 것도 시장원리에 맞을 진 모르겠지만, 도덕과 윤리적으로 맞는 것인지 하루키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사는 우리 지구별이지만, 운석사냥꾼이 다 있는 줄 몰랐다. 그리고 홀로코스트 가해자였던 전직 나치들의 뒤를 쫓는 나치 헌터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남미의 볼리비아에서 숨어 살던 “리옹의 도살자” 클라우스 바르비를 추격해서 잡아낸 이야기도 짜릿했다. 유명 영화 <러브 스토리>의 저자 에릭 시걸이 부와 명성을 얻었지만, 독자나 비평가들로부터 경의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인상적이었다. 후배 작가 하루키의 두 가지나 이뤘으면 됐지 뭘 더 바라냐는 따끔한 지적도 멋지다.

 

서두에 등장한 휴이 루이스의 근황이 궁금해서 위키피디아를 통해 그에 대한 정보를 검색해 봤다. 나도 한 때, 무척이나 좋아하던 가수라 그런지 하루키의 글이 자극이 됐다. 유명 대학을 졸업한 엔지니어로서의 길을 포기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로큰롤 음악을 하기 위해 늦깎이 록가수로 데뷔해서 우리나이로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활동 중인 그의 모습이 반가웠다. 뭐 이런 게 삶 아니겠냐고 묻고 싶다. 에너지가 넘치고, 무언가 지금보다 훨씬 자유로운 분위기였던 정크시대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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