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새
케빈 파워스 지음, 원은주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부다가 말했던가? 인생은 고()의 연속이라고. 우리 삶은 순간은 어쩌면 고통스러운 찰나의 연속과 비연속으로 이루어졌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비관적이라고? 미국 출신 작가 케빈 파워스의 <노란 새>를 읽어 보면 무슨 말인지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후대가 평가해준다는 말이 있다. 여전히 역주행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그런 말조차 사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조지 W. 부시 시대에 시작된 이라크 전쟁은 이제 과거인가, 아니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가? 신예 작가 케빈 파워스의 <노란 새>는 과거와 현재진행형 중간지대에 걸친 작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보면 평범해 보이는 과거와 현재의 교차편집이라는 패턴으로 구성하기 시작한다.

 

사실 그것조차 독자에겐 별 관심거리가 아니다. 우리는 21살에 자원입대해서 이라크 전쟁터에 나간 청년/소년병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가 궁금하다. 자신이 실제로 이라크에 파병된 경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쓴 케빈 파워스는 어쩌면 평생 자신의 기억 창고에 담아 두었어야 했을지도 모를 이야기를 고통을 한가득 담은 픽션으로 재현한다.

 

 

읽다 보면 이게 소설인지 아니면 작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노란 새>는 이라크 티그리스 강을 볼 수 있는 가공의 공간 알 타파르를 배경으로 한다. 어려서부터 시와 문학을 사랑했던 청년 존 바틀 이병은 자신의 남성성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자원입대를 선택한다. 그의 선조들이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한국전과 월남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조상들처럼 바틀은 전쟁이라는 가공할 만한 폭력 앞에 무기력한 존재일 뿐이다. 인격체로서의 존엄 대신, 기계 부품처럼 취급되며 하지(이라크 사람들을 비하해서 부르는 표현) 민간인들에게 총격을 가하는 장면이 무감각하게 묘사된다. 여느 전쟁처럼 누가 적군이고 누가 민간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공황 상태에서 철부지 소년병들은 명령에 의해 사방에 총질을 하고, 격렬한 전투 후에 자신이 살아 있음에 신에게 감사한다. 내가 아닌 전우가 죽었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이 얼마나 비참한 진실인가.

 

살아남아 조국으로 귀환한 뒤에도 여전히 전쟁의 섬망에 시달리는 바틀에게는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와 그에 얽힌 비밀이 있다. 전우이자 동료였던 머피 이병의 죽음에 대한 강박이다. 광산 출신의 머프는 십대 소년으로 역시 자원입대한 동료다. 그의 어머니는 바틀에게 머프를 무사하게 데려와 달라고 부탁한다. 고대의 금기에 대한 터부처럼 어떤 언약도 지켜질 수 없다. 서사는 열사의 땅 이라크에서 죽음을 맞은 소년병의 비밀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케빈 파워스는 자신과 자신의 경험을 투영한 존 바틀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전쟁이라는 이름의 극한 폭력이 얼마나 사람을 황폐하게 만드는지 건조한 목소리로 진술한다. 전쟁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은 전쟁에 찬성하지 않는다. 그 누구보다 전쟁의 폐해를 잘 알기 때문이다. 1945년 드레스덴 대폭격을 직접 체험한 커트 보네거트가 세계적인 반전 작가가 된 것을 보라. 얼치기 전쟁광들만 3일만 버티면 된다는 망상을 주문처럼 외울 뿐이다.

 

물론 바틀이 전쟁에 나가지 않았더라도 그의 삶이 또 다른 고통으로 점철되었을 거라는 추정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누구나 일상에서 체험할 수 없는 극한의 비극을 전장에서 체험한 베테랑의 이야기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이라크 전쟁의 기원이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한 미정보부의 잘못된 정보에 따라 후세인을 거세한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다는 따위의 설명은 그해 봄에 전쟁은 우리를 죽이려 했다(The war tried to kill us in the spring)”는 소설의 시작에서부터 부정된다.

 

도대체 이라크에서 상실된 젊은이들의 생명은 도대체 무얼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그 누구도 잘못 시작된 전쟁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현실이 두렵기만 하다. 월남전에 투입된 수많은 미군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명분이나 이유 없이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낯선 장소에서 전투를 치르고 그렇게 죽어갔다. 그들의 사후에 추증되는 훈장 따위는 바틀이 그랬듯이 하나의 장식의 의미 밖에 가지지 않는다.

 

미숙한 소년병 머프와 바틀이 있다면 그 대척점에는 전쟁기계 스털링 하사가 있다. 그래봐야 그들보다 서너살 위의 고참으로 실전에서 단련된 마초 이미지를 사방에 흩뿌린다. 정도의 차이겠지만 그 역시 전장에서 분열되어 가는 자아의 한 단면을 그대로 노출한다. 요나 선지자의 최종 목적지가 자신들이 싸우고 있는 니네베였다는 주지시키면서, 십자군 행세를 하는 그의 모습이 영 못마땅하다. 전쟁 영화 <블랙 혹 다운>에서 내내 반복되던 구호인 “No one left behind"는 진짜 군인 스털링에게는 아마 적용되지 않는 모양이다.

 

파괴되어 가는 인간 정신을 죽음의 시각화라는 표현으로 정교하게 추출해낸 케빈 파워스의 역작을 읽으며, 다시 한 번 전쟁의 비극과 왜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되는지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헤밍웨이 이후 최고의 전쟁문학이라는 상찬이 헛된 말이 아니었다. 미국 문단에 새롭게 등장한 분더킨트의 지금까지 보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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