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즈 예게른 -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1915-1916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파올로 코시 지음, 이현경 옮김 / 미메시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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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홍구 교수님의 <역사란 무엇인가> 강의를 들었다. 한 교수님은 강의에서 역사가의 특정 역사에 대한 취사선택 그 자체가 역사가 만들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말씀하셨다. 같은 사건이라도 어느 시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이탈리아 출신의 만화 작가 파올로 코시가 이 책 <메즈 예게른>에서 다룬 아르메니아의 슬픈 역사 그런 게 아닐까? 역사에서 과연 객관성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을까? 이미 파올로 코시는 아르메니아의 처지에서 대학살 사건을 피력한 게 아닐까 싶다.

히틀러와 나치의 유대인 절멸 계획이었던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는 서구 문학과 언론에서 꾸준하게 문제를 제기하면서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주제가 되었다. 하지만 지난 세기 최초의 대학살이었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1915-1916)은 어떨까? 독일-오스트리아 동맹국의 일원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던 터키가 전쟁 중에 저지른 대학살의 비참한 실상을 파올로 코시는 만화로 순화해서 전달해준다. 당시 터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들의 잔학행위를 숨기려고 했지만, 끔찍한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증언과 양심적 서구인들의 노력으로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통해 인류사에 오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사건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

무슬림 국가 터키의 기독교 아르메니아인 탄압의 역사는 지난 세기에 처음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다. 술탄 압둘 하미드 2세가 통치하던 19세기 후반에도 계속해서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학살이 있었다. 청년 투르크당의 개혁으로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탄압이 중지되는가 싶었지만 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의 광기 속에서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조직적 학살이 재개됐다. <메즈 예게른>에서는 전쟁에 아르메니아 자원병으로 참가한 아람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과 소나가 사막을 가로지르는 죽음의 행진에서 생존한 점을 극화화해서 당시의 불편한 진실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당시 터키를 실제로 지배하고 있던 국방장관 엔베르 파샤, 해군성장관 아흐메드 제말 파샤 그리고 내무장관 메흐메트 탈라트 파샤 3인방은 <아르메니아인 문제 해결>이라는 마치 나치 독일의 수뇌들이 모여서 합의한 <유대인 최종 해결>을 연상시키는 아르메니아인 조직 학살을 주도한다. 이들은 아르메니아인이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전멸시키겠다는 엄청난 계획을 용의주도하게 집행했다. 파올로 코시는 당시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잊고 싶은 과거를 성공적으로 재현해낸다.

작가는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홀로코스트라는 인류사에서 지울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독일 출신의 양심적 군인인 베르너 소위와 요하네스 렙시우스 같은 이들이 아르메니아인을 구하려는 노력도 빠뜨리지 않는다. 독일은 전후에도 계속해서 그들의 조상이 저지른 홀로코스트에 대해 반성하고 사죄했지만, 터키는 아르메니아인 학살사건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메즈 예게른>을 공개적으로 언급한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오르한 파묵을 국가모독죄로 기소한 것은 그런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파올로 코시 작가가 선택한 주제인 아르메니아인 학살사건을 통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과거와 화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이 좋을까? 그런 아픔을 가지고 있는 터키와 아르메니아의 공존이 과연 가능할까? 화해와 공존이 피해자에 대한 일방적 강요는 아닐까 하는 여러 생각이 교차한다. 어쩌면 이렇게 짧은 책으로 모든 것에 대한 정답을 구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책의 소개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국내에서 아르메니아 학살사건을 다룬 첫 번째 책이라는 점에서 <메즈 예게른>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메즈 예게른>을 심도 있게 다룬 책의 출간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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