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기의 간주곡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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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2차 세계대전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레지스탕스였던 로맹 가리의 데뷔작 <유럽의 교육>은 물론이고, 관련된 주제는 모두 환영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새로 출간된 르클레지오의 <허기의 간주곡>은 내 취향에 딱 들어맞는 책이었다.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작가가 우리나라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서 더 친근감이 간다고 하면 과언일까.

르클레지오의 신작 <허기의 간주곡>은 작가의 물리적 허기에 대한 유년시절의 고백으로 시작된다. 우리나라 역시 한국전쟁 이후, 주둔한 미군이 던져주던 추잉검이나 쪼코렛을 무턱대고 받아먹었던 것처럼 유럽 아이들 역시 우리네와 다를 게 없었다.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굶주림으로서의 허기가 아닌 허기의 본질이 무엇일까 하는 질문과 맞닥뜨리게 됐다. 도대체 작가가 이 소설에서 말하고 싶은 건 무엇일까 하는.

1930년대 파리에 사는 브룅 가족, 그중에서도 감수성 예민한 부르주아 가정의 소녀 에텔이 주인공이다. 마다가스카르 옆에 있는 인도양의 작은 섬 모리셔스 출신의 아버지 알렉상드르는 집안의 유산 덕분에 변호사라는 어엿한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특별한 일을 하지 않는 한량이다. 에텔의 종조부 사뮈엘 솔리망 씨는 그녀를 끔찍하게 아끼지만, 자신의 조카사위에 대해서는 냉정한 평가를 아끼지 않는다. 자신의 유산마저 에텔에게 물려주지만, 알렉상드르는 친권자로서 에텔이 미래에 누려야 할 유복한 삶을 송두리째 날려 버린다.

에텔은 학교에서 만난 러시아 망명객 출신의 제니아 샤비로프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지만, 혁명으로 모든 것을 잃은 제니아에게는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샤비로프라는 이름 자체가 몰락과 파멸을 상징한다고 했던가. 그렇게 제니아는 어린 나이에 모욕과 치유하는 법을 잘 아는 처세의 달인이 되어 버렸다. 한편, 에텔의 삶은 물질적으로 풍족하지만, 아버지의 여가수 모드와의 외도는 브룅 가족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다.

에텔이 소녀에서 청소년기를 거쳐 어엿한 숙녀로 성장하는 동안, 유럽 역사의 쳇바퀴는 퓌러 히틀러의 등장으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브룅 가족이 물질적 풍요를 유지하는 동안 개최된 살롱에서의 모임은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와 파시즘이 대두하는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한다. 각계의 다양한 인사들이 모여 다룰 수 있는 모든 주제에 대해 논의하지만, 종착점은 언제나 전쟁이다.

브룅 가의 살롱을 출입하던 실업가 클로디우스 탈롱과 사기꾼 슈맹 같은 캐릭터는 너무 평면적인 게 아닐까. 치부를 위해 혹은 히틀러의 천년제국의 현혹되어 부역한 인사들의 면면이 파노라마처럼 간략하게 소개된다. 전쟁 이전에 이미 파산한 브룅 가족은 니스로 로크빌리에르로 피난해서 연명한다. 전쟁 중에 다른 가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이런 전쟁의 와중에 에텔은 살롱에서 알게 된 로랑 펠드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결국 그를 따라 신세계(캐나다)로 떠난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내던져진 에텔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유럽 대륙에 드리워진 전쟁의 공포를 르클레지오는 분석해낸다. 한때 벨 에포크(Belle Epoque:좋은 시절)라고 불렸던 제국의 영광을 뒤로 하고, 나치의 공격 앞에 무력하게 무릎을 꿇은 조국 프랑스의 모습을 작가는 에텔이 솔리망 씨와 꿈꿨던 연보라색 집의 상실에 비유한다. 그리고 제니아가 부러워하던 브룅 가의 부르주아적 삶의 허상은 아버지 알렉상드르의 계속되는 투자 실패와 슈맹의 사기극에 따른 집안의 몰락으로 폭로된다. 스러져 가는 가세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에텔은 억척 소녀로 거듭나지만, 그녀의 노력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이제 다시 ‘허기’의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 되돌아갈 시간이다. 에텔은 물질적 빈곤이 불러온 공허의 구덩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정신적 허기는 더해갈 뿐이다. 작가는 이런 개인의 고통을 역사적 사건에 연결한다. 1942년 7월 16일 벨디브 사건으로 알려진 프랑스 내에서의 유대인 일대 검거는 자유, 평등 그리고 박애를 국가 기조로 삼은 프랑스 양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냈다. 작가 르클레지오는 숨기고 싶은 이 역사를 전면에 내세워, 피할 수 없는 이 역사적 현실을 받아들이고 기억하라고 말한다. 망각을 경계할 것을 주문하며, 반복의 패턴을 강조한다.

어느 인터뷰에선가 르클레지오는 차기작에서 “서울의 골목 풍경 담은 환상소설”을 담아낼 거라는 기사를 읽었다. 우리가 지금 사는 시대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다는 르클레지오가 새로운 작품에서는 우리에게 또 어떤 두통거리를 선사해줄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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