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엄마 찬양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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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전작주의에 도전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작가 중의 한 명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새로운 책 <새엄마 찬양>이 출간됐다. 지난겨울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가 나왔다는 소식에, 그날로 총알 배송을 해서 단숨에 읽어 버렸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도 우연히 <새엄마 찬양>이 나왔다는 소식이 비슷한 코스를 거쳐서 읽었다. 해체된 가족의 흐뭇한 회복을 예상케 하는 제목과는 달리 발칙하고 도발적인 바르가스 요사의 신화와 그림 이야기 그리고 에로티시즘을 적절하게 반죽한 <새엄마 찬양>은 모름지기 글쓰기는 이래야 한다는 전범(典範)처럼 그렇게 나에게 다가왔다.

페루의 아레키파 출신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십 대의 끝 무렵에 자신보다 무려 13살이나 나이가 많은 훌리아 아주머니가 결혼해서 가족을 경악시키기도 했던 범상치 않은 커리어의 보유자다. 타고난 작가인 그가 이 좋은 소설의 소재를 그대로 썩힐 리 있겠는가.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라는 제목으로 1950년대 페루 라디오 방송국을 휩쓸었던 드라마 열풍과 자신의 러브 스토리를 조합한 창작을 선사한 바 있다. 1957년부터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바르가스 요사는 1990년에 페루 대통령 선거에 나서기도 했다. 수많은 라틴 아메리카의 작가 중에서 그만큼 파란만장한 삶의 굴곡을 경험한 작가도 많지 않을 것 같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그리고 카를로스 푸엔테스와 같은 라틴 아메리카 문학계의 거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새엄마 찬양>(Elogio de la madrastra)을 1988년에 발표했다. 이 책에 실린 모두 14개와 하나의 에필로그는 서로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중층적으로 연계되어 있어, 에로틱한 상상의 경계를 넘나든다. 은근하면서도, 때로는 도발적이고 발칙하기까지 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글에 책장을 넘기는 손길이 분주해진다.

아내를 잃고 최근에 새장가를 든 리고베르토 씨, 그의 새로운 여신이자 삶의 활력소인 루크레시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를 사랑하는 의붓아들 알폰소(폰치토)가 <새엄마 찬양>의 세 주인공이다. 이 세 명의 캐릭터는 제 나름대로 선이 굵은 특징을 독자에게 선보인다. 우선 아버지 리고베르토 씨는 일주일에 매일 자신의 신체 부위를 사랑하는 마음에 세정식이라는 이름의 일면 경건해 보이는 의식을 엄숙하게 진행한다. 그의 이 의식은 자신의 에로틱한 상상에 불을 지르는 음화를 몰래 보면서 새로 얻은 아내와의 뜨거운 밤에 대한 즐거운 상상에 전초전이다. 리고베르토 씨는 이제 막 마흔 살이 된 아내 루크레시아의 둔부, 특히 궁둥이에 대해 리디아의 왕 칸다울레스 만큼이나 주체할 수 없는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뭐 여기까지는 좋다, 법적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상상일테니까.

문제는 당장에 죽을 지도 모르고 달려드는 주변의 나방을 유혹하는 듯한 아름다움의 화신 루크레시아다. 완전하게 실패로 끝난 첫 번째 결혼의 트라우마를 가진 그녀에게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 알폰소의 존재는 껄끄럽기만 하다. 하지만, 폰치토의 거침없는 새엄마를 받아들이겠다는 사랑 고백으로 한시름 놓는다. 그러던 어느날, 하녀 후스티니아나의 어처구니 없는 고변을 듣고 루크레시아는 충격에 빠진다. 어린 천사 같은 얼굴의 폰치토가 자신이 목욕하는 장면을 훔쳐 본다는 게 아닌가! 그야말로 마른하늘의 날벼락 같은 소리에, 루크레시아는 후스티니아나의 고발을 애써 무시한다. 사실은 언젠가 밝혀지기 마련인 법, 폰치토의 가늠할 수 없는 욕망의 그림자를 알게 된 그녀는 분노와 수치심으로 뒤범벅이 된 가운데 미래에 파국을 불러올 관능의 고갱이를 뽑아 올린다. 그리고 예정된 수순대로 이야기는 점점 그 흥미를 더해간다.

리고베르토 씨와 루크레시아 그들이 얽힌 삼각관계에 정점을 찍는 것은 바로 아들 폰치토다. 책을 읽으면서 놈은 천사의 얼굴을 한 타락천사 루시퍼의 환생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게 됐다. 제목만 보고 파편화된 가정의 화목한 재구성을 상상했었는데, 이야기는 그 반대로 치닫기 시작한다. 결국 한 여자를 사이에 둔, 아버지와 아들의 파워게임은 이 ‘앙팡 테리블’(enfant terrible)의 치밀한 계산과 조종에 의해 일탈을 거쳐 파국을 정조준한다. 은밀한 에로티시즘의 행복은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는 권력의 본질을 슬쩍 건드린다. 캐릭터 중에서도 특히 공을 들여서 창조해낸 폰치토는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철저하게 통제한다. 이 오만한 녀석에 대한 작가의 묘사는 경이롭다 못해 외경감이 들 정도다.

훔쳐보기 다시 말해서 관음증(voyeurism)으로 시작된 관능에로의 유혹은 아슬아슬한 경계마저도 훌쩍 뛰어넘는다. 요즘 한창 유행인 막장드라마는 저리가라 할 정도로 자제의 울타리를 부순 주체할 수 없는 관능은 활화산에서 지금 막 터져 나온 용암처럼 뜨겁게 분출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금기(taboo)는 깨어지기 마련이고, 그럴수록 더 자극적이지 않은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바로크 혹은 로코코 양식의 회화에 나타난 에로티시즘의 본질을 해석하고, 전설과 신화의 이야기를 들줄과 씨줄로 엮어서 명징하면서도 곤욕스러운 중층적 텍스트를 빚어낸다. 그렇게 얼기설기 짜인 텍스트의 이중성(duality)은 참 매혹적이다. 손대면 그 빛나는 아름다움에 타버릴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 정도로.

<새엄마 찬양>의 고갱이는 은근한 즐거움으로 귀착된다. 너무 재밌어서 당장에라도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또 한편으로는 날것 그대로의 생생한 에로티시즘 미학이 주는 당혹감 때문에 주저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양가적 감정이 상충하는 <새엄마 찬양>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에, 번역을 맡아준 송병선 교수의 깔끔한 번역까지 어우러져 그야말로 최고의 재미를 선사해줬다. 초강력 슈퍼울트라 추천해 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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