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디노의 램프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1년에 수없이 많은 책이 출간되지만, 최근에 열린책들에서 나온 루이스 세풀베다의 신간만큼 반가운 책도 없었던 것 같다. 지난주에 고대해 마지않던 루이스 세풀베다의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에, 도대체 언제나 세풀베다의 책과 만날 수 있을까? 그야말로 몸이 달았다. 그리고 주말에 부러 대형서점까지 달려나가서 오매불망하던 세풀베다의 신간과 만났다. 같은 지구별에 살면서, 지구 반대편에서 누군가 쓰는 글을 이렇게 기다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 같은 책쟁이의 즐거움이 아닐까.

세풀베다의 신간 <알라디노의 램프>에는 모두 12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어느 이야기에나 누군가에게 바치는 헌사 같은 머리말로 시작한다. 작가가 너무나 사랑하는 공간인 지구의 끝 파타고니아를 필두로 해서,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 산티아고, 함부르크, 카니발의 열기로 뜨거운 브라질에 이르는 세풀베다의 이야기가 마냥 부러웠다.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를 하고, 뜨겁고 아련한 사랑을 품고 사는 이를 부러워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굴 부러워해야 한단 말인가.

이제는 전설이 되어 버린 선댄스 키드와 부치 캐시디가 훔친 금화를 우연히 얻게 된 늙은 군인의 이야기로 세풀베다는 온갖 이야기가 뿜어져 나오는 알라딘의 램프를 문지른다. 뜻밖의 행운의 불꽃을 얻은 늙은 군인은 그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자신의 가족에게 줄 조금의 설탕과 차 그리고 사탕을 위해 그는 악당과 경관의 발길질을 감수했다. 그리고 세풀베다는 삶은 원래 그런 거라고 조용하게 되뇐다.

알렉산드리아의 호텔에서는 유령과 만나기도 하고, 세 나라의 국경이 만나는 곳에 자리한 정글의 호텔에서는 희대의 닭싸움꾼 마우리시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한 때 칠레와 페루에 막대한 부를 안겨 주기도 했던 새똥, 구아노를 캐는데 목숨을 걸기도 했던 중국인 이야기, 세상을 주유하던 거울쟁이, 실연에 지쳐 눈물 어항을 만들던 덴마크 남자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귀를 쫑긋 세우게 하는 마력이 발휘된다.

<딩동! 딩동! 사랑이 찾아왔어요>에서는 14살 어린 시절에 만난 자신의 첫사랑에 대한 자전적 이야기다. 내가 아는 것은 오로지 마를리라는 이름 하나, 시간이 흐르고 흘러 68혁명 시기에 동지로 다시 만나게 된다. 오호라, 운명의 끈이란 이렇게도 오묘한 것일까. 그 어린 시절에 들었던 <딩동! 딩동! 사랑이 찾아왔어요> 노래 가사는 그렇게 오랫동안 나를 놔주지 않는다.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법한 옛 추억에 대한 단상을 세풀베다는 잔잔하게 스케치한다.

<알라디노의 램프>에서 압권은 역시 <복수의 천사>와 <대성당의 재건축>이다. <복수의 천사>에서는 우연하게 살인 사건에 휘말리게 된 독일 함부르크에 사는 칠레 출신 망명객의 이야기다. 단지 죽은 여자의 수첩에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경찰에게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그리고 걸려온 협박전화 때문에 경찰로부터 감시와 보호를 동시에 받는다. 나는 엉뚱하게도 자신을 보호하는 경찰로부터 식물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다는 타박을 받기도  한다. 킬러와의 대면 그리고 클라이맥스가 스릴 넘치게 진행된다.

<대성당의 재건축>은 세풀베다의 최대 성공작 <연애소설 읽는 노인>의 후속편이다. 엘 이딜리오의 명물인 “예의 연애소설 읽는” 노인과 치과 의사가 등장한다. 에콰도르와 페루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뚱보 읍장은 애국심에 호소해 보지만 밀림을 의지해서 사는 노인과 수아르족에겐 공허한 프로파간다일 뿐이다. 읍장이 아무리 떠들어 봐도 그들의 관심을 지금 공터에서 한창 구워지는 원숭이 고기로부터 돌릴 수 없다.

정글을 떠도는 서커스 단원들이 ‘일단 마셨다 하면 필름이 끊기는 술’ 프론테라를 섞은 음료를 곰에게 먹여 카누에 태운 이야기가 왜 그렇게 웃기던지. 전쟁 중에 폭탄으로 파괴된 대성당을 재건하는 치과 의사, 노인 그리고 콜롬비아 남자 갈란의 눈빛에서 그들만의 삶의 방식에 대한 자신감을 읽을 수가 있었다.

북글을 쓰다가 난 왜 이렇게 세풀베다가 좋아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아마도 작가의 인간에 대한 열렬한 애정과 신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풍진세상을 아직도 이렇게 사랑하는 작가가 있다는 사실에 매료되었나 보다. 읽을수록 깊은 울림이 느껴지는 멋진 글을 만들어내는 루이스 세풀베다의 문학여행이 계속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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