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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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맥스웰 쿳시의 초기작 <야만인을 기다리며>을 읽었다. 시대를 알 수 없는 제국의 변경을 공간적으로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작가의 미니멀한 스타일 그리고 시대와 공간을 알 수 없는 그런 모호한 설정이 마음에 들었다. 물론 시대를 특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림짐작으로 작가가 묘사하는 야만인들이 출몰하는 변방의 세계에 대한 상상이 필요했다. 소설의 내레이터이자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치안판사의 내적 갈등이 들끓는 장면은 종종 지루하기도 했고, 그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보다 적극적인 상상력이 필요했다. 우리 시대의 문학이 기억과 상상력의 확장이라는 보르헤스의 혜안을 빌린다면 존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만큼 적합한 소설이 또 있을까 싶었다.

 

제국의 변경이긴 했지만 소설의 공간적 무대는 지극히 평온하고 조용했다. 하지만, 변방에 야만인들이 출몰하면서 제국의 안보를 위협한다는 말에 군대가 등장하고, 그 군대를 인솔하는 죨 대령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면서 존재하지 않았던 제국의 위협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제국의 병사들은 제국의 시민들을 위협할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야만인들을 잡아다 고문하고 살해하기에 이른다. 지식인을 자처하지만 제국의 안녕을 담당한 치안판사의 내적 갈등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과거 전 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해서 식민지인들의 노동력과 자원을 강탈한 제국주의자들도 치안판사와 같은 생각을 가졌을까. 모든 것에 우선하는 제국의 이윤 추구 앞에 그런 상념들은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되고, 영원한 제국의 유지를 위해 폭력의 항상성에 의존하지 않았던가.

 

제국의 수도를 떠나 수십 년간 변방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군림해온 치안판사의 몰락은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병사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받고, 아버지와 시력을 잃은 야만인 소녀를 탐한 치안판사는 어느 순간 그녀를 동족들에게 보내기 위해 목숨을 건 여행길에 나선다. 주인공의 인도주의적으로 보이는 처사는 궁극적으로 그의 파멸을 초래한다. 제국 정보부는 야만인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내세워 그를 치안판사 자리에서 내쫓고 투옥시킨다. 이 장면에서 제국의 협력자들도 수시로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보인 것일까. 아니면 작가의 조국 남아프리카에서 악명 높은 아파르트헤이트가 종식되고, 다가올 다수 흑인 정권의 역습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두려움의 표시는 아니었을까.

 

역사에서 흔하게 반복되는 한 때 강력했던 제국의 몰락을 가져온 존재하지 않는 위협이 강조되고, 출처를 알 수 없는 낭설이 유포되며, 야만인들을 정벌해서 제국의 안정을 가져오겠다는 원정군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버리는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동시에 변방의 주민들은 안전을 위해 거주지를 떠나기 시작한다. 권력의 공백기에 무슨 벌어지는지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세계 패권국가 미국이 자국의 시민들을 위해 사용되어야 할 비용들이 전혀 소모적인 해외원정군의 전비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꼬박꼬박 세금을 내는 시민들은 알고 있을까. 항구적인 평화가 수립된다면, 다른 유익한 곳에 전용될 수 있는 비용을 낭비함으로써 오히려 제국의 안보가 위협받게 된다는 역설적인 현실의 상황을 존 쿳시는 날카롭게 꼬집는다.

 

초로의 치안판사의 모습 역시 날이 갈수록 쇠락해 가는 제국의 그것을 상징한다. 그는 자신의 나이보다 더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을 욕망한다. 그것은 탐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애써 감추려 하지 않는다. 야만인 소녀에 대한 집요한 탐욕이 그 방증일 것이다. 죨 대령으로 대변되는 제국의 기득권층은 절대 야만인들과의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하지 않다며, 무력으로 그들을 진압해야 한다는 강경파의 주장을 대변한다. 그 대척점에 선 치안판사는 변방에서 다년간 체득한 경험에 따라 야만인들이 전혀 제국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야만인과의 원정에 동원된 병사들은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니라 탈영과 변방의 사막을 헤매다 결국 존재가 소멸되어 버린다. 결국 존 쿳시 작가는 무의미한 전쟁이 가져올 폐해를 예리하게 짚어낸다. 어쩌면 미국이 베트남에서 치른 게릴라전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힐 수 있을지 모르겠다.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던 제국은 결국 전쟁에서 지고 말았다.

 

죽음과도 같은 치욕을 겪으면서도 치안판사가 살아남게 되는 과정도 주목할 만하다. 군인들의 잔인한 고문에 죽어간 무고한 야만인들을 대신한 것은 바로 지배 계급의 일원이었던 치안판사였다. 그는 변방에서 조용하게 살아갈 수도 있었지만, 자기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다가(너무 자의적이지 않은가) 결국 모든 권리와 명예 그리고 재산을 상실하고 바닥으로 추락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치안판사가 망루에 늘어선 감시병들의 눈을 피해 야만인들의 땅으로 주인공이 도주해서 야만인 소녀와 다시 만나는 그런 장면을 상상해봤다. 그렇게 되었다면 너무 신파였을까? 어떤 결말이었지. 불과 며칠 전에 다 읽은 소설의 결말이 기억나지 않다니. 기억과 상상력의 확장이라는 표제어 대신 나는 아마도 망각을 취사선택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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