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도리스 되리, 김라합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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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24년 전에 본 영화가 다시 한 번 내 삶 속으로 들어왔다. 그 시절에는 영화로, 그리고 지금은 책으로. 공통점은 연출자와 작가가 같다는 점, 그리고 파니 핑크. 너무 오래 전에 본 영화라 기억이 다 가물가물하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영화도 찾아서 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는 어떤 주술 같은 단어였던 <Keiner Liebt Mich>를 입 속에서 다시 한 번 되뇌어 본다. 소설집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에는 18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각각의 소설에는 파니와 클라우스, 파울 그리고 샤를로테가 다양한 모습으로 겹치기 출연의 방식으로 변주를 거듭한다. 얼결에 자신도 모르게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소녀의 모습으로, 때로는 여동생의 결혼식을 앞둔 신경질적인 모습을 지닌 언니의 모습으로. 도리스 되리 작가는 자존감이 거의 없다시피 한 주인공들의 심리를 그야말로 후벼 판다. 영화 속의 파니가 그랬던 것처럼.

 

영화에서 너무 매력적인 캐릭터였던 오르페오와 만나는 순간은 정말 짜릿했다. 영화와 소설 어떤 게 먼저일지 모르겠지만, 우주에서 온 외계인 같은 영혼의 소유자 오르페오의 현란한 말솜씨와 외로운 파니를 위로하는 스킬에 나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가 설사 파니를 속인 사기꾼이라고 해도,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해서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사기를 당하게 되는 건가하는 생각이 다 들 정도였다. 오르페오가 파는 싸구려 장신구에 엄청난 돈을 지불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자기위로의 일면을 보았다고나 할까. 또 한편으로는 부서질 것 같은 니힐리즘의 여운이 그윽한 유디트 헤르만의 글들이 연상되기도 했다. 상당히 비슷하지 않은가. 또 때로는 <바그다드 카페><Calling You>도 생각났고. 감성이 때로는 이성을 압도하는 기현상에 매료되기도 했다.

 

<핸드백>에 등장하는 린다 그라임스는 두 개의 소설에 연달아 등장한다. 절도죄로 보호감찰 중인 린다 그라임스는 천사가 살지 않는천사의 도시를 떠나서는 안되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라스베이거스를 누빈다. 여행 중인 남자는 벙어리 린다에게 10달러인 줄 알고, 50달러를 건네고 횡재한 여인은 생면부지의 남자 밥의 차에 올라타고 솔트레이크 시티로 향한다. 그 남자는 사막에서 린다의 핸드백을 발견했다지 아마. 어느 여자가 자신의 핸드백을 그렇게 버릴 수 있을까. 무솔리니의 애인은 마지막 처형의 순간까지 핸드백을 포기하지 않았다지 아마. 금사빠처럼 사랑에 쉽게 빠지는 여인 린다는 밥이 자신을 살짝 드러내자 곧바로 사랑 모드로 돌입한다. 독자에게 한껏 기묘한 로맨스를 기대하게 만들고, 린다가 밥에게 던진 거짓말 때문에 사막의 모래성처럼 관계가 무너지는 장면이 이어진다. 마치 한 편의 연작 단편영화를 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도리스 되리의 영화 연출에 대한 상상이 개입되는 느낌이다.

 

샤론이라는 인디언 소녀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알록달록한 인디언 전통의상을 입고 같이 사진을 찍어주는 대가로 15달러를 받는다. 주차장에서 영업을 하던 소녀는 결혼반지를 애써 감추지 않는 남자와 도주를 감행한다. 한밤중에 드라이브 웨이를 달리는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몽환적 이미지처럼. 반지를 숨기는 것보다 차라리 낫다는 샤론의 아리송한 표현이 독자를 혼돈에 빠지게 만든다.

 

개인적으로 가장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단편은 <투바 양탄자 전용 세제>. 아내를 집을 비운 사이, 불륜 상대 예시카를 집으로 끌어 들인 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하나의 사태를 체험하게 된다. 그건 바로 예시카가 욕실에서 자살 시도를 했다는 점이다. 면도칼로 자살을 시도한 그녀를 구하는 일보다 자살의 흔적을 지우는 일에 더 신경을 쓰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뒤틀린 일상의 단조로움이 엿볼 수 있었다. 애초에 어떤 일탈을 위해 예시카를 만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일상이 흐트러지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현일까? 아내 에바가 돌아오기 전에 나는 피로 물든 투바 양탄자를 전용 세제로 말끔하게 닦아내야 한단다. 위선이라는 층위에 덧대어진 왠지 모를 비가의 느낌이 생소하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사랑이라고 명명된 감정의 색깔은 무슨 색일까. 완벽해 보이는 사람들의 관계에도 어디에나 균열은 있는 법이다. 오랜 시간을 같이 해왔다고 생각해도, 어느 순간 자신이 사랑했다고 믿은 사람에게 건널 수 없을 정도의 거리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 바로 그런 기가 막힌 순간들을 절묘한 타이밍에 도리스 되리 감독은 포착한다. 동정심 혹은 자기 연민으로도 포장할 수 없는, 타자가 나를 향해 쏜 배제적 감정이야말로 우리 현대인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아닐까. 솔직히 말해서 나는 모르겠다.

 

<Nothing Compares 2 U>를 부른 젊은 여가수는 시네이드 오코너다. 1992SNL의 뮤지컬 게스트로 등장해서 교황의 사진을 찢은 바로 그 가수. 감정의 극한으로 달려가는 주인공 파니들의 감정을 드러내는데 이만한 노래도 없겠지. 그렇게 언제나 다시 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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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9-04-04 18: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 파니 핑크는 여러 번 봤어요. 첫 장면에서 흐르던 파니의 독백과 마지막 엔딩에서 다같이 떼창하던 Edith Piaf의 Non, Je Ne Regrette Rien가 제일 먼저 떠오르네요.
소설도 궁금하지만 저도 간만에 다시 영화가 보고싶네요. ^^

레삭매냐 2019-04-04 22:29   좋아요 0 | URL
덧글 보고 나서 후닥닥 <파니 핑크>를 확인해
보았답니다. 떼창 ~!

˝나 자신 조차도 날 사랑하는 건
힘들 것 같아요...˝

크하 -

명작은 세월이 지나도 고유의 아우라를 잃지
않더라는. 그 때 쟁여둔 영화 전단이 엄청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