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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ㅣ 사계절 만화가 열전 13
이창현 지음, 유희 그림 / 사계절 / 2018년 12월
평점 :
어제 오후에 도서관으로부터 희망도서가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퇴근하고 나서 저녁을 먹은 뒤, 재활용 쓰레기와 음식물 쓰레기들을 내다 버린 다음, 부웅 차를 타고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을 빌리러 말이다. 그리고 숨도 쉬지 않고 그렇게 책을 읽었다. 결론은 기대만 못하다였다.
사실 다음에 연재된 만화의 시작은 창대하였고 흥미진진하였다. 하지만 너무 B급 갬성을 강조하여서인지 후반으로 갈수록 내용이 산으로 가는 게 아닌가. 그냥 계속해서 책에 대한 썰에 중점을 두었으면 좋았겠지만 MI6니 CIA가 등장하고 예티가 폭격수로 등장하면서부터 쫌 그랬다.
그렇다 나도 독서 모임에 나가는 독서 중독자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 오늘도 종로로 출격할 예정이다. 오늘 우리가 토론할 책은 존 그레이의 <꼭두각시의 영혼>이다.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부터 시작해서 브루노 슐츠를 거쳐 사이보그 시대의 인간 노동 등등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나는 책을 읽었지만 여전히 내가 읽은 것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나는 독서 중독자다.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을 읽으면서 내가 소장한 책을 만날 때의 즐거움이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지난달에 읽은 츠바이크의 <에라스무스 평전>도 사실 이 책 때문에 읽었노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 이미 절판된 책이고, 다행히 서가에 얌전히 꽂혀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읽을 수가 있었다. 모든 종류의 광신을 부정하는 츠바이크가 그린 위대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인문주의 정신 아래 우리 모두가 형제라는 의견을 개진하지 않았던가. 읽다만 오이겐 루게의 <빛이 사라지는 시간>을 만나게 되었을 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영화 <무간도>에서 따온 것이 분명한 암흑조직을 15년 동안 섭렵한 경찰은 독서모임의 신입으로, 노마드와 함께 등장한다. 다른 독서중독자들처럼 자기개발서를 즐겨 읽는다는 노마드는 그 자리에서 바로 강퇴당한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자기개발서라니! 독서 중독자로 충분히 이해가 가는 장면이었다. 독서 모임 8년차에 접어들고 있는데 우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비슷한 책을 주제 토론으로 삼은 적이 없다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하긴 인문서적도 잘 안하는구나. 우리 달궁에서는 주로 문학을 즐겨 씹는다.
그나저나 우리의 신입 노마드는 무언가 대단한 책을 읽고 독서 모임에 가입하기 위해 어마무시한 책들을 완독하고 재도전에 나선다. 항문 아니 아날학파의 거두 페르낭 브로델의 <지중해>를 읽고 또 에드워드 파머 톰슨의 <영국노동계급의 형성>을 읽었다고 한다. 전자는 그나마 들어본 적이라도 후자는 정말 생소한 책이 아닐 수 없다. 역시나 독서 중독자들의 세계는 무궁무진하고 도전정신이 넘치는 선수들의 무대가 아닐 수 없다. 그럴수록 나의 도전정신은 끝 간 데 모르고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다. 전혀 시집을 읽지 않는데 최승자 시인의 <이 시대의 사랑>은 도서관에서 한 번 빌려다 읽어야지.
소설 작가로 등장한 로렌스의 어처구니없는 활약도 주목할 만한다. 결국 독서 중독자들의 마지막 도전은 글쓰기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걸까. 하긴 진짜 독서 중독자 중에 소설가로 등단한 사람도 있으니 전혀 틀린 설정은 아닐 것이다. 영화평론가들의 꿈이 궁극적으로 영화 연출이니 만큼 말이다. 독서 중독자들에게 무료로 자비 출판한 책을 뿌리려던 로렌스의 시도는 단박에 박살이 나고, 그나마 달랑 한 권 산 예티는 다른 중독자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중고서점 대신 다른 방법으로 없앴다지 아마. 어쩌면 그렇게 정확하게 정밀타격을 하는지 작가들이 정녕 독서 모임에 단 한 번도 나간 적이 없는지 의심이 들었다 하 하 하.
예전에 읽었던 의천도룡기에서 무당파의 진인 장삼봉 선생에게 태극권을 전수받은 절세무공의 보유자 장무기가 권법의 배움을 모조리 다 잊어버리는 것처럼 불과 어제 읽은 책의 내용이 벌써부터 가물가물해지기 시작한다. 원래 별 다섯 개를 주려고 했으나 아무래도 황당무계한 전개 때문에 하나는 깎아야지 싶다.
한 달을 기다린 독서 모임의 시간이다. 벌써부터 염통이 쫄깃해지는 그런 기분이다. 고고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