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테판 츠바이크의 에라스무스 평전 - 종교의 광기에 맞서 싸운 인문주의자, 아롬옛글밭 2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민영 옮김 / 아롬미디어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기해년 서가파먹기 프로젝트 #002>

 

종교개혁의 기수 마르틴 루터 이전에 가톨릭 개혁가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바로 에라스무스다. 20세기 최고의 전기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의 <에라스무스 평전>은 우리에게는 그저 <바보 예찬>을 지은 가톨릭 신부로 알려져 있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최초의 세계인이라고 할 수 있는 에라스무스의 진면모를 파헤친다. 기이하게도 번역을 맡은 정민영 씨는 이 작품을 소설이라고 쓰고 있다. 처음에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몰랐지만, 읽다 보니 공감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현대인 츠바이크가 어떻게 에라스무스의 흉중까지 들여다 볼 수 있었겠는가. 여기저기 파편처럼 남아 있는 르네상스 최고의 지식인의 흔적들을 찾아 맞추는 일종의 퍼즐 게임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신부와 하녀 사이에서 사생아로 출생한 에라스무스는 어머니를 페스트를 잃고, 아버지의 돌봄도 없이 홀로 성장할 운명이었다. 1487년 스테인에 위치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학교에서 엄격한 훈육과 지도 아래 성장했다. 기존 종교에 대한 생래적 반발은 아마도 이 교육 과정에서 생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해에 사제 서품을 받은 에라스무스는 다음해, 라틴어에 발군의 실력을 바탕으로 카브레 주교의 라틴어 비서관이 되었다.

 

에라스무스의 삶은 방랑자의 그것이었다. 카브레 주교의 후원으로 파리에 유학에 나선 에라스무스는 지극히 교조적인 스콜라 철학에 회의를 느꼈다. 이후에는 영국에서 토머스 모어와 교류하기도 한다. 로마와 이탈리아 여행에서 가톨릭의 타락한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 영국에 와서 <바보 예찬>을 발표한다. 사실 츠바이크의 평전을 읽기 전까지 내가 아는 사실이라고는 에라스무스가 로테르담 출신이라는 점과 그 유명한 <바보 예찬>의 저자라는 점 뿐이었다. 물론 <바보 예찬>은 아직 읽어 보지 못했다. 평전을 읽으면서 동시에 <바보 예찬>에 도전했는데 잘못된 번역서를 골라 낭패를 봤다. 좀 더 쉽게 번역된 책을 골라야 했나 보다.

 

내가 보기에 기회주의자인 에라스무스는 평생 평화주의자이자 보편 인간(uomo universale)으로서 경계인의 삶을 살았다. 그가 가장 배격하는 것은 바로 모든 종류의 광신이었다. 훗날 쇠망치는 든 종교혁명가 루터와의 대결에서도 보여지듯이 신교와 구교를 가리지 않고 맹목적 광신을 가장 혐오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로 바야흐로 유럽 사회에 서적을 통한 지식이 전파되고 사상을 교유하는 르네상스의 시대가 도래했는데, 루터와 더불어 가장 큰 혜택을 받은 사람이 바로 에라스무스가 아닐까 싶다.

 

에라스무스의 약점 중의 하나는 바로 지식인 위주의 사고가 아니었을까? 대다수의 사람들이 문맹이던 시절 모국어도 아닌 라틴어로 쓰인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 싶다. 라틴어의 대가였던 에라스무스는 그리스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훗날 그의 사도이자 라이벌이었던 루터 역시 에라스무스가 쓴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모든 예술이 종교 권력의 시녀이던 시절, 교황과 군주들 그리고 지식인들에게 에라스무스와의 교류는 우월한 지식인 세계로 입장권을 의미한 모양이다. 그 이전에 어떤 지식인도 에라스무스와 견줄 만한 지위를 확보하지 못했다. 가톨릭 사제였던 에라스무스는 절제의 미덕을 고수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농부 출신 격정가 루터와는 달리 허약한 자신의 육신의 한계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 죽음은 평생 그를 따라 다니는 그늘과도 같은 존재였다. 회피는 어쩌면 에라스무스를 특징 짓는 성품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자 이제 드디어 마르틴 루터가 등장할 차례다. 그동안 읽은 어떤 종교개혁에 대한 책에서도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대결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루터가 종교와 신을 인간에 앞에 두었다면, 위대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가톨릭 신부라는 자신의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한 보편적 사랑을 강조한다. 루터가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라면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과 전쟁을 불사할 태도를 보인다면, 에라스무스는 평온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존재 이유라며 어떠한 형태의 폭력에도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다.

 

구교와 신교 세력 모두는 에라스무스를 자신들의 편에 세우기 위해 전력투구에 나선다. 하지만 우리의 교활할 정도로 중재와 화합에 뛰어난 지식인 에라스무스는 한쪽 편에 서길 거부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종교개혁의 시대에 중립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나는 에라스무스에게서 최근 대선불출마를 선언한 어느 리버럴리스트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이 위대한 지식인은 결국 시대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다. 나는 모르겠다. 그가 과연 토마스 뮌처를 비롯한 농민혁명의 불길 대신 군주들의 편에 섰던 루터의 편을 들어야 했는지 말이다.

 

츠바이크는 에라스무스를 종교개혁 시대의 패배자로 규정한다. 그렇다고 해서 에라스무스가 루터의 주장을 무시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전형적인 회의주의자(skeptikus)답게 자신의 입장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으면서 하나의 줄타기를 시도했다. 그는 줄곧 루터가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로 잽만 주고받던 당대의 두 스타는 자유의지에 대한 구원론의 문제에서 결별선언을 도달한다. 개인적으로 에라스무스는 광신적이고 열정에 찬 루터의 거친 행동에 그리고 루터는 에라스무스의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서로 참을 수가 없었던 게 아닐까 싶다.

 

종교개혁의 시기는 혼돈 그 자체였다. 어느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던 선구자들은 시대정신을 추구하면서, 자신의 주장과 맞지 않는 생각을 가진 이들과 때로는 타협해야 했고 때로는 격렬하게 맞서 싸워야 했다. 그 가운데 인간정신의 해방을 꿈꾸며, 이상적이고 도덕적인 군주가 지배하는 세상을 꿈꾼 세계주의자 에라스무스에게 열린 공간은 너무 협소했다. 자유사상가로 그렇게 좋아하는 저술에 전념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시절은 그가 조용하게 살도록 놔두지 않았다. 자신의 한계를 잘 알았던 에라스무스는 라이벌 루터처럼 맹렬하게 자신의 주장을 대중에게 설파할 능력도, 할 생각도 없었다. 다만 그는 평온한 삶을 원했을 뿐이다.

 

번역을 맡은 이가 왜 <에라스무스 평전>을 소설이라고 썼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츠바이크는 걸출한 전기작가답게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역사의 빈 공간의 채웠다. 간혹 가다가 독자가 이거 너무 나간 거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그래도 위대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 삶의 궤적을 쫓는 여정은 즐거운 시간들이었다. 츠바이크의 다른 전기들도 만나보고 싶어졌다.

 

[뱀다리] 아 그리고 이 책은 최근에 나온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에 등장하는 시퀀스를 보고 바로 읽을 결심을 했다는 사실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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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01-09 18: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해 우주지감 독서모임 12월 선정도서가 츠바이크의 소설입니다. 제가 딴 책에 정신 팔리지 않는 이상 츠바이크 전작 읽기에 도전하고 싶네요. 지금 상황을 봐서는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요... ㅎㅎㅎ

레삭매냐 2019-01-09 19:28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러고 싶은 생각이 굴뚝이나
섣불리 선언을 하지 못하겠네요...

게다가 절판된 책들도 많고설라무네.

일단 가지고 있는 츠바이크의 책들부
터 읽어야지 싶습니다.

stella.K 2019-01-09 18: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츠바이크는 어느 출판사에서 전집으로 내주면 좋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기해년 서가 파먹기 프로젝트라. 좋은데요?
저도 가급적 그러려고 하는데 감히 프로젝트까지는 생각 못했습니다.
암튼 시작이 좋은 것 같습니다. 응원합니다.^^

레삭매냐 2019-01-09 19:30   좋아요 1 | URL
이 책 재밌는 것이... 판권 등에 대한
정보가 아예 없답니다.

해적판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더라구요. 아니면 저작권이 풀려서
아무나 책을 내도 되는 건지 궁금하
네요.

말씀해 주신 대로, 전집으로 구성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 출판사들이 책을 내서 통일성이
좀 없는 느낌도 들구요...

서가파먹기 응원, 감사합니다 -

Falstaff 2019-01-09 20: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위 스텔라 님의 의견에 백퍼 동의합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평전, 전기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판권 등의 정보가 없는 책들은 대강 일본책 중역한 거라고 보시면 맞습지요. ^^;

레삭매냐 2019-01-09 22:10   좋아요 1 | URL
그랬군요 - 한 수 배웠습니다.
요즘 책 같지 않다 싶었더니만 그런 비밀이.

1934년에 이런 상상의 날개를 펼쳤다는게
놀라울 따름입니다.

카알벨루치 2019-01-09 2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20대에 읽었는데...기억이...설익은 서평이 있을래나

레삭매냐 2019-01-09 22:19   좋아요 1 | URL
제법 연식이 된 책이라 ㅋㅋㅋ

저는 늘그막에 읽었습니다만.

카알벨루치 2019-01-09 22:21   좋아요 0 | URL
97년도 출판된 책이네요 98년도에 읽었네요 제가 쓴 리뷰를 보고 있네요 기억을 상쇄하려면 레삭매냐님 리뷰를 참고해야겠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