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 민음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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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읽기 시작했다. 나의 두 번째 책은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였다. 실화를 바탕으로 쓰인 소설로, 콜롬비아 어느 마을에서 명예살인 당한 21세 청년 산띠아고 나사르의 죽음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나는 궁금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화자는 누구지? 소설에서 도대체 화자가 누구인지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다만 아랍계 아버지 이브라임을 잃고 졸지에 대농장주가 된 청년 산띠아고의 절친이라는 점 밖에는. 게다가 이야기는 그가 죽고 난 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화자의 노력으로 재구성된 점이라는 사실도 독특하게 다가왔다.

 

사건은 마을에서 떠들썩한 결혼식이 벌어진 일요일 다음날인, 월요일 새벽에 발생했다. 외지에서 온 바야르도 산 로만과 마을처녀 앙헬라 비까리오의 성대한 결혼식의 후유증으로 마을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이 취해 있을 때, 신부의 오빠인 쌍둥이 빠블로와 뻬드로는 여동생 앙헬라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도살업자 칼을 들고 복수에 나섰다. 이유는 앙헬라가 초야에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원인제공자가 새매라는 별명으로 불린 미남자 산띠아고라는 점이었다. 그런데 과연 그게 사실일까?

 

한 가지 그 즈음해서 주교가 마을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축제 분위기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결혼식과 주교의 방문이 이루어지는 사이에 더 충격적인 산띠아고 나사르 살해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진짜 문제는 칼로 무장한 비까리오 형제들이 산띠아고를 죽이겠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다는 점이다. 그래서 동네의 모든 이들이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하지만, 원래 착했다는 형제들의 품성 때문에 설마하는 이들이 대다수였고, 자기가 아니더라도 산띠아고에게 누군가 그런 위험이 있다는 걸 알려 주겠지하는 방심이 더 큰 문제였다.

 

산띠아고의 피앙세 플로라 미겔은 앙헬라의 처녀성을 훼손한 남자가 다름 아닌 자신의 약혼자라는 사실에 차라리 누군가에게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설상가상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된 산띠아고 절친 의대생 크리스토 베도야는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경고를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시장이자 전직 대령인 알폰테는 쌍둥이 형제의 무모한 행동에 앞서, 그들을 무장해제시키지 않았던가. 물론 그들은 곧바로 다른 무기를 취합하는 성공했지만 말이다. 사실 마을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들을 말리기만 했어도, 충분히 비까리오 가족의 명예를 수호되었을 것이고 그들 역시 살인까지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예고된 죽음은 집단적 무관심과 우연의 연쇄작용으로 인해 결국 끔찍한 비극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는 누구일까? 20번이나 칼에 난자당해 죽은 산띠아고야 그렇다 치더라도, 연루된 이들은 모두 비극을 맞지 않았던가. 마을에서 가장 성대한 결혼식의 주인공이었던 앙헬라의 가족은 아랍계 주민의 보복을 피해 이주해야만 했다. 그리고 외딴 곳에 정주한 그녀는 23년 간 오지 않을 답장을 기다리며, 남편 바야르도 산 로만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던가. 결국 그녀가 쓴 모든 편지를 들고 그녀 앞에 등장하는 신랑의 모습에서 난 현대판 주술적 리얼리즘의 한 단면을 얼핏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주술적 리얼리즘의 현현이 아니라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하긴 엄청난 돈을 들여, 호화로운 결혼식을 추구했던 바야르도 산 로만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큰 피해자가 아니었을까? 미래의 아내에게 적극적이다 못해 무대포 스타일로 구애하는 장면도 그렇고, 아내가 원하는 집을 상처한 노인장에게 거의 빼앗다시피 강매했지만 그 집은 결국 폐허가 되어 버렸다. 입심 좋은 이들은 곧 죽은 노인장의 원한 때문이라는 주석을 달았고, 집에 구비된 세간들을 알뜰하게 빼내가는 모습도 보여 주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소설을 읽는 동안 구로사와 아키라의 명작 <라쇼몽>을 연상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사건에 대해 다양한 시각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말이다. 이미 소설의 초반에 죽은 산띠아고 나사르의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지만(구로사와라면 영매를 동원해서 죽은 산띠아고의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더더욱 주술적 리얼리즘에 가까워졌을 텐데 말이다), 살아 남은 이들의 진술은 언제나 그렇듯 제각각이다. 먼저 쌍둥이들은 자신들은 자신들이 해야할 일을 해야 했을 뿐이라며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소설에서 궁금한 것 중의 하나는 살인죄로 복역 중이던 쌍둥이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사면을 받았는가라는 점이다. 살인죄는 분명 중형일 텐데 고작 3년을 살고 풀려났다? 그 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처구니 없는 라틴아메리카 특유의 마치스모(남성 우월주의)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전직 의대생 출신 카르멘 아마도르 신부가 법적 효용도 없는 산띠아고의 부검에 나서게 된 장면 역시나 희극적이다. 마을의 유일한 의사는 부재 중이었고, 현직 의대생 크리스토 베도야는 고인의 친구였기 때문에 끔찍한 임무로부터 자동적으로 배제되었다. 어쨌든 예의 부검으로 산띠아고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 쌍둥이들의 칼에 의한 자상이었다는 점이 밝혀지긴 했지만 소설의 묘사 중에서 가장 리얼했지만 동시에 비극적인 장면이었다.

 

소설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에서 등장하는 숱한 상징과 비유들이 의미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인류의 역사 속을 고고하게 항해하는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가 아닐까 싶다. 오는 건 순서가 있지만, 가는 건 차례가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풍족한 재산과 젊음 그리고 잘생기고 피앙세까지 둔 자신만만한 21세 청년도 예외는 아니다. 어떤 조건도 부지불식간에 다가오는 죽음을 구축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다만,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소설에 역설적인 여백을 마련했다. 그것은 바로 예고였다. 수많은 이들이 산띠아고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점을 알고는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결국 죽음이라는 이름의 숙명은 그 틈새들을 파고들어 목표물을 적확하게 타격했고, 그 결과는 문자 그대로 비극의 재현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이기도 했고.

 

내가 읽을 다음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작품은 어떤 책이 될까나. 신간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 제목 때문에 의도적으로 멀리했던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아니면 초기작 <썩은 잎>? 모두 적은 분량이라 도전에 부담이 없어 좋다. <백년 동안의 고독><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근데 언제 읽으려나.

 

[뱀다리] <백년 동안의 고독>에 등장하는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의 적수 뻬뜨로니오 산 로만 장군이 바야르도의 아버지로 나온다. 결국 <백년 동안의 고독>은 마르케스 작품을 관통하는 만능 키 같은 의미라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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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1-18 10: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백년 동안의 고독>이 그 키가 아닐까 그의 작품의 분수령이 아닐까 싶네요~

레삭매냐 2018-11-18 10:55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 단언컨대
<백년 동안의 고독>부터 읽어야 하나요 ㅋㅋㅋ

카알벨루치 2018-11-18 12:38   좋아요 1 | URL
23년 구상하고 18개월동안 집필한 <백년동안의 고백>이니 아무래도 남다르겠죠! <콜레라시대의 사랑>이 더 늦게 출판되었으니 아무래도~작가읽기는 순서도 중요한가봐요 로맹가리의 <내 삶의 의미>읽고나니 그냥 맥이 좀 풀려서 로맹가리 책만 사놓고 ㅋㅋ다 핑계이지만~ㅋㅋ즐독 열독 광독가 레삭매냐님 홧팅!

레삭매냐 2018-11-18 13:04   좋아요 1 | URL
대작들은 아무래도 분량 때문에 선뜻 손이 가질 않네요...
저도 로맹 가리 책들 수년 동안 묵혀 두었다가 읽은 걸요. 심지어 두 번 산 책, 있는데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은 책도 있답니다.
일단 사두시면 언제고 읽게 되시리라 믿슙니다~

Forgettable. 2018-11-18 14: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랑과 다른 악마들도 좋습니다. 콜레라는 길지만 제일 쉽게 읽혀요.
* 아 이미 읽으셨군요 ㅎㅎ 그렇다면 콜레라시대 추천이요. 백년고독보다는 가볍게 읽혀요!

레삭매냐 2018-11-18 19:11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콜레라>는 소장각이지 않을까
싶네요.

최근에 읽은 중국 소설 <책물고기>에도
그 책이 등장하던데, 결국 연쇄독서로 읽
어야 할 책이 늘어났군요...

추천 감사합니다.

북프리쿠키 2018-11-18 1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콜레라시대의 사랑 읽어보고 싶네요. 책은 도끼다 에서 언급했는데 꼭 읽어보고 싶었지만, 백년동안의 고독을 읽고 겁이 나서 그만 ㅎㅎ
로만 장군이 나오면 발자크의 인간희극 같은 계열로 보면 되나요?ㅎ

레삭매냐 2018-11-18 19:13   좋아요 0 | URL
문득 우리나라에서도 발자크의 루공
마카르 총서가 나올까 싶은 생각이 들었
습니다. 아무래도 안되겠죠?

전 이미 한 번 실패한 기억 때문인지,
일단 <콜레라>부터 읽어야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