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바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 지음, 공진호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번에는 <리어 왕>이다. 지난 주말에 요 네스뵈가 쓴 <맥베스>로 호가스 셰익스피어 다시 쓰기 시리즈를 접하고 삘이 온 모양이다. 당장 도서관으로 달려가 이번에는 <던바>를 빌려서 읽었다. 얼마나 재밌는지, 하루 만에 다 읽었다. 아무래도 이 시리즈의 팬이 될 모양이다.

 

요즘 패트릭 멜로즈 시리즈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이라는 우리에게는 낯선 작가지만, 영국에서는 한 자락하는 작가라고 한다. 구구절절하게 던바 트러스트라는 미디어 제국을 세운 헨리 던바가 어떻게 해서 자신의 딸인 애비게일과 메건에게 밀려났는지에 대한 설명 없이 바로 정신 병원에서 출발한다. 올해 여든 살의 노익장을 자랑하는 캐나라 출신 헨리 던바는 야심찬 딸들에게 강제로 제국의 수장 자리에서 퇴위되어 유폐된 운명이다. 유산상속에서 내쳐진 막내딸 플로렌스만이 자신을 찾아 나선다.

 

맨체스터의 고립된 요양원에서 희극 배우 피터 워커의 도움으로 탈출해서 자신의 제국을 회복하려고 하지만, 딸들의 추적은 집요하다. 특수부대 출신 경호원들로 구성된 추적대가 폭풍우와 폭설이 몰아치는 영국의 황무지를 누빈다. 형편 없이 추락한 처지에서 보니, 돈의 노예가 되어 성공만을 추종할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다만, 절망에 빠지고 요양원에서 피해망상 때문에 주입된 다량의 약물 탓인지 가끔씩 착란에 빠지는 자신의 모습에 헨리 던바는 좌절을 겪는다. 오로지 자신의 딸들이 수십 년 동안 자신이 공들인 던바 트러스트를 인수하지 못하는 게 막는데 전력을 다한다. 플로렌스는 사랑으로 아버지를 쫓지만, 애비게일과 메건은 아버지를 다시 파멸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기 위해 추적한다. 이 얼마나 비극적인 진실이란 말인가.

 

양쪽 모두 충실한 조력자들을 거느리고 있다. 전자는 오랫동안 측근 변호사로 제국 건설에 일조한 윌슨과 그의 아들 크리스가 버티고 있다. 후자는 던바의 주치의이자, 두 딸의 노예 같은 존재 닥터 밥이다. 전자가 세상의 미덕을 대표하는 선수들이라면, 후자는 악덕의 화신이다. 닥터 밥은 두 딸이 요구하는 기괴한 성적 요구를 충족시키면서, 헨리 던바를 정신 이상으로 요양원에 가두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막대한 보너스와 상당한 양의 스톡옵션도 덤으로 얻었다. 문제는 던바 트러스트를 합병하려는 라이벌 유니컴에게도 정보를 흘려 양쪽을 배신했다는 점이다. 이런 악당에겐 신의나 양심 따위는 전혀 필요없다, 오로지 자신의 계좌에 찍히는 숫자만이 중요할 따름이다.

 

헨리 던바는 정신을 되찾은 뒤 플로렌스를 유산 상속에서 제외시키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점에 대해 사과하고, 자신에게 충실하게 봉사해온 윌슨을 해고한 사실에 대해 잘못을 인정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자신의 왕좌를 찾기 위해 도전에 나선다. 정신 병원을 탈출했을 때, 그를 유지해준 것이 분노와 복수심이었던 것처럼 애비게일과 메건을 응징할 차례다. 문제는 이제 간신히 화해한 플로렌스를 기다리고 있는 비극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극을 많이 접해 보지 못해 잘 모르겠지만, 이 대가는 희극보다 비극에서 더 진가를 발휘한다는 느낌이다. 왜 우리 인간들은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걸까? 나이가 여든이 되어서도 손에 든 것을 내려놓지 못하고 속세에 미련을 둔 헨리 던바의 모습이 어찌나 그렇게 쓸쓸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수십억 달라의 재산 그리고 40만 명이나 되는 직원을 거느렸던 권력자의 말년이 얼마나 초라하게 무너졌던가. 그들이 그렇게 원하지 않았던 추악한 권력 투쟁은 던바 가문을 그야말로 초토화시켜 버렸다. 그런데 그 원인제공자 역시 헨리 던바였다.

 

애비게일과 메건을 혹독하게 교육한다며, 계승 과정에서 제외시켰던 사건은 그대로 자신에게 화살이 되어 돌아왔다. 전 세계에 화려한 미디어 제국을 건설하면서 자신의 불륜을 합리화시켰고, 자녀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애비게일과 메건이 패륜적 악녀들로 거듭나게 된 것에 대해 그의 책임은 없었던가? 플로렌스의 진심을 몰라주고 자신이 건설한 제국에서 쫓아난 것도 결국 자신의 오판에 의한 것이었다. 그녀가 던바에게 돈을 요구했던가?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천박한 자본가의 모습이 얼마나 처연하게 보였는지 모르겠다. 셰익스피어가 500년 전에 구성한 영국식 막장드라마의 주제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게 다가온다.

 

<던바>의 말미에서 역자가 요약한 원작은 훨씬 더 큰 스케일의 비극으로 끝나지만, 천신만고 끝에 제국을 되찾는데 성공한 던바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개인적 비극과 직면하면서 끝을 맺는다.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은 어쩌면 그렇게 현대극에 걸맞는 상황에 <리어 왕>을 집어넣었는지 경탄할 지경이다. 정신 병원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한겨울의 쫓고 쫓기는 숨 막히는 추격전으로 독자의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기도 하고, 주인공 던바의 치명적 실수와 판단착오에 대한 회한으로 감성을 자극하기도 한다. 요 네스뵈의 <맥베스>에서도 그랬지만, 이 시리즈를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겨우 2편을 읽었지만, 셰익스피어 시리즈를 위해 호가스 관계자들이 선택한 작가들의 역량은 기대이상이었다. 다음 주자는 어떤 책으로 정할지 벌써부터 기대감에 즐겁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