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 - 아리엘 도르프만 회고록
아리엘 도르프만 지음, 한기욱.강미숙 옮김 / 창비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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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가의 책을 읽는 데는 순서가 필요한 법이다. 내 마음대로 정한 9월의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의 책을 읽으면서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급한 마음에 도르프만 문학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순서가 틀렸다. 그의 대표작인 <죽음과 소녀>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과 칠레혁명을 다룬 에세이집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부터 읽어야했다. 이런 순서였다면 나의 도르프만 읽기는 좀 더 수월했으리라. 작가의 자전적 회고록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는 지난여름 귄터 발라프 르포르타쥬의 발견만큼이나 독서의 성취감을 나에게 안겨 주었다.

 

유대인으로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하고 칠레를 사랑하게 된 혁명전사 블라디미로 도르프만의 일대기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그의 복잡다단한 정체성처럼 회고록은 두 개의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아옌데 정권으로 상징되는 칠레혁명을 붕괴시킨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테타 이후 망명길에 오르게 되는 아리엘 도르프만의 이야기와 조국에서 추방되다시피 쫓겨난 아돌포 도르프만의 아들이자 영어를 사용하는 양키 소년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는 에드워드 도르프만의 모습이 교차되면서 등장한다.

 

도르프만 가계의 뿌리는 저 멀리 러시아의 오데사에서부터 출발한다. 반유대주의의 광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도르프만의 조상들은 아르헨티나에 뿌리를 내린다. 아리엘의 어머니는 능수능란한 언어로 한 때 트로츠키를 위해 일하기도 했다고 한다. 공산주의자였던 아버지 아돌포는 아르헨티나에서 쫓겨나듯 벗어나 그링고들의 천국 뉴욕으로 향한다. 나어린 나, 아리엘은 에드워드란 이름의 양키 소년이 되기로 결심하고 스페인어를 버린다. 이런 정체성의 극심한 혼란은 어쩌면 3개국을 오가는 망명자로서의 삶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라는.

 

미국의 CIA가 과테말라 아르벤스 정권을 전복시킨 1954년, 매카시 광풍이 불던 미국에서 더 이상 뿌리를 내릴 수 없었던 도르프만 가족은 칠레로 향한다. 십 수 년 동안, 영어 노래를 듣고 제국주의 미국문화의 세례를 받은 소년 블라디미로는 거절했던 모국어를 되찾아야만 했다. 그리고 미래의 진짜 조국 칠레 인민들의 참혹한 현실을 깨닫고, 미국을 찬양하던 양키 소년에서 철저한 반미주의 전사이자 혁명가로 거듭나게 된다. 그가 칠레에 안착했던 1950년대는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있끄는 쿠바혁명 그리고 베트남 전쟁으로 억압받던 제3세계 인민들의 연대가 구체적 형태를 갖춰 가던 시기였다. 미국의 안마당으로 인식된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들이 식민화되고, 제국주의 악당 그링고들에게 착취당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풍족한 자원을 가지고 있지만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현실을 젊은이 특유의 신랄한 비판의식을 담아 짚어낸다.

 

한편, 아리엘-블라디미로-에드워드라는 각각의 이름이 상징하는 작가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도 자못 심각하게 다가온다. 라틴아메리카 출신이면서도 미국식 교육의 세례를 받아 준양키에 가까운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훗날 살바도르 아옌데 선거운동에 나선 저자의 발목을 잡는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탁월한 미국식 마케팅 방식을 선거전에 도입하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한다. 빈민 아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그들을 꾀기 위해 디즈니에서 제조하고 수출한 악질 자본가 스크루지 맥덕이 등장하는 단편만화들을 상영하기도 한다. 그가 이 에세이집에서 계속해서 강조하듯이, 라틴아메리카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모순들은 그야말로 무 자르듯 그렇게 단순화할 수만은 없는 그런 사회경제적 복잡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내내 잡종(hybrid)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그런 개념이라고 해야 할까.

 

피노체트 쿠데타 당시 그의 수많은 친구들과 동지들이 군부가 조직한 총살조에 의해 살해됐다는 사실에 대해 도르프만은 일종의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다. 쿠데타 당일, 친구 클라우디오 히메노와 근무를 바꾸지 않았다면 그리고 자신의 상관이었던 장관이 대통령과 함께 최후를 같이할 인사 리스트에서 그를 삭제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아리엘 도르프만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고 쓰고 있다. 쿠데타가 일어난 뒤에도 그는 자신이 그날 ‘우리의’ 대통령 아옌데와 죽었어야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치욕스러운 독재 치하를 견뎌내고, 대재앙의 목격자로서 사실을 기록해야 하는 더 큰 임무가 기다리고 있었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아내 안헬리카와 아들 로드리고를 지켜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임무도 엄연하게 존재했다. 선택의 순간에 그는 주저하지 않았고, 목숨을 보전하는데 성공했다.

 

삼십대 혁명전사로서 아리엘 도르프만의 악명은 주로 그가 저술한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서 비롯되었다. 노골적인 정치적 서사 대신 부지불식간에 아이들 사이에 전파되는 미국 문화 제국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칠레에서 수많은 분서 사태를 불러왔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이제 <도널드 덕>을 읽을 준비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더 공감이 가는 부분은 칠레혁명이 쿠데타로 실패하고 나서, 자신들의 편이 될 수도 있었던 수많은 돈 파트리시오 같은 인사들을 포용력을 가지고 품지 못했다는 점이다. 혁명세력이 흔히 범하는 오류를 도르프만들은 범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돈 파트리시오들이 극우 세력에게 달려가게 만들었다는 뼈저린 고백은 곱씹어 봐야할 문제다.

 

영어 상용자로서의 정체성은 두고두고 저자를 괴롭히는 이슈였다. 아르헨티나 대사관에 의탁해서 조국을 등지고 망명길에 오르는 과정에서 그의 고뇌는 그가 비판했던 <도널드 덕>의 나라를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역설적 상황이 수도 없이 펼쳐지리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묵시록적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 짧은 리뷰로 아리엘 도르프만의 사변적 고민들을 다 담을 수 없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살바도르 아옌데는 비겁하게 그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의 실수를 전가하지 않고 칠레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다. 1973년 9월 11일, 그가 자살했는지 아니면 군부의 총에 맞아 장렬하게 산화했는지에 대한 논의는 중요하지 않다. 저자가 쓴 대로 극한 상황에 내몰린 아옌데가 자살보다 민주주의의 적들과 싸우다 죽었다고 믿고 싶었다라는 말이 왜 그렇게 마음에 와 닿는지 모르겠다. 모든 순간의 선택이 생과 사를 결정하는 고뇌였던 시간을 다루면서, 동시에 이방인이었지만 진실로 칠레를 사랑했던 목격자의 시선이 이룬 문학적 성취는 기대 그 이상이었다. 올해의 발견으로 꼽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그런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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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9-27 1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반유대주의로 인해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게 된 유대인이 이로 인해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됩니다...

레삭매냐 2018-09-27 21:46   좋아요 1 | URL
바빌론 유수 이래 디아스포라는 유대인들의
숙명이 아닐까 싶네요.

고향을 떠난 방랑객이 되어 고유의 정체성
을 지키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현지적응이라
는 두 마리 토끼를 잡다 보니 반대급부로
다양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지 않았나 생
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