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질서의 지배자 마오쩌둥 푸른숲 비오스(Prun Soop Bios) 2
조너선 D. 스펜스 지음, 남경태 옮김 / 푸른숲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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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서구 학자 조너선 스펜스의 중국 역사 서술을 좋아한다. 국내에 소개된 저작들을 하나씩 차례로 읽고 있는 중이다. 서구인의 시선으로 본 중국 역사에 대한 호기심이라고나 할까? 아무래도 같은 동양인이 보는 것과는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중국 혁명의 아이콘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마오쩌둥에 대한 평전을 읽었다.

 

이미 프랑크 디쾨터가 저술한 중국혁명 삼부작 중 첫 번째 권과 에드거 스노우의 저작을 읽었고 그 외에도 다양한 저작들을 통해 중국 혁명에 대한 개관 정도는 익히 알고 있어 진도가 쉽게 나갔다. 청조 말엽 후난성에서 중농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마오쩌둥은 예전 같으면 왕조교체기라 불릴 만한 격변의 시대를 살아야했다. 예전 같으면 명나라에서 청나라로의 이행기였겠지만, 이번에는 성격이 좀 달랐다. 수천년 동안 맥을 이어온 전제군주정치 대신 쑨원이 이끄는 혁명세력에 의해 새로운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설 차례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교체는 쉽지 않았다. 위안스카이로 대변되는 막강한 군벌들이 쉽게 민주세력에게 기득권을 내주려 하지 않았다. 청년 시절 마오쩌둥은 혁명의 깃발을 보기 좋게 올렸다가 반동 세력에게 동지들이 참수당하는 허무한 결과를 목도하면서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조너선 스펜스는 책에서 마오쩌둥이 결코 지식인이었던 적이 없다고 적고 있다. 글을 읽고 쓸 줄은 알았지만, 기존의 사대부들처럼 과거를 위한 전문적인 지식을 쌓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다른 혁명 동지들처럼(저우언라이, 덩샤오핑) 해외로 나가 견문을 쌓지도 못했다. 대신 마오쩌둥은 후난성의 중심지 창사에서 중국 인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인민들의 참담한 일상을 보면서, 소련의 볼셰비키들이 교조로 받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노동자 중심의 혁명이 중국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간파해냈다.

 

1920년 중국공산당 창당 과정에서도 마오쩌둥이 한 일이 전혀 없다는 것도 훗날 그의 약점 중의 하나가 되기도 했다. 사실상 중국 공산당 창당의 주역은 천두슈와 리다자오 같은 이데올로그들이었다. 그들은 레닌 코민테른의 지시에 충실했다. 사실상 공산당의 자금줄은 러시아 레닌의 볼셰비키들이 도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전에 마오쩌둥은 고향을 떠나 스승이 재직 중인 베이징으로 가서 신문물을 접하기도 했는데 사서 보조원이라는 한직에 종사하기도 했다. 수도에서 딱히 할 일이 없었던 미래의 불세출의 공산주의 지도자는 낙향해서 서점을 내고, 지역 교육에 매진했다. 그의 꿈이 한 때는 기자와 교육자였다고 했던가.

 

제국주의 외침과 쑨원의 뒤를 이어 국부군의 지도자가 된 장제스와 대결은 두 개의 태양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전제와도 같은 투쟁의 시발점이었다. 코민테른은 공산당 창당 초기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공산당원들에게 국민당에 가입해서 통일전선 전술을 시행하라는 교시를 내린다. 이렇게 이루어진 1차 국공합작으로 장제스의 국민당은 중국을 통일하는데 성공한다. 어쩌면 이 때부터 장제스는 공산당을 정치 파트너가 아닌 숙명의 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토사구팽이라고 중원통일이라는 목적을 이루고 나자, 장제스는 다음의 적으로 중국을 침략한 일본이 아니라 공산당을 지목하고 토벌전에 나선다. 그렇게 국부군의 토벌을 피해 시작된 대장정은 중국 공산당에게 일대 기회가 되었다. 사실상 미국의 지원을 받는 국부군의 압도적인 군사력을 당해 내지 못해 중국 남부 도처에 산재해 있던 장시 소비에트, 루이진 소비에트 등으로부터 퇴출된 공산당들은 옌안에 새로운 거점을 만들고, 토굴 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중국 내부에서는 국부군과 공산당이 합작해서 외세(일본의 침략)에 대항해야 한다는 민족해방 이슈가 급부상 중이었다. 둥베이 군벌 출신 장쉐량이 일으킨 시안사건으로 억류된 장제스는 마침내 공산당과 손을 잡고 항일전에 나서게 된다. 이 사건이야말로 중국 혁명에서 결정적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한 내용은 에드가 스노우가 자신의 저작 <중국의 붉은 별>에서 자세히 다루지 않았던가. 일개 지방 공산당 지도자였던 마오쩌둥은 대장정 중에 있었던 쭌이회의에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게릴라전이 중국 혁명에 가장 알맞은 방식이라는 자신의 종래 주장을 관철시키고 마침내 권력의 중앙부에 진압하게 된다.

 

문제는 그전까지만 해도 나름 개혁적 성향을 가진 혁명가였지만, 옌안 시절을 거치면서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캉성이 이끄는 보안 조직은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 세력을 가차 없이 숙청했다. 소련에서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유학파들 역시 더 이상 마오쩌둥의 정적이 될 수 없었다. 십수년에 걸친 전란의 시대를 거치면서 중국 공산당은 비약적인 성장을 하는데 성공했고, 극동에 개입한 소련군은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면서 노획한 무기와 전략물자들을 홍군에게 전달했다. 무주공산이 된 만주 지역을 중국 공산당이 선점한 마오쩌둥의 결정은 그야말로 신의 한수였다. 이후의 사태는 모두가 알다시피 승승장구하는 홍군을 막지 못한 장제스 국부군의 참담한 타이완 패퇴였다.

 

그러나 중국 혁명의 영광은 여기까지였다. 마오쩌둥은 성공한 혁명가이긴 했지만, 통치에서는 실패한 정치가였다. 류사오치나 덩샤오핑, 팽더화이 같이 유능한 참모들을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그들을 이용한 개혁에는 실패했다. 독재군주의 자리에 오른 독재자는 일절의 비판과 반대를 허용하지 않았다. 1950년대 대약진운동과 1960년대 문화대혁명은 중국 역사에서 오점이었다. 농촌의 잉여를 도시노동자에게 제공해서 서방 세계를 따라 잡겠다는 마오쩌둥의 정책은 판타지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전쟁에 스탈린의 사주를 받아 개입하면서 세계 패권국가 미국을 상대로 대등하게 전쟁을 치른 자신감을 바탕으로, 소련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카피한 경제정책의 시행에 나선다. 문제는 혁명 시절과 달리 중국 인민들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가 구상한 인민공사의 효율성은 지극히 낮았고, 연달아 중국 대륙을 덮인 기근과 홍수로 농업생산성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서 중국 인민들은 대재앙을 맞게 되었다.

 

전제군주 시절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혁명가는 노회한 정치가가 되어, 오로지 권력투쟁에만 관심을 쏟았다. 자신에게 반기를 든 혁명 동지 펑더화이는 물론이고, 인민일보 편집장이었던 덩퉈는 물론이고 자신에게 충성했던 덩샤오핑도 예외는 아니었다. 해서파관과 조반유리라는 엉성한 이유로 홍위병들에 의한 친위쿠데타가 시작되면서, 중국 대륙은 문화대혁명이라는 광기 속으로 뛰어들게 된다. 이미 스탈린의 죽음으로 시작된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의 스탈린 격하운동은 주석 마오쩌둥에 대한 개인숭배에도 영향을 미친 모양이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마오숭배가 중국 인민들에게는 먹혀들지 몰라도 서구의 경제 문화 파트너들에게는 조롱거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공산주의 체제의 우월성 선전도 마찬가지다. 엄청난 수의 인민들이 기아로 죽고, 십대소년들로 구성된 홍위병들이 기존의 가치들과 질서를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폭력적인 현실을 서구인들이 어떻게 보았을까.

 

그나마 이성이 남아 있던 마오쩌둥은 자신의 후계자로 하방되어 있던 덩샤오핑을 중앙으로 복귀시키면서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한다. 혁명 지도자로서 그다지 모범적이지 않았던 사생활에 대해서는 조너선 스펜스 교수가 그다지 비중을 두지 않은 채 진행한 느낌이 들었다. 한편, 한국전쟁에서 미국과 국지전을 치르기도 했던 마오쩌둥은 데탕트를 맞이해서 미국과의 수교를 진행한다. 세계 정치무대에서 영원한 적도, 영원한 맹방도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일대 사건이었다. 노회한 혁명가를 방문한 닉슨과 키신저가 마오의 저작을 인용하며 최대한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우리 정치 지도자들은 닉슨과 키신저 같은 배포가 과연 있을까? 상대방이 가진 유일한 카드를 무조건 포기하고, 과거에 대해 사과하라는 압박이 최고의 방법이 아니라는 걸 정녕 모르고 있는 걸까.

 

<무질서의 지배자 마오쩌둥>을 읽는 동안, 조너선 스펜스 교수가 준비한 행간이 너무 넓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래도 중국 혁명이라는 거대한 물결에 중점을 맞추다 보니, 상세한 디테일은 제외하고 진행했다고 해야 할까. 미시적인 역사 서술에서도 상당한 실력을 발휘한 거장의 거시적 접근도 상대적으로 매력적이었다. 역사에 만약이란 존재하지 않지만, 마오쩌둥이 경제개발 정책을 수립하면서 치명적인 실패를 하지 않고 순탄한 경제발전을 이루고 문화대혁명 같이 중국의 발전을 한 세대 이상 역진시킨 어처구니없는 반동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중국은 또 다른 모습이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봐온 지도자의 모습과는 달리 어쩌면 마오쩌둥을 점점 닮아가는 새로운 지도자의 부상이 미래의 중국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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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9-16 2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품절이어서 다시 출간될 수도 있겠지만, 2003년의 책이라서 새로 출간되기 전에는 만나기 어려운 책이 될 수도 있겠네요.
레삭매냐님, 주말 잘 보내셨나요. 편안한 일요일 저녁시간 보내세요.^^

레삭매냐 2018-09-16 21:55   좋아요 1 | URL
주말 내내 비가 추적추적 내려 꿀꿀한
저녁이네요...

<무질서의 지배자>는 오래 전에 절판된
책이라 한동안 찾아 헤맸네요. 도서관에서
빌려다 볼 수도 있지만 왠지 소장각이라.

부담 없이 보기 좋은 개론서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