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겁하다. 사회적 변혁을 꿈꾸면서도 정작 행동에는 나서지 못하고 있다. 그저 책이나 읽고 독후 감상문이나 끼적일 뿐. 그런데 저 멀리 독일에는 나와는 달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불의에 맞서 현장에 잠입해서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편견과 모욕을 직접 취재한 르포 전문기자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바로 귄터 발라프였다.

 

1942년 10월 1일에 독일 라인 지방의 부르샤이트에서 태어난 귄터 발라프는 어려서부터 정당활동을 시작했고, 1974년 5월에는 그리스 여행을 하던 중에 군부독재에 항거해서 인권 문제에 대한 시위에 참여했다가 14개월 동안 그리스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그가 세계적인 저널리스트로 이름을 날리게 된 계기는 바로 그만의 독특한 잠입 취재 방식이었다. 이전에도 다양한 직종을 전전하면서 이주 노동자, 특히 터키 노동자들에 대한 인권 선진국이라는 독일 사회의 모순과 비리를 적나라하게 까발렸다. 그의 주요 타겟은 바로 신자유주의였다. 한국의 보수정당들은 2002년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 집권 아래 이루어진 노사정 대타협의 산물인 하르츠 개혁에 대해 그야말로 입이 마르도록 칭찬일색이지만, 실제로 독일에서 하르츠 타협의 결과 고용률이 상승했지만,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이 하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 마디로 고용의 안정성과 노동자들이 선호하는 일자리가 줄어 들었다는 점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귄터 발라프는 다년간의 연구를 통해 아마존 같은 세계적 차원의 공룡대기업들의 기록적인 성장 배경에는 심지어 독일에서도 저임금 노동자들의 눈물에 배어 있다는 주장이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독일에서도 하청 이슈는 이미 고질적인 문제가 되었고, 임금 덤핑, 노동자에 대한 철저한 감시 그리고 비정규직 양산의 문제는 이제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 일상화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1960년대에 탄광노동자로 잠입취재를 시작한 희대의 저널리스트 발라프는 1983년 터키 출신 이주 노동자 알리로 위장/변신해서 2년 6개월 동안 암행기자로 활동했다. 그야말로 사회 밑바닥에서 독일이 그렇게 자랑하는 노동법으로부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아우구스트-티센제철(ATH) 같은 세계적 대기업의 재재하청 회사의 인부로 일했다. EBS에 나온 그의 인터뷰를 보니, 단기간에 위장취업해서 취재를 하는 다른 기자들과는 달리 장기간에 걸친 프로젝트에 자신을 직접 투영한 것이다. 6주 정도가 지나면 자신의 새로운 아이덴티티에 적응하게 되는데, 순수 독일 사람으로 독일말을 제대로 못하는 터키 사람 행세하기는 쉬웠지만, 정작 터키 출신 동료들에게 터키 말을 하지 못하는 터키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그리스 피레우스에서 자라 그렇다고 둘러대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한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런 이주 노동자들을 착취함으로 발생하는 이익을 나도 모르게 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니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저 싸고 편리하다는 이유로 매일 같이 이용하는 대형할인매장, 패스트푸드점 그리고 알고 보니 노동자들을 악랄하게 착취해서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한 티센-크루프에서 설계하고 만든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을 오가는 나의 모습에, 주변의 열악한 환경에서 제대로 된 장구조차 갖추지 못한 채 상시적인 모요과 멸시 그리고 위험수당마저도 철저하게 빼앗기고 동냥처럼 임금을 받은 이주 노동자들의 고통과 눈물이 오버랩되는 게 아닌가 말이다.


 

나는 우연히 귄터 발라프라는 저널리스트를 알게 되었고, 국내에 나온 그의 책에 대해 알아 봤다. 세 권이 발표되었는데 아쉽게도 두 권은 이미 절판되었고 올해 또 한 권 그의 책이 나왔더라. 절판된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보잘것없이>를 구해서 읽고 있는데, 정말 다양한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알리는 가톨릭교회에서 사제들과 주교들에게 ‘비관료적인 방식’으로 세례를 요청하는데, 원수도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파해야 하는 이들이 하나같이 그를 달갑지 않게 받아들이는 장면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그래도 자신이 사는 곳에서 자그마치 100KM나 떨어진 곳에 있는 폴란드에서 이주한 신부가 알리의 요청을 들어주겠다는 나서는 장면에서는 여전히 신학과 종교가 사멸해 가고 있는 독일의 양심이 살아 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고나 할까.

 

대머리 발라프 아저씨는 진실/사실에 접근하는 자기 고유의 방식에 대해 우리에게 말한다. 내부의 진실을 알기 위해 자신을 가리는 행위, 다시 말해 마스킹(masking)이 어쩌면 하나의 표현 방식이라는 것이다. 한편, 신문이나 잡지 같은 기존 매체의 광고 수입과 판매부수가 줄어드는 가운데, 광고주의 영향력이 증가되면서 예전 같은 비평기사 쓰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도 예리하게 지적한다. 이미 한국에서도 막대한 광고집행 비용을 무기로 언론을 연성화시키는 전략이 지속적으로 시행되어 왔다는 사실을 최근 알게 되지 않았던가. 기업에 부역하는 언론종사자들에게 귄터 발라프 같은 암행기자야말로 정말 불편한 존재가 아닐까. 한국에서 귄터 발라프 같은 용기 있는 기자의 출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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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8-08-24 14: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에도 진짜 저널리스트를 소개해주시네요!
책이 품절이라 동네 도서관사이트 검색했더니 다행히도 한곳에 있더라구요.
그리고 심지어 누가 대출중으로 읽고 있다니!!! 일단 예약해놓았습니다. ^^
권터 빌라프.. 저도 기억해두려구요!

레삭매냐 2018-08-24 14:29   좋아요 1 | URL
저도 우연히 알게 된 작가인데 다행히
중고책으로 구할 수가 있었네요.

EBS 다큐와 기타 영상 자료로 접하고
나서 책을 읽으니 더 와 닿더라구요.

단기 취재가 아닌 자그마치 2년 6개월
동안 진짜 터키 이주 노동자들과 같이
동고동락하면서 몸소 체험한 글을 발표
했다는 시도가 정말 대단합니다.

십수년 전에 뮌헨에 갔을 적에 밤거리
를 누비다가 터키 사람들로 보이는 이들
과 마주했던 기억이 나네요. 형제의 나라
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참 씁쓸합니다.

더 오래 전에 친하게 알고 지내던 터키
친구 마무트 생각도 나네요. 잘 살고 있을지.

세상틈에 2018-08-25 04: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권터 발라프 같은 용기를 가질 수는 없어도 <어느 독일인의 삶>의 브룬힐데 폼젤 같은 사람이 되지는 않기를 다짐해 봅니다.

레삭매냐 2018-08-25 09:19   좋아요 1 | URL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입니다.

폼젤처럼은 되지 말아야죠 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