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 블루 컬렉션
장 에슈노즈 지음, 이재룡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뜻하지 않던 문화상품권이 넉넉하게 생겼다, 그래서 바로 중고서점에 달려가 세 권의 책들을 집어왔다. 그 중의 한 권이 바로 공쿠르 상에 빛나는 미니멀리스트 작가 장 에슈노즈의 <달리기>였다. 열린책들에서 나온 블루 시리즈라고 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그전에 나온 표지가 더 마음에 들었다. 결국 올디 벗 구디(olide but goodie란 말인가.

 

 

프랑스에서 한 자락하는 작가라고 하는데 나로서는 생소한 작가다. 역시나 세상은 넓고 읽을 책들은 하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장 에슈노즈는 소설 <달리기>의 주인공 ‘인간 기관차’ 에밀 자토펙의 일대기를 쓰려고 한 걸까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나도 그의 이름을 어느 올림픽 육상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선가 슬쩍 본 적이 있었다. 핀란드의 국민영웅 파보 누르미에 뒤를 이어 육상 중장거리에서 한 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을 보유자였다는 점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작가가 소개하는 자토펙의 이야기는 보다 흥미진진하게 다가왔다.

 

1922년생 체코슬로바키아 모라비아 출신이었던 소년 에밀은 원래 화학자가 꿈이었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사정 때문에 십대에 이미 공장에 취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즐린이라는 곳에서 신발을 만드는 바타 공장에서 일하게 된 에밀은 원래 스포츠에 관심이 없었지만, 어느 날 달리기에 취미를 붙이기 시작한다. 참, 소설의 시작은 체코에 진주한 독일군에 대한 묘사로 시작된다. 어느 시절에 점령군이 원주민들의 호감을 산 적이 있었던가. 독일계 주민이 다수 사는 주데텐란트 병합과 체코 합병은 차원이 달랐다. 참고로 2차 세계대전 동안 공업이 발달한 체코는 나치 독일의 병기공장으로 작동했다.

 

연합군의 압도적인 공격 앞에 무너져 내려가던 독일군은 체코를 쉽게 포기하지 못하고, 단발마적인 저항을 계속한다. 독일군을 추격하는 소련군을 돕기 위해 무엇이라도 하겠다는 일념으로 삽을 들고 나선 청년 에밀의 모습에서 훗날 프라하의 봄에 이제는 해방군에서 점령군으로 변한 소련군에 저항하던 위대한 스포츠 영웅의 면모가 드러나기도 했다. 역시 사람은 변하지 않는 법. 전쟁 말기, 징병된 에밀은 장교로 임관되어 자신의 주특기인 달리기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국은 미래의 국민적 영웅에게 제대로 된 유니폼은 물론이고, 국제대회에 출전하기 위한 차편도 제대로 마련해 주지 못한다. 요즘 같으면 트레이너며, 코치 그리고 컨디션 조절을 위한 담당 요리사까지 딸려서 그야말로 국가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을 텐데 전후 체코에는 그럴 겨를이 없었나 보다. 그럼에도 에밀 자토펙은 국내 대회를 비롯해서 국제대회 특히 1948년 런던올림픽과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자신의 진가를 드러낸다.

 

중장거리를 달리기 위해서는 특히나 체력 조절과 효과적인 신체 기관의 활동을 최소화하는 달리기 방식을 통한 훈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 당시 전문가들의 견해였다. 하지만 에밀 자토펙 아저씨는 그런 전문가들의 견해를 비웃으면서 자신만의 스타일로 세계 육상계를 제패하는데 성공했다.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손발을 제멋대로 움직이는 기괴한 스타일을 처음 본 이들은 어디 모라비아 시골구석에서 올라온 선수의 촌극인가 싶었겠지만, 체코의 국민영웅은 그런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세계를 놀라게 만드는데 성공했다. 특히 지금까지도 마라톤 종목 우승자가 다른 육상 경기에서 우승한 기록은 없다고 하는데, 에밀 자토펙은 헬싱키 올림픽에서 마라톤과 5000m 그리고 10,000m에서 연달아 우승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참고로 그의 투창선수 아내 다나도 같은 올림픽에서 우승을 하면서 올림픽 역사상 부부가 한 대회에서 우승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한편 그의 빛나는 모습 뒤에는 그림자도 존재했다. 체코 공산당 간부들은 그들의 국민적 영웅 자토펙이 행여나 서방으로 망명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1950년대는 냉전이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수많은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의 인재들의 서방 이탈이 이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스운 체제경쟁이 이루어지던 가운데, 체코의 위대한 스포츠 영웅이 혹시라도 서방 망명을 하지 않을까 싶어 체코 정보부는 에밀 자토펙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지원은 해주지 못할망정, 불의에 앞서 싸운 조국의 영웅에게 조국이 해준 고작 사찰이라니. 하긴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개봉한 영화 <공작>의 흑금성 박채서 씨도 비슷한 대접을 받지 않았던가. 서방 언론과의 인터뷰를 갖은 핑계를 대면서 막으려는 체코 정보부의 공작은 귀여울 정도의 수준이었다. 물론 기레기라는 말을 들어도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에밀의 말을 왜곡해서 자극적인 방식으로 전달하는 서방 언론도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들 덕분에 에밀의 프랑스와 브라질 비자 신청이 거부되지 않았던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언론 왜곡을 장 에슈노즈는 유머스럽게 꼬집는다.

 

개인적으로 진정한 영웅 에밀 자토펙의 진가는 그가 정상에서 기량이 쇠퇴하여 은퇴한 뒤에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멜버른 올림픽 마라톤이 열리기 2주 전에 탈장 수술을 하고 최악의 컨디션으로 출전해서 6위에 그친 모습, 후진 양성을 위해 기꺼이 연습 상대가 되어 주는 모습 그리고 마지막 1968년 체코의 국경에서 대기하던 50만 바르샤바 조약군이 프라하에 기갑부대를 앞세워 진주했을 당시 소신발언을 했다가 모든 명예를 박탈당하고 우라늄 광산에 끌려가 고초를 겪어야 했던 점은 에밀 자토펙이 과연 무엇을 위해 달렸는가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보게 만들어 주었다. 자유를 외치며 거리에 나선 체코 민중들을 공수부대와 탱크를 동원해서 무자비하게 진압한 공산주의 독재자들의 편에서 자신의 안위를 구가할 수도 있었겠지만 에밀 자토펙은 청년 시절에도 그랬던 것처럼 절대 불의의 편에 서지 않았다. 그가 선이라고 믿었던 소련군이 불의의 동조자로 바뀌자 가차 없이 자신들을 나치 독일에게서 해방시켜 준 소련군에 저항했다.

 

사람들은 올림픽에서 정치를 배제시켜야 한다고 노래를 부르지만, 사실상 올림픽만큼 스포츠를 가장한 정치적 행사가 또 있을까 싶다. 치열한 경쟁으로 순위를 매기고, 다시 그렇게 획득한 메달 색깔로 순위를 매기는 시스템으로 우리 조국이 다른 나라보다 낫다는 선정의 장이 올림픽의 진짜 모습이 아니었던가. 어쩌면 에밀 자토펙도 순수하게 달리고 이기고 싶다는 마음으로 올림픽과 각종 국제경기에 참가해서 세계신기록을 작성하고 우수한 성적을 냈겠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정치적 프로파간다의 일원이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프랑스 출신 작가 장 에슈노즈도 그런 점을 파악하고, 달리는 인간 기관차 에밀 자토펙의 일대기를 소설화한게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미니멀리즘을 강조하는 작가답게 장 에슈노즈의 <달리기>는 내 취향에 맞으면서도 다양한 사유들을 하게 해주는 그런 작품이었다. 갑자기 에슈노즈의 다른 작품들이 더 읽어 보고 싶어졌다. 문제는 거의 다 절판되어 구할 수가 없다는 게 맹점이다. 천상 도서관을 이용해야지 싶다. 이런 책은 그야말로 연필로 밑줄 좍좍 그어 가면서 읽어야 제 맛인데 말이다. 고게 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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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8-16 1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필로 밑줄 좍좍~너무 좋아요 표현이 살아있어요 홍홍

레삭매냐 2018-08-16 11:05   좋아요 1 | URL
아마 이래서 책은 사서 읽어야 하는게
아닌가 스스로 위로한답니다 :>

카알벨루치 2018-08-16 11:06   좋아요 1 | URL
작가들은 책쓴다고 얼마나 고생했을까요 ㅎ금전적인 여유가 되면 다 사주고 싶다는 ㅎ

카알벨루치 2018-08-16 11:41   좋아요 1 | URL
근데 무선제본은 읽기가 훨씬 편한가요? 양장보다?

레삭매냐 2018-08-16 11:46   좋아요 1 | URL
전 무조건 양장팬이라 양장을 샀겠지만
무선은 초이스가 없으니...

뭐 원체 페이지 수가 적어서 아주 부담
이 없더라구요(본문 146쪽).

카알벨루치 2018-08-16 12:00   좋아요 1 | URL
책은 무조건 양장!!!!

목나무 2018-08-16 1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취향에 맞는 작품이라 하시니 저도 우선 찜부터...ㅎㅎㅎ
절판된 책들 꼭 구하시길 바랄게요! :)

레삭매냐 2018-08-16 11:47   좋아요 1 | URL
분량이 적어서 날로 먹은 느낌입니다 :>

다른 책들은 오늘 도서관으로 빌리러
가려구요. 그놈의 공쿠르 상 수상작도
재밌을 지 궁금하네요.

뒷북소녀 2018-08-16 1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다른 표지로 읽었었는데 또 리커버 됐네요^^

레삭매냐 2018-08-16 11:48   좋아요 1 | URL
그리고 보니 표지가 자그마치 세 종류
나 되는 것 같아요.

자토펙 아저씨가 나오는 것 하나
신발짝 그림 하나 그리고 이번에 무선
제본으로 나온 것.

아주 열책에서 징하게 우려 드시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