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L
로맹 가리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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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내가 가지고 있는 로맹 가리의 책이 몇 권이지? 서가에서 속속 튀어 나오는 로맹 가리의 책에 놀라고 있는 중이다. 사실 지지난주엔가 중고서점에서 산 <별을 먹는 사람들>도 서가에 찾아 보니 있더라. 어제 <하늘의 뿌리>도 찾았고, 지난 이틀 동안 부지런히 읽은 <레이디 L>도 5년 전에 이미 샀더라. 앞으로 중고서점에서 책을 살 적에는 좀 알아 보고 사야할 것 같다.

 

<레이디 L>은 로맹 가리 전작읽기의 7번째 책으로, 그동안 내가 읽은 저자의 책 중의 최고의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뭐 그야말로 책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나이 여든의 레이디 디안은 영국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그야말로 훌륭한 숙녀로 작고한 남편은 물론이고 증손자까지 본 무엇 하나 부러울 게 없는 여성이다. 아니 그런데 소설의 어디선가 테러리스트라는 말이 불쑥 튀어 나온다. 테러리스트라니...

 

레이디는 자신을 숭배하는 계관시인 퍼시 로다이너 경에게 자신이 지난 60년 동안 고이 숨겨 왔던 정말 충격적인 비밀을 털어 놓기 시작한다. 크레시 전투 이래 고귀하게 이어져온 마드무아젤 드 부아제리니에 혹은 고귀한 혈통의 카모엥 백작 부인이 아니라 파리의 아나키스트 아버지를 둔 평민 출신이었다는 사실이 하나씩 드러난다. 우리의 레이디는 심지어 남자들에게 쾌락을 안겨 주는 직업도 한 때 가졌었다. 그렇다면 혁명의 시절이었던 19세기말 레이디는 어떤 성공의 사다리를 타고 모두의 추앙을 받는 대공 부인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던가. 로맹 가리는 미스터리적 구성으로 레이디의 과거에 대한 독자의 호기심을 유발하는데 성공한다.

 

자, 이제 레이디의 인생을 극적으로 바뀌게 만들 또 하나의 신화적 인물이 소환된다.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인 아르망 드니가 등장한다. 이 남자는 뼈속 깊숙한 아나키스트로 테러로 일찍이 에릭 홉스봄이 주창한 이중혁명(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으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고 인민을 착취하게 된 부르주아지와 권력층을 암살하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겠노라는 야심찬 이데올로그다. 그를 돕는 두 명의 선수들이 더 있는데, 파리 홍등가의 유명한 깡패 르쾨르와 목이 부러진 기수 사퍼다. 혁명가에게는 언제나 조력자들이 필요한 법이지. 오래전 대학 시절, 원서강독 시간에 접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인 프루동이니 생시몽 같은 이름들이 떠올랐다.

 

폭력적 방식으로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바꿔 보겠다는 공상에 가까운 발상들은 유사 이래 존재해 오지 않았던가. 최근 잇달아 영화화되어 관객을 찾고 있는 우리의 암울했던 식민지 시절의 이야기들은 또 어떤가. 암살이나 폭탄 테러 같은 활동으로 점철되어 있지 않았던가. 물론 그에 맞서 식민제국주의자들도 보다 폭압적인 방식으로 피지배계급들을 억눌렀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혁명적 아나키스트들의 자금 조달 방식은 우리의 주인공 아네트 부댕을 고귀한 귀부인으로 탈바꿈시켜(18개월 간의 가혹한 훈련을 통해) 귀족 나으리들의 부를 탈취하는 방식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홀딱 반한 오십 줄의 디키 글렌데일의 등장 또한 예사롭지 않다.

 


영국 귀족가문 출신의 쾌락주의자이자 태생적 이단아 글렌데일은 집시 여인과 결혼하기도 하고, 당시 대영제국을 지배하던 빅토리아 여왕의 마음에 들자 않을 법한 짓들만 골라하면서 눈총을 산다. 이런 남자가 젊고 매력적인 카모엥 부인의 후원자가 되야, 소설의 전개가 멋지게 굴러가지 않겠는가. 개인적으로 보았을 때는 인민의 자유를 위해 싸운다는 열렬 아나키스트가 여성을 도구로 이용해서, 부유한 유한계급으로부터 활동자금을 마련하는 장면은 그들이 그렇게 목놓아 외치는 대의에 적합한 방식인지에 대해 묻게 된다. 스위스 경찰에 추격을 받는 그들을 구하기 위해, 글렌데인에게 도움을 요청한 아네트의 후의로 아나키스트 일행은 무사히 국경을 넘는데 성공한다. 글렌데일의 전용열차 칸에서 벌이는 아르망과 디키의 아나키즘의 이상주의에 대한 대화야말로 어쩌면 이 소설의 핵심이 아닐까 싶다. 역사 교과서에서나 볼 법한 대화를 중년의 쾌락주의자와 젊고 전투적 이상주의자 이데올로그 간의 치열한 대화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소설을 읽는 재미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노회한 글렌데일 공은 미몽에 빠진 아네트/레이디에게 끊임없이 현실감각을 갖추라는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허구헌 날 “끝까지 가야 한다”라는 주장을 입에 달고 살면서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아나키스트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아네트가 진정한 아나키즘의 세례를 받았다면, 그녀에게 포주 같은 존재인 아르망의 집착과 착취에 폭탄을 던져야 한다는 고언을 전달하기도 한다. 기묘한 궤변같기도 하지만, 글렌데일의 논리에 빠져 드는 느낌을 독자는 지울 수가 없다. 과연 우리의 아네트 양은 스승을 능가하는 제자가 될 것인가.

 

레이디의 놀라운 과거를 듣는 역이 배당된 계관시인 퍼시 경의 반응도 아주 경이롭다. 레이디가 자신이 그동안 스캔들을 두려워 하며 꼭꼭 숨겨온 비밀을 털어 놓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소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계관시인의 감정에 동조된 자신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로맹 가리가 준비한 한 방은 무엇을 기대하든 그 이상이었다. 아, 이래서 작고한 드골 대통령도 이 책을 로맹 가리 최고의 작품으로 꼽았던가.

 

슬픈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꿈꾼 혁명의 이상이 이루어진 적이 있었던가. 그 추운 겨울 수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촛불혁명의 후광이 우리 사회에 공고하게 구축된 기득권층과 언론의 연합 그리고 적폐세력의 격렬한 반격으로 한 발짝 씩 후퇴하는 모습을 보며 한 때 아르망과 아네트/레이디 그리고 수많은 아나키스트들이 자신들의 소중한 목숨을 바쳐 가며 싸웠던 인류(humanite)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정신에 대해 되돌아 보게 만든다. 지금까지 읽은 7권의 로맹 가리 책 중에 가히 최고의 책이다.

 


[뱀다뤼] 이 소설은 정말 오래 전에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소피아 로렌, 폴 뉴먼 그리고 데이빗 니븐이 주연으로 나온다나.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1965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감독은 무려 피터 유스니노프. 한 번 구해서 보고 싶네. 소피아 로렌은 올해로 연세가 83세라고 한다. 언제까지나 나에게는 영화 <해바라기>의 주인공으로 기억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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