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평선
사쿠라기 시노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4년 전, 소설리스트를 통해 <호텔 로열>의 작가 사쿠라기 시노를 알게 됐다. 이제 소설리스트는 가고, 사쿠라기 시노는 남았다. 그동안 작가의 다른 책들도 볼 기회가 있었겠지만 그렇게 강렬한 인상을 주지 못한 것 같다. 나의 블로그 독후감 기록장에서 그 시절 내가 쓴 리뷰를 찾아봤다. 관능소설 작가라... 작가의 부친이 직접 <호텔 로열>이라는 상호의 숙박업소를 운영하셨다고.

 

점점 쇠락해 가는 지방 홋카이도의 구시로를 배경으로 한 소설들을 꾸준하게 발표하고 있다는 사쿠라기 시노 작가의 문학적 시원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첫 소설집 <빙평선>에는 모두 6개의 단편들이 실려 있다. 첫 번째 작품, <설충>에서는 도회로 부나방처럼 성공을 쫓아 나갔다가 가진 것을 모두 탕진하고 귀농해서 낙농업에 전념하고 있는 남자 다쓰로와 그의 불륜상대 시키코 그리고 필리핀에서 인신매매에 가까운 방식으로 시집온 마리가 차례로 등장한다. 가업인 젖소를 키우기 위해서는 남자가 절대로 필요하다는 생각에, 다쓰로에게 반강제로 외국인 신붓감을 안겨주는 그의 부모들의 심정이 어땠을까. 다쓰로가 도시에서 실패하지 않았다면 과연 고향으로 돌아왔을까? 옛친구 시키코와 사일로에서 밀회를 가지며 자신의 욕정을 채우는 파렴치해 보이는 다쓰로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문득 일본의 농촌도 우리네 사정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그런 생각이 불쑥 들었다. 선대의 유지를 받들어야 하는 부모 세대의 모습과 자신들의 자식만큼은 도시에 나가 보란듯이 성공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들의 충돌이라고나 할까.

 

다음 작품 <안개 고치>에는 오랫동안 스승의 밑에서 도제 생활을 해온 마키 씨가 스승에게 독립을 인정받고 어엿한 바느질쟁이로 거듭나게 되는 과정이 담겨 있다. 어쩔 수 없니 김숨 작가의 <바느질하는 여자>가 바로 연상됐다. 김숨 작가가 긴 호흡으로 진짜 장편을 구사해냈다면, 사쿠라기 시노는 조금 빠른 템포로 달려간다. 지난주에 이른 여름휴가로 강릉 동양자수박물관에 갔었는데 전시실을 안내해 주시는 분에게 소설에 등장하는 시침질과 겹봉 같은 바느질 용어에 대해 질문을 하기도 했다. 역시나 책의 위력이란! 하나의 어엿한 직인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스케치해낸 작가의 저력을 엿볼 수 있었다. 동시에 우리나라에서는 엿볼 수 있는 장인-도제 시스템이 조금은 신기하기도 했다.

 

시골로 시집온 도쿄 며느리는 가부장 시스템의 영속을 위해 아들을 낳아 주기를 바라는 시어머니의 성화에 시달려야 하고, 옆집 숟가락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는 이웃들이 넘실대는 시골에서의 삶으로부터 탈출을 꿈꾼다. 젊고 변죽 좋은 초등학교 교사와 불장난으로 실화에 이를 뻔하기도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빗겨 나가는 균형감을 보여주기도 한다. 결국 주인공 교코는 딸아이를 데리고 지긋지긋해 보이는 시집을 떠나게 되는데, 결국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살아야 하는 게 정답이라는 걸 강조하고 싶었던 것일까. 문득 내가 얽매여 있는 일상이 얼마나 공고하고 루틴을 깨는 게 쉽지 않은지 다시 한 번 깨닫기도 했다.

 

이른바 관능소설 작가로서 사쿠라기 시노의 실력은 <바다로 돌아가다>에서 폭발한다. 이제 막 지난 10년간의 엄격한 도제 생활을 마치고 이발사로 독립한 게이스케는 25살이다. 혹독한 홋카이도의 계절들이 차례로 바뀌면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 자영업자는 스승이 물려 준 손님과 새로운 손님들에 대한 걱정으로 이만저만이 아니다. 조실부모하고 오로지 이발 기술 하나로 세상에 맞서온 청년 앞에 어느 날 기네코라는 이름처럼 비단결 같고, 매혹적인 팜므 파탈이 등장한다. 옷차림하며 범상치 않은 외모로 그저 오가는 평범한 손님인지 아니면 미래의 연인인지 모를 그런 위치가 주는 긴장감 속으로 독자는 내몰린다. 아니 이렇게 격정적일 수가 있을까 싶다. 그래서 더더욱 고혹적이었을까? 게이스케 청년과 팜므 파탈 기네코의 격정적 아니 관능적 로맨스는 기정사실이 되어 버렸다.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안타까움이 솟아오른다고나 할까. 그런 애증의 쌍곡선은 맨 마지막에 배치된 표제작 <빙평선>에서 그야말로 바다 위로 솟구치는 범고래의 점프처럼 튀어 오른다.

 

아 그전에 5번째 <물의 관>이 있었지. 이제 병치료도 서비스업이 된 지 오래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매끄러운 실력으로 과잉진료로 서슴지 않고 권하는 니시데 원장과 그의 도제(?)이자 애인인 료코의 관계로부터 소설은 출발한다. 15살 연상이라는 나이차도, 특별수당이라는 주변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둘의 욕망은 사위를 가리자 않고 분출한다. 하지만 료코는 자신이 관계를 중단하지 않으면, 이도저도 아닌 관계가 지속되리라는 것을 깨닫고 시골 치과의사가 필요하다는 공문을 보고 과감하게 니시데와의 관계를 정리한다. 한적한 시골에서 비로소 독립적인 판단을 하는 전문의로 거듭나게 된 료코는 여전히 니시데를 그리워한다. 그리고 어느날 자신을 찾아온 니시데, 병색이 완연하다는 점 말고는 별 다른 이야기 없이 떠난 그가 얼마 뒤 뇌경색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치과의사에게 치명적인 반신불수 증상을 그는 감당할 수 없었다. 게다가 니시데의 장끼인 과잉진료가 이슈가 되면서 잘 나가던 그의 클리닉은 파산으로 내몰린다. 이에 구원투수로 나선 료코가 옛 연인을 건사하기에 이른다. 뭐랄까 글로 표현하기에는 오묘한 그런 맛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고나 할까. 더 나가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지은 점도 마음에 들었다. 그 뒤에 그들이 잘 먹고 잘 살았는지 아니면 새로운 파국에 직면하게 되었는지는 사실 중요한 게 아니니까.

 

긴 여정을 거쳐 마지막 표제작인 <빙평선>에 도달했다. 기본적으로 <빙평선>은 어부 출신 아버지로부터 막말에 가까운 학대를 받으며 성장해서 자력으로 도쿄대와 재무성을 거친 엘리트 도고 세이치로와 마을 사람들에게 변소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천대를 받은 도모에의 러브 스토리다. 세이치로 아버지의 학대는 아들 성공의 원동력이었다. 아버지와 격하게 한판 붙은 날, 세이치로는 5천엔을 들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가 도모에를 찾아 가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어지는 역시나 격정적 러브 씬. 사쿠라기 작가 양반은 역시나 관능소설 작가다운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리고 성공해서 고향으로 돌아온 세이치로는 다시 도모에를 찾는다. 둘에게 행복한 시간들이 펼쳐졌을까 과연? 아마 아닐 것이다. 편견에 사로잡힌 주변의 시선과 연이어 벌어진 방화사건은 관계의 파국의 전조처럼 슬며시 다가온다. 엔딩으로 치닫는 가운데, 빙평선 너머 바닷가 위를 위태롭게 걷는 두 남녀의 모습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홋카이도 구시로를 배경으로 해서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는 사쿠라기 시노 작가의 글을 보다 보니 문득 태화강이 흐르는 울산을 배경으로 지역색 강한 작품을 발표하는 우리나라의 정정화 작가 생각이 났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야말로 세계적인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나오키상 수상 작가라는 아우라가 있긴 하겠지만, 과연 어느 작가가 첫 작품에서부터 이런 애잔한 에로티시즘을 구사할 수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거침없고 대범한 에로티시즘을 마치 무슨 공깃돌 놀리듯 관계의 핵심에 배치하고 애증의 서사를 풀어나가는 사쿠라기 시노 작가의 실력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참으로 농밀한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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