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과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4월
평점 :
품절


작가의 이름을 보고 남자로 생각했다. 나의 첫 번째 착각이었다. 킬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이라는 말에 혹해 책을 펼쳐 들었는데 65세 할머니가 주인공 킬러란다. 놀라운 솜씨로 표적을 거침없이 제거하는 킬러 주인공은 남자일 거라고 추측했는데, 두 번째 착각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런 소설 <파과>의 이런 파격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한국소설에서 킬러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장르 문학이 아주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는 반증일까? 그래서인지 ‘설거지’하고 ‘방역’하는 킬러가 등장하는 소설을 좋아한다. 그런데 왜 하나 같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킬러들은 완벽할 수밖에 없는 걸까. 어리석은 질문일까? 표적을 제거하는 임무를 띤 킬러가 자꾸만 실패한다면 누가 다른 일을 그에게 맡기겠는가. 업무의 영속을 위해 킬러는 절대 임무에 실패하면 안 된다는 구조적 필연성을 가진다. 다음 질문은 그렇게 방역업자들에게 일거리가 많단 말인가? 조각 할머니 일인 에이전시로 시작한 방역사업은 고객을 위한 옵션 사업까지 전개할 정도로 규모의 경제를 지향한다. 온 세상을 들썩이는 창조경제가 방역사업에도 적용된 모양이다.

 

우리의 조각 할머니는 굳이 일거리가 되지 않더라도 전철에서 임부에게 막말을 내지르는 노인 같이 않은 노인을 응징한다. 그렇게 공공장소에서 큰소리내는 치들에게 아무 말 하지 못하는 소시민의 울분을 대신해 주다니 통쾌할 따름이다. 요즘에는 노인축에도 끼지 못하는 나이지만, 역시 현직 방역업을 하기에 기력이 부족함을 느끼는 조각 씨는 자기관리에도 철저하다. 에이전시에서 마주친 자기 나이 반 토막밖에 안되는 투우라는 젊은 방역업자의 대거리가 목엣 가시 같지만 45년을 현역에 종사한 베테랑답게 가볍게 무시하는 센스도 빠뜨리지 않는다.

 

유기견 무용과 단란한 시절을 보내던 조각 씨의 삶에 균열이 발생한 건 한 달 전의 방역작업의 소산이다. 누가 들으면 웃을 지도 모르겠지만, 나름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조각 씨의 약점은 자신의 상처를 타인에게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어쩌랴 그 약점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노화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을. 이 시점에서 구병모 작가가 기술하는 주인공 조각 씨의 다채로운 감정선은 혁신과 통섭 그리고 생산성의 극대화라는 전투용어가 빗발치는 우리네 밥벌이의 현장과 그대로 맞아 떨어진다. 독자는 킬러의 삶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삶의 진실 앞에 그저 놀랄 뿐이다.

 

냉장고 속 시취를 풍기며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잃어버린 으깨진 과일[破果]처럼 주인공 조각 역시 세월을 빗겨 나갈 수 없다. 구병모 작가는 씨줄과 날줄처럼 어떻게 조각이 뛰어난 방역업자가 되었는지 그녀의 과거와 현실을 오롯하게 엮어낸다. 프로페셔널한 해충 혹은 쥐를 깔끔하게 박멸하는 방역업자지만 풍진세상을 살다 보면 별일을 다 겪기 마련이 아닌가. 하물며 우리네 같은 보통 사람도 그럴진대, 45년을 전문 방역업자로 살아온 조각의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모든 사건 사고의 균열은 예상하지 못한 작은 곳에서부터 시작되기 마련이다. 최근 구제작업 도중 방심 때문에 큰 부상을 입은 조각은 에이전시와 줄을 닿은 병원에서 아내를 잃고 홀로 딸을 키우는 페이닥터 강 박사의 도움을 받으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구원(舊怨) 때문에 복수의 전의를 불태우는 신예 킬러까지 등장하니 독자로서는 드디어 고대해 마지 않던 액션 활극이 펼쳐진다는 흥분감에 아드레날린 증폭을 경험하기에 이른다.

 

나는 소설 <파과>의 전개를 읽으면서 어떻게 해서 냉혈한 킬러 조각이 파지를 줍는 노인을 돕다가 자신의 표적 제거에 실패하고, 점점 더 인간적인 모습을 지닌 사람으로 변하게 되는가 하는 점에 독서의 방점을 두었다. 45년이라는 시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러저러한 사연을 가진 이들을 제거하던 킬러마저도 변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걸까? 이 세상 모든 것은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불변의 진리를 깨닫게 된 킬러의 진혼곡처럼 <파과>는 그렇게 나에게 다가왔다. 자신이 어느 날 죽게 된다면, 그동안 함께 해온 무용에게 위해가 닥칠 것을 염려하는 그녀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인간적일 수밖에 없다. 마지막 대결을 앞두고 주변 정리를 하고 집을 나서는 조각의 모습에서 비장미의 절정을 읽는다.

 

남자 작가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도저히 묘사할 수 없을 자신의 이름이 유래된 손톱 소제를 위해 네일샵을 찾는 것으로 작품은 그렇게 마무리된다. 지상의 찬란한 어둠 속에서 이런 소재로 소설을 썼다는 점도 놀랍지만, 이 모든 것의 시발이 냉장고 청소를 하다 만난 으깨진 과일에서 비롯되었다는 점도 기상천외하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결말은 창대하였다는 말만큼 이 소설을 정확하게 설명해주는 표현도 없지 않을까 싶다. 어둠 속에서 일하는 방역업자 역시 감정노동에 시달리고, 의뢰인의 갖가지 사연 때문에 고민하게 된다는 설정 역시 내게는 인상적이었다. 결국은 그렇게 우리 삶의 총합은 인간의 정(情)에 도달하게 된다는 말인가.

 

진중하면서도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캐릭터 묘사가 일품이라고 생각한다. 긴장감을 포착하는 감정선의 신속한 전개도 마음에 들었다. 문제는 마지막 대결에서 조각의 실력이 너무 돋보이는 설정이다. 65세의 노구를 이끌고 5+1의 업자들을 권총과 벅나이프로 제압하는 장면은 판타지 영화에서나 가능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미래의 관객에서 보너스를 미리 지급한 게 아닐까. 수많은 짐작과 예측을 뒤로 하고 그저 죽음을 불사하고 마지막 결투를 앞둔 대모가 부른 백조의 노래라면 생각하면 모두가 행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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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9 16: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19 17: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onnight 2018-04-21 2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처음 들어보는 작가와 책인데 심지어 개정판이네요. 궁금해서 보관함에 담습니다.

레삭매냐 2018-04-23 11:50   좋아요 0 | URL
소설은 일단 재밌습니다 !
영화로도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직 소식이 없네요.

겨울호랑이 2018-04-23 16: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파과」라는 작품은 여러 면에서 우리의 편견, 선입관을 깨는 군요... 선입관은 어떨 때는 사사로운 것에 신경을 덜 쓰게 하지만, 때로는 사실을 왜곡해서 전달해 주는 것 같습니다^^:)

레삭매냐 2018-04-23 18:38   좋아요 1 | URL
그렇죠 일단 킬러라는 게 보통 남성들의 전유물로 인식
되어 왔는데 여성 그것도 연세가 드신 할머니 킬러의 등장
에서부터 편견을 박살내 버립니다.

참신한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프레임에 갇히게 되면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것 같
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