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얼 헤이스 두 번 죽다 모중석 스릴러 클럽 34
마커스 세이키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3년 9월
평점 :
품절


 

 

 

 

 

 

 

 

 

 

(기억하시는 분들은 기억하시겠지만, 제가 "도대체 언제 나올까?"를 외치며 학수 고대하던 마커스 세이키(Marcus Sakey)의 [대니얼 헤이스 두번 죽다 (The Two Deaths of Daniel Hayes)]가 드디어 나왔습니다.  기뿐 마음에 월스트리트 저널에 신문 기사처럼 만들어 넣어 보았습니다.)

 

 

 

 

 

[다니엘 헤이스 두번 죽다]를 읽다.

 

 

Q: 당신이 말하는 거짓말은 소설과 동의어인가?

A: 우리는 잘 씌어진 소설을 보고 '사실'같네라고 말하며, 현실에서의 기막힌 일을 보고 '소설'같네라고 말한다. 실제로 진실과 등가를 이루는 위대한 거짓말을 나는 훌륭한 소설 속에서 자주 보아왔고, 문학은 그 힘으로 우리를 사로 잡는다.

-장정일, 너에게 나를 보낸다. p.287

 

 

 

한 인터뷰에서 당신의 글쓰기 배경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마커스 세이키가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을 듣고 위에 부기해 놓은 글을 떠올렸다. 장정일은 작가가 되면 마음껏 거짓말을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세이키 역시 '거짓말'이 그의 글쓰기에 자양분이 되었다.

세이키에게 있어서 특히 대학 졸업후 기업 홍보및 마케팅 분야에서 10년간 일했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광고 분야" 만큼 범죄물 쓰기를 준비하는데 좋은 분야는 없다고 잘라 말한다.

 

 

 

 

(개인적으로 표지 너무 마음에 듭니다. 상징적인 느낌을 굉장히 잘 살렸습니다. 이 사진 속에 쏟아지는 가을 햇살때문에 백양목처럼 하얗게 탈색된 거리에 있는 여성의 그림자에 주목해주시길. 이쪽에 서있도록 부탁한 의도적인 샷입니다.)

 

 

 

 

기억상실증과 결부된 스릴러로 대표되는 로버트 러들럼의 [본 아이덴티티(Bourne Identity-1988)](작품속에 러들럼의 책을 읽는 사람이 나온다)와 그렉 허위츠의 [크라임 라이터(The Crime Writer-2007)]를 작품 안에 새겨넣음으로서 그 작품들에 대해 작가가 고민했음을 대놓고 표현한다. 작품의 중반부에 등장하는 메멘토 포스터도 같은 시선으로 보아도 안전하다.

 

대니얼을 서랍을 잡아 뺐다. 립밤, 콘돔, 동전이 가득쌓인 접시, 그렉 허위츠의 소설 한 권이 들어 있었다.p.111

베넷은 혹시 숨겨놓은 금고가 있는지, 액자에 넣은 영화 [메멘토]의 포스터 뒤쪽도 확인했다. p.144

 

특히 그렉 허위츠 작품은 드루 대너(Drew Danner)라는 범죄소설가가 병원에서 기억을 잃은 채로 깨어나는데, 경찰들이 전 여자친구를 살해한 혐의자로 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초반부와 유사성을 보인다. 기억상실, 작가라는 주인공의 직업, 여자친구 살해 혐의등이 매우 흡사하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이 보이는 반응이란 아무래도 대동소이해서, 소재의 중첩때문에 초래되는 선배작가들의 자장을 벗어나는 것은 확실히 어려운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마커스 세이키는 기억상실증이 걸린 주인공을 내세워 전혀 다른 차원에서 독보적이고 매력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여자 얼굴의 앞면은 흰 바탕에 빨간 글씨로 제목을 되어 있습니다.)

 

 

 

 

 

(여자의 얼굴의 뒷면을 이용해서 작가 소개 글을 넣은 부분이 인상적입니다. 표지만으로도 소장욕구가 생긴다고 할까요.)

 

 

소위 소재의 진부함(클리쉐)에 대한 문학적 싸움의 흔적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미 많은 작가들이 다루었던 소재에 어떻게 자신만의 색깔을 입혀 차별성을 두느냐가 이 작품의 승패를 가늠하는 열쇠였을 듯 싶다. 어설프게 접근했다가는 심층을 향해 직진하기는 커녕,소재의 표면에서 그저 공회전만하기 쉽기에 더욱 그러하다. '널리 알려진 소재'와 '상투성을 극복하고 변별성을 두려는 작가의 의지'의 길항이 좋은 효과를 냈다. [대니얼 헤이스 두 번 죽다]는 익히 알려진 '기억 상실증'이란 소재를 작가가 치열성의 강도를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매끄럽게 얼개를 잘 짜내어 만들어낸 수작이라 할만하다. 게다가 이 작품은 흥미본위의 단순한 스릴러물이라고 보기에는, 작가가 작품 내에서 세상의 비밀을 반복적으로 누설하면서, 독자를 깊은 성찰의 공간으로 인도하려는 열의있는 목소리가 꽤 크게 들린다. 기억을 잃고, 다시 되찾아가는 주인공의 마음 속에서 부유하고, 소용돌이 치는 복잡한 불협화음을 통해, 단순히 마음 조리며, 스토리라인을 따라가는 것 외에도, 우리는 진실에 가닿으려는 사유의 모험 또한 함께 하게 된다.

 

 

 

확언하건대, 비록 이 작품은 '스릴러'로 분류되어 서점가의 책꽂이에 꽂힌다하더라도 그 이상의 다양성을 열어 젖히는 의미있는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전형적인 장르론적 테두리로 가두기에는 덩치가 크고, 다층적 의미망으로 걸러 낼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즉각적인 재미만을 하염없이 쫓아가는 타입의 작품이 아니고 (하지만 아주 재밌다), 독자의 세계관을 변화시켜주거나 인식의 폭과 깊이를 확장시켜 줄만한 화두가 내장되어 있는 작품이다.

작가는 말한다.

기억이라는 건 현재 우리가 서 있는 곳에 어떻게 오게 됐는지를 자신에게 설명하는 이야기일 뿐이야. 따라서 기억에는 절대적인 게 없고 모두 주관적이지." (Memories are just stories we tell ourselves to explain how we got where we are. There's no absolute to them. It's all subjective. p.363) 지난 한 주일 내내 내가 배운 게 있다면,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지 선택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는 거였어. 모든 순간에 선택을 한다는 거지. 과거는 이미 지나갔어. 기억은 꿈과 다름 없이 허망하다는 거야. 실질적이고 유일한 건 현재야. 바로 그걸 배웠단 말이야. (Over the last week, if there's anything I've learned, it's that you're only who you choose to be. Every moment. The past is gone. Memories are no more solid than dreams. The only real thing, the only true thing is the present. That's it. p.364)

 

 

 

기억이란 한번 만들면 변형 불가능한 조각상이 아니라, 만질 때마다 손의 힘에 의해 모양이 바뀌는 점토에 가깝다고 한다. 그것도 절대로 굳지 않는 점토라는데, 이는 기억의 가변성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게다가 기억이란 시간의 공격에 속절없이 유실되기도한다. 이런 믿지 못할 기억이, 결국은 사람을 구성하는 것일까? 마커스 세이키는 우리에게 기억이라는 건 현재 우리가 서 있는 곳에 어떻게 오게 됐는지를 자신에게 설명하는 이야기 일뿐이며,과거에 누구였는지나 자신이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지의 문제보다는 지금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가 중요하다고 설파하고 있다.

이 작품은 작가의 이런 생각에 견인되는 작품이다. 따라서 책에 빠져 있는 동안, 우리는 잠시나마 마커스 세이키가 펼쳐보이는 "나는 누구인가?", "정체성이란 무엇이고 기억은 자아와 어떤 역할을 하는가?", "기억이란 무엇이며, 현재의 나와는 어떻게 연결되어있는가?" 하는 철학적 물음 속에 발을 들여놓도록 허락 받는다. 이를 테면, 이것이 마커스 세이키의 복음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 작품이 선사하는 매혹은 바로 이 자리에서 나온다.

 

 

 

 

 

 

 

나는 누구일까? 기억이란 무엇인가?

 

 

 

 

 

 

 

 

나는 어떤 인생을 선택하여 살것인가?

 

 

 

그녀의 삶이 그대로 드러난, 벽에 걸린 사진들도 생각났다. 소피의 과거 모습 중 어느 하나도 그녀에게 닥쳐올 미래를 보여주진 못했다.(p.388)

 

 

 

이건 네가 과거에 누구였는지, 혹은 네가 뭘 기억하고 있는지의 문제가 아니야. 네가 지금 누구인지에 관한 거지. 네가 선택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가 문제인 거라고. (p.391)

 

 

 

우리가 어떤 식으로 원하든 간에 살아갈 수 있다는 거지. 매 순간순간을 말이야. 우리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거야. (p.364)

 

 

 

쭉 이어온 과거가 없는 사랑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알츠하이머병과 다를 게 뭐가 있느냐 말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평생을 살아오며 사랑하고, 집을 사고, 아이들을 키워왔어요. 그랬는데 그들 중 한 명이 덜컥 병이 나고 다른 한쪽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생각해봐요. 그들이 여전히 결혼생활을 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여전히 서로를 사랑할까요? 그들이 함께한 시간이 중요한 의미가 있을까요? 아니면 모든 게 그저....잠시 스쳐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일까요? (p.255)

 

 

 

 

 

 

 

 

 

 

 

어찌보면, 이 작품은 소설과 시나리오의 하이브리드가 아닐까,할 정도로, 마커스 세이키는 꿈과 과거 회상 장면에서 고집스럽게 시나리오 스타일로 글을 쓴 점이 주목할 만하다. 작가는 소설적 구조와 시나리오적 구조를 결합시키므로써, 연극적인 효과를 이식하는데 성공했다.

주인공이 각본가라는 점에서 이 부분은 쉽게 이해된다. 시카고를 중심으로 이전의 작품을 썼던 작가가, 본인에게 낯선 LA로 작품의 무대를 옮긴 것도, 헐리우드라는 소재와 이런 구조적인 장치를 염두해 두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LA를 중심으로 책을 쓰게 된 작가는 본의 아니게, 레이먼드 챈들러나 제임스 엘로이, 마이클 코넬리 같은 LA를 배경으로 글을 썼던 기라성 같은 선배 작가들과 경쟁하게 된 셈이다.

소설의 주요 무대를 헐리우드로, 주인공의 부인을 배우로 설정한 이유는 헐리우드하면, 배우, 배우하면 연기가 자연스레 연상되기 때문이다. 배우는 다른 사람 역할을 하기에 용의한 직업이다. 이 소설에서, 자신을 지우고 타인으로의 존재변이에 대한 갈망을 표현한 부분이 꽤 눈에 띤다. 이부분은 '당신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는 작가의 목소리를 일깨운다.

 

 

 

대니얼은 미국의 허리를 가로지르며 오랫동안 차를 모는 동안 다양한 인물들을 머릿속에 그리는 게임을 했다. 도박에 중독된 소방관이 되기도 했고, 미식축구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동성애자 보험 영업사원이 되기도 했으며, 히트곡 [마카레나]에서 나오는 인세로 살아가는 작곡가되기도 했다. 흡사 옷 가게에서 이것저것 옷을 걸쳐보는 일과 흡사했다. 재단이나 박음질이 잘못되어 몸에 맞지 않으면 한쪽으로 던져버리고 다음 것을 선택하면 됐다. 하지만 이제는 선택의 범위에 한계가 있는 각박한 현실로 돌아와야만 했다. 예전의 대니얼은 분명히 어떤 특징이 있는 인물이었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좋은 쪽 나쁜 쪽으로 끊임없이 선택을 했기에 만들어진 결과였다. 그리고 이제는 원하든, 아니든 어느 한 인물의 역할을 군소리 없이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다양한 인격을 선택하는 자유가 없어지고, 강요된 결정에 따라 할 수 없이 살아가야 하는 삶이 주어진 셈이었다. (p.188)

 

 

 

다른 뭔가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자신들이 되고 싶었던 사람이 되려고 할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기회를 받아들일까? 습관적으로 유지되는 결혼생활은 또 얼마나 될 것이며, 속만 끓인 채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p.236)

 

 

 

아주 죽을 맛이었다. 과거에는 왜 완벽할 수 없을까? 완벽할 수 없었는데 완벽해지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단 말인가? (p.260)

 

 

 

하지만,어찌 보면 핵심적인 사건부분을 전적으로 그렇게 표현한 부분에선 고개를 갸웃하는 독자도 있을 수 있겠다.

이 부분은 전통적인 세밀한 묘사와 문장의 맛을 음미하는 것을 선호하는 독자들에게는 독으로 작용할 수 있어, 양날의 검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모든 독자를 만족시키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며, 각본스타일의 나오는 부분은 책 전체로 보아서는 일부분이다.

오히려 처음에 다니엘 헤이스가 물밖으로 나왔을 때는 주인공이 느낀 공포와 불안감을 흉내내서 짧게 쳐낸듯한 문장으로 시작했지만, 다른 부분에선 시적인 산문을 쏟아내서 독자로 하여금 담긴 내용만큼이나 언어가 갖고 있는 풍미를 맛보고자 천천히 읽고 싶게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요컨대, 이 작품엔 작가의 여러 스타일이 서로 경쟁하듯 빼곡히 채워져 있다는 말이다.

 

 

 

 

 

 

 

 

스티븐 킹은 "문학적 우수성에 이끌려 소설책을 구입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비행기에 가지고 탈 만한 재미있는 이야기다. 처음부터 마음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아서 끝까지 책장을 넘기게 만드는 그런 소설말이다."라고 말한바 있다. 이 독후감이 전체적으로

작가가 내보이는 철학적 성찰에 주목하고 있어 문학적 우수성만을 지닌 작품처럼 비춰질 수 있겠지만, 재미면에서도 시간의 흐름을 잊을 정도로 빼어나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공기가 다르고 냄새가 다른 곳으로 던져진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반전이 몇차례 작품 속에 등장한다. 세상이 갑자기 뒤틀리는 듯한 기분..이 아득한 순간과 기분을 느끼기 위해 독자들은 이런 책을 구입하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은 스티븐 킹이 말하는 비행기에 가지고 탈만한 책의 전형을 보여준다. 판에 박힌 듯한 소재로 범람하는 스릴러들 가운데에서 단연 독특한 자리를 차지 할만한 작품이다. 작가는 소재의 무게에 짓눌리거나 휘둘리지 않고, 확실히 소재를 지배했다는 느낌이다. 캐릭터들의 내면의 궤적을 따라가다보면, 쉽게 감정이입 될 정도로 살아있다. 잘 짜여진 플롯 속에서 살아있는 캐릭터들은 작품의 수준을 높여준다. 육류의 두툼한 부분에 더 잘 익으라고 넣어주는 칼집같은 역할을 한다고 할까. 전체를 관류하고 있는 작품의 명도는 다소 어둡지만, 뒷맛이 개운치 않을 정도로 지나치게 어둡지 않아서 좋았다. 절벽처럼 위태로운 다니엘 헤이스의 상황을 따라가며, 그에게 간섭하고 동일시하고 침잠하며, 나는 과연 현재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를 되묻게 되었다. 혹시 책읽기에 대한 열망이나 욕구가 예전만큼 강렬하지 않다면, 이 책을 주저없이 권해주고 싶다. 사그라들던 책에 대한 열정이, 필경 잉걸불처럼 활짝 피어오르며 타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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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가 드디어 나왔습니다. 상당히 예쁜 자태입니다.

잠시 소중한 내 시간을 통째로 이 책에 내맡기고 쉬고 싶은 유쾌하고, 의미 깊은 책이라고나 할까요.

 

 

 

 

 

 

 

 

 

 

 

이로써 무라카미 라디오 3부작이 완성되었군요.

3권 모두 하루키 팬들에겐 말할 것도 없이, 머스트 해브 아이템입니다. (어떻게 이것을 탐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ㅎ)

이 3권을 하루키 팬인 친구에게 선물하시면, 굉장히 사랑 받으실 수필집이지요.ㅎㅎㅎ

 

 

 

 

 

 

세상에는 없는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포스트 잇.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제가 한 번 만들어 보았습니다.

 

 

 

 

Murakami Haruki? Murakami Haruki!

 

 

 

 

 

 

 

개인적으로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에 수록된 작품 중에 뽑아본 재밌는 에세이 베스트 5선입니다.

제가 선정한 작품들에 대해 읽어보신 다른 분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실지 궁금하네요~^^

 

 

 

5위: 장수하는 것도 말이지 (p.176)

(하루키만이 쓸 수 있는 장수에 대한 이야기.후훗 웃음이 나면서도 나이먹음에 대한 그의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4위: 골동품 가게 기담 (p.180)

(오하시 아유미씨가 그린 판화도 너무 재미납니다.ㅎㅎ 하루키 씨의 아내에 대해 알 수 있는 수필.)

(골동품 기담을 위한 아유미씨의 판화)

 

3위 : 세상은 중고 레코드 가게 (p.80)

(저도 한때 레코드에 관심있어서 기웃 거렸기 때문에, 이 수필에 유달리 관심을 갖고 읽었습니다. 하루키의 재즈 레코드 사랑은 잘 알려져 있지만, 이 수필을 읽으면, 그의 재즈에 대한 대단한 열의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2위 : 원시적 광경 (p.128)

(약간 더러운 이야기지만, 너무 재밌습니다.ㅎㅎㅎ)

 

 

1위 : 리스토란테의 밤 (p.16)

(이 작품은 하루키의 수필을 모두 통틀어도 가장 재밌는 3선 내에 뽑힐 수 있을 정도로 재밌습니다. 미친듯이 웃었습니다. 하루키의 수필을 누군가에게 처음 읽어준다면 바로 이 수필과 [채소의 기분, 바다 표범의 키스]에 있는 '바다표범의 키스(p.152)'를 읽어주고 싶습니다.)

 

 

 

(리스토란테의 밤을 위한 아유미의 씨의 판화)

 

전반적으로 체리처럼 상큼한 느낌의 에세이집이랄까요?!

 

  이 책이 나오면서 무라카미 라디오 3부작이 완성되었습니다. 보다시피, 함께 있으니 참 보기 좋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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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 세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3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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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라디오 그 세번째 이야기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를 위한 포스팅






무라카미 하루키의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가 드디어 나왔습니다.



제목이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서 알려드리면,

"졸리지 않은 밤은 내게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만큼이나 드물다 (p.12)"..라는 통통 튀는 하루키 식 문장에서 나왔습니다.





책이 도착하자 마자, 다른 책을 다 제쳐두고 읽었습니다. 저는 하루키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지만, 제가 하루키를 많이 좋아합니다.



찾아보시면 정성스레 쓴 관련 포스팅이 몇개 있습니다.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을 위한 포스팅 : http://blog.naver.com/meushar/140163250005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을 위한 포스팅: http://blog.naver.com/meushar/140152546246





이 책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어느 정도 예상과 기대는 했지만, 역시나 너무 재밌습니다.

가령, '기본 정책이 없는 정부는 화장실 없는 맥주집 같습니다.'같은 기가막힌 비유들이 곳곳에 숨어 있어

읽는 재미를 배가 시켜줍니다.

젊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잡지 -[앙앙]에 쓴 연재 에세이를 모은 것이라 감각적이고 세련되고 토실토실 살찐 상상력이 가득한 에세이집입니다. 읽는 내내 유쾌하고, 몇 년은 젊어진 느낌입니다.

힘을 빼고도 이런 글을 써내다니, 대단합니다.

하루키씨 말대로 재미있고 즐겁게 글을 쓴 분위기를 작품집 내내 맛볼 수 있습니다.


뭉크에게는 그 밖에 [멜랑콜리]라는 제목의 그림도 있는데, 그 주인공 얼굴이 나와 아주 닮았다는 말을 몇 명의 노르웨이인에게 들었다. 오슬로 미술관에 가서 실물을 보고 싶기도 한데, 으음, 그렇게 닮았을까? (뭉크가 들은 것-p.151)



이 문장을 읽고 욱씬거리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찾아본 뭉크의 [멜랑콜리]라는 그림. 우와, 과연 하루키씨랑 닮았네요.ㅋ


전 조개나 소라, 고동 껍데기를 모으는 취미가 있는데요. 이 처럼 예쁜 조개 껍데기를 보면 꼭 구입해야 합니다.

사진 상에 보이는 조개는 하트 모양처럼 보이기도 하고, 자세히 보면 접혀 있는 '천사의 날개'를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어서 냉큼 구했습니다.

모든 수집이 마찬가지겠습니다만, 어떤 것을 모으다 보면, 시간이 지날 수록 까탈스러워져서 무턱대고 모으기보다는 나름 가치를 따져서 냉정하게 구하기 마련입니다.

하루키의 책들도 제가 수집하는 것 중 하나인데, 이번에 새로 출간된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역시 하루키 책 수집을 하는 사람으로서 소장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일단 하루키가 가장 최근에 쓴 에세이라 점과 오하시 아유미 씨의 귀여운 동판화가 누락되지 않고 그대로 함께 수록된 원본에 아주 가까운 책이란 점에서 높은 점수를 매기고 싶습니다.


어느새 날씨가 꽤 더워졌는데요, 이렇게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조개와 함께 책을 찍어보니 시원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최근에 구한 하루키의 책 두 권입니다. [해변의 카프카] 영어 판본과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영어판본의 책입니다. [달리기를 말할 때..]는 하루키의 에세이 집으로는 예외적으로 영어번역이 되었군요.


하루키 책]을 수집하는 사람의 견지로서, 비채에서 나온 이 세 권의 책은 무척 수집가치가 높다고 생각됩니다. 책의 만듦새도 아주 좋고, 하루키의 개인적인 삶을 엿보기엔 이 책들 만한 것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하루키 좋아하는데, 으아, 이렇게 3권 선물 받으면, 정말 기쁠 듯 싶군요.



하루키가 젊은이들로 부터 '문장 공부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 문장 운운은 나중 일이고, '어찌됐든 살아가는 일 밖에 없다. 어떤 식으로 쓸 것인가 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 살 것 인가 하는 문제와 대충 같다.'라고 말한 적인 있는데, 이 에세이집은 그런 하루키의 철학이 잘 드러나 있는 듯 보입니다.

일상의 하루키를 통해 방향 감각이 분명한 그의 문장들이 살아 숨쉬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라는 제목에 맞춰서 샐러드와 함께 한 컷 찍었습니다.



실제로 이 책에는 샐러드 (야채)를 좋아하는 하루키의 에피소드를 담은 글도 들어 있습니다.



'슈퍼 샐러드'라 할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전에 호놀룰루의 할레쿨라니 호텔 수영장 근처의 레스토랑 'HWAK(House Without a Key)'에서 아주 훌륭한 샐러드를 만났다. 마노아 레터스와 쿠라 토마토와 마우이 어니언을 넣었을 뿐인 단순한 샐러드였지만 맛있어서 늘 점심으로 먹었다. 따뜻한 롤빵과 이 샐러드-그리고 차가운 맥주-가 있으면 더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 (p.46-슈퍼 샐러드를 먹고 싶다)




샐러드를 하루키가 맛있게 먹듯, 저도 그의 글을 맛있게 냠냠 먹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것은, '쇤브룬 동물원의 사자'라는 제목이 달려있는 에세이인데, 저도 동물원을 좋아하는지라 참 재밌게 읽었습니다. '동물원 이야기'는 첫번째 무라카미 라디오인 [저녁무렵에 면도하기]에도 실려있죠(이상한 동물원).)

적절한 말을 고르는 데, 시간과 품을 들이며 글을 정성스럽게 쓰는 하루키의 문장들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지극히 신선하게 느껴집니다.



(에세이든 소설이든 문장을 쓸 때 친절심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되도록이면 상대가 읽기 쉬우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써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 시도해보면 알겠지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알기 쉬운 문장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생각을 깔끔하게 정돈하고, 거기에 맞는 적절한 말을 골라야한다. 시간도 들고 품도 든다. 얼마간의 재능도 필요하다. 적당한 곳에서 "그만 됐어."내던지고 싶을 때도 있다.p. 23-사랑은 가도)




무라카미 라디오 세번째 이야기!

작년에 나왔던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와 함께 찍은 샷. 무라카미 라디오의 시리즈에 맞춰서 비슷한 풍으로 만들어져 통일감이 있습니다. (이렇게 통일감 있게 나와주면, 역시 수집욕구가 생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ㅎ)

무라카미 라디오 첫 번째 편인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도 곧 나왔습니다. 역시 기대되는 책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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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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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카지노 칩보다는 물에 빠졌을 때의 기포에 초점을 맞춰 찍은 사진이다. 카지노 칩을 반복적으로 던져서 튀어오르는 물방울이 가장 아름다운 것을 선택했다. 물거품이 헛됨, 공허함을 나타내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 한글 판본 표지에서도 느껴지듯이 이 소설의 배경은 카지노의 도시 라스 베이거스다. 사막에 세워진 욕망의 도시. 트럼프와 카지노 칩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

 

코넬리가 만들어낸 소우주

 

스티븐 킹은 [뉴요커]와의 어느 인터뷰에서 소설이란 땅 속의 화석처럼 발굴되는 것이라고 믿는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마이클 코넬리가 발굴한 것은 실로 대단한 것인 셈이다. 그는 사람이 자고 있는 호텔 방에 들어가 현금이나 보석, 노트북 컴퓨터등을 훔치는 사람의 이야기를 LAPD 경찰로부터 듣고, 이 작품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 캐시 블랙(Cassie Black)을 구상했다고 한다.

범죄자에 대한 짧은 이야기로 작가는 독자들이 푹 빠지게 만드는 하나의 소우주를 창조해 냈다.

이 전까지 경찰의 관점에서 8권의 책을 쓰던 작가에게 이런 범죄자의 시선에서 쓴 작품은 적잖은 도전이었음을 고백한다.

게다가 이전에는 쓴 적이 없었던 여성 주인공이라는 점도 이 책이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들 속에서 갖는 의미가 크다.

작가는 주인공 캐릭터에 사실감을 불어 넣기 위해,"여자 (a woman)라면 그곳에서 무엇을 할까?"라는 생각보다는 " 이 사람(a person)이 그곳에서 무엇을 할까?"라는 관점으로 글을 썼다고 한다.

 

 

 

Void Moon -제목이 갖는 상징성

 

 

아직도 점을 치는 사람들이 있다니. 그들의 점괘로 혜성처럼 나타날 불길한 날들.

- 이성복(시인)

 

 

고도로 기술문명이 발달된 현대사회에서도 사람들은 미신을 계속 믿고 있다. 미신이 여지껏 건재한 까닭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어떤 상황에 대해 개인을 초월하는 어떤 힘이 있다고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믿기 때문일 것이다.

미신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곳은 어디인가, 우선 스포츠 분야를 떠올릴 수 있다. 프로야구선수들이 타석에서 보이는 일련의 행동,의식(가령 정해진 횟수만큼 흙을 발로 차고, 헬멧등을 고쳐쓰고 정해진 횟수만큼 방망이를 투수쪽으로 휘두르는 행위)은 비논리적이고 터무니 없어 보이지만, 그런 행위를 보였을때 얻었던 홈런이나, 안타와 같은 보상행위로 인해 강화된 행동임에 틀림없다. 인간의 마음 회로에 그것이 원인과 결과라는 연결고리를 형성하게된 것이다.

스포츠 분야말고 이런 미신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또 다른 곳은 바로 도박판이다.

행운과 불운이 지배하는 곳.

이 책은 수 많은 사람들이 운과 불운을 뼈저리게 느끼는 도박의 도시, 라스베이거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때문일까. 이 작품에는 많은 미신, 점성술, 카발라, 오컬트적인 요소들이 그득하다. 등장인물 중 레오 렌프로의 존재이유 중 하나는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다. 그는 점성술이 가장 흥했다는 신바빌로니아의 사제가 되었어도 손색이 없었을 정도로 점성술과 미신의 숭배자이다.이름도 '사자자리'를 뜻하는 Leo 아닌가. (그 옛날,작업을 앞두고 레오가 자신과 맥스에게 강요했던 온갖 규칙과 예방책이 생각났다. 작업 전에는 검은색에 베팅하지 마라., 닭고기를 먹지마라. 빨간 모자를 쓰지 마라 등등. 그런 것들이 캐시에게는 금을 밟으면 엄마 등이 부러진다는 식의 미신처럼 느껴졌다. (p.62))

 

하물며 주인공은 미신적 행위를 배제 하기 힘든 도둑이다. (불잡히느냐 마느냐가 너무도 중요한 그들에게 이성으로 설명하기 힘든 금기와 미신은 태생적으로 그들에게 씻어내기 힘든 무엇이다.) 프롤로그에서 맥스가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 그건 의식의 일부라고 말하는 장면 (맥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건 의식의 일부였다.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p.6))은 바로 이런 도둑들의 심리와 행동을 잘 보여준다.

게다가 이 책의 시간적 배경은 1999년이다. 세기말적 분위기에 휩싸였던 시기아닌가. 작가는 영민하게도, 점성술을 믿는 사람들에게 검은 고양이와 같은-불운의 상징인 보이드 문(Void Moon)이라는 개념을 작품에 끌어들였고, 급기야는 제목으로 사용하기까지 했다.

 

 

 

(잘 찍은 달 사진은 아니지만, 직접 찍은 사진으로 올리고 싶어서 200mm 렌즈로 찍어본 보름달 사진. 코넬리는 달이 갖는 상징성을 십분 활용하여 작품을 썼다.)

 

근데 보이드 문이 뭐죠?

"점성학적 현상이야. 달이 한 별자리에서 다른 별자리로 옮겨갈 때, 어떤 별자리에도 속하지 않는 때가 생기지. 그런 현상이 일어나면 달이 다음 별자리로 들어갈 때까지 '보이드 오브 코스 (void of course)'상태에 있다고 해. 그게 보이드 문이야. (중략)

그 시간은 운이 따르지 않는 때야, 캐시. 보이드 문 아래에서는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어. 어떤 나쁜 일이라도 말이지. 그러니까 그 시간에는 꼼짝 말고 있으라는 얘기야." p.83

 

또한 작가는 달이 갖고 있는 미신적인 요소를 십분 활용한다. 미국 사람들은 보름달을 너무 오래 쳐다보는 사람은 미칠 가능성이 높다고 믿거나, 보름달이 뜨면 말다툼이 생기고, 이상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미신을 슬쩍 건드린다.

 

그럴 만도 하죠. 오늘 밤엔 사람들이 좀 거치네요. 달 때문인가봐요. 보름달이에요. 못봤어요? 이 도시에 있는 어떤 네온 간판보다도 밝게 빛나고 있어요. 언제나 보름달이 뜨는 밤에는 이 도시 사람들이 좀 더 날카로워지는 것 같아요. 여기 오래 있어서 그런 모습을 많이 봤어요.

p.150

 

또 하나. 달의 순환과 여성의 생리적 순환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달이 여성성을 상징한다는 것은, 비둘기가 평화를 상징한다는 것 만큼이나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달(Moon)'이 들어가는 제목과 여자 주인공을 처음으로 전면에 내세운 점은 분명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달은 떠있는 시간때문에 밤의 이미지를 환기시킨다. 밤에 활동하는 도둑인 캐시 블랙(Cassie Black). 검정(Black)은 밤을 상징하는 색이라는 점까지 고려한다면, 작가가 여러모로 신경 쓴 이름이다.

void라는 단어는, 공허한, 텅빈 (느낌)을 나타내는 뜻이 있다. 영어로 '그 무엇도 그의 죽음이 만들어낸 공허함을 채울 수 없다'라고 쓰면, 'Nothing can fill the void made by his death.' 정도가 될 텐데, 캐시 블랙의 마음이 딱 그러하다.

그녀는 인생의 순간 순간, 추운날 곱은 손을 녹이기기 위해 불을 쬐듯이 죽은 스승이자 남편인 맥스가 만들어내는 추억에 언마음을 녹인다.그리고 그리움은 뾰족한 송곳이 되어 그녀를 찌른다. 그렇다면 Void Moon이란 '공허한 여인'이라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그녀의 기억은 끝없는 풀밭과 같다. 맥스의 망령이 생의 순간 순간마다 달그락 거리며, 그녀의 마음 속에서 풀을 뜯고 있다.

 

 

준비 작업을 하는 동안 캐시는 자신의 스승이자 애인이었던 맥스와의 추억이 자꾸만 떠올랐다.클레오파트라 호텔에서의 비극적인 결말은 빼고 좋은 시절만 끄집어낼수는 없었다. p.54

 

자꾸만 맥스가 떠올랐다. 그와 함께했던 시절과 그의 마지막도 생각났다. 돌아오자마자 이렇게 지독한 고통과 회한에 사로잡힐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라스베이거스는 항상 풍경이 변하고, 스스로를 재창조한다. 본질적으로 보기 좋은 허울에 불과한 한 장소가 그토록 애특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곳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곳이 그랬다. 그리움이 사무쳤다. 캐시는 맥스 이후로 다른 남자를 사귄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 고통은 자신이 평생을 안고 가야 할 그리고 순순히 받아들여야 할 유일한 재산일지도 모른다. p.89

 

작품 전체에 맥스에 대한 캐시의 사랑과 그리움이 미만해 있기때문일까, 내가 받은 전반적인 느낌은 애틋함과 애잔함이었다. 범죄자인 캐시에 대한 호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이런 캐시의 인간적인 면모 때문이었던 것 같다.

삶 속에서 맥스의 윤곽을 지우지 못하고, 출렁거리는 공허함의 바다 속에서 생활하는 그녀에게 괴로움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한 그녀에게 또 다른 공허함을 주는 것은 딸과 함께 지내지 못한다는 점일 것이다. 이것은 그녀에게 공허함과 동시에 살아야 할 이유를 제공한다.

이 지점에서 대두되는 것이 바로 이 책을 채우고 있는 캐시 블랙의 모성애와 엄마로서의 책임이다. (앞서 말한) 달이 품고 있는 여성성때문에 점성술에서 달은 어머니, 모성애, 자궁, 가정을 상징한다.

 

마이클 코넬리는 이 작품을 완성한(2000년) 무렵, 처음으로 아버지가 된 지 얼마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자신의 글쓰기에 아버지/어머니적인 본능이 스며들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아버지다움으로 충만했던 코넬리가 자신의 부성애을 캐시 블랙에게 투영시키며 글을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void에는 트럼프 카드에서 짝패가 없는 것 나타내는 뜻도 있다.( a lack of any cards in one suit)

작품의 배경은 라스베이거스. 라스베이거스 하면, 카지노, 카지노하면 트럼프 카드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이 void라는 단어의 다층적인 의미를 이용하여 제목으로 사용하고, 또 그런 장면을 작품 속에 집어 넣은 코넬리에게 경탄을 금할 수가 없다.

 

재빨리 카드를 꺼내 한장씩 넘겼다. 확인하고 넘어가는 카드가 많아질 수록 두려움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카드도 하트 에이스가 아닌 것을 확인 했을 때, 캐시는 큰 소리로 욕을 내뱉으면서 카드 뭉치를 집어던졌다.

(중략)

"뭐야? 52픽업 게임하고 있었어?"

"51픽업이라고 해야 맞겠는데요." p.316

 

작가는 이것에 멈추지 않고, 두 주인공을 상징하는 카드를 독자에게 내어 보인다.

 

 

두 명의 주인공 - Ace of Hearts VS Jack of Hearts

 

에이스 오브 하트(Ace of Hearts)의 특징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하트 에이스'는 강력하고 독립적인 여성들을 끌어당기며, 하트가 감정을 뜻하기에 누군가의 가장 가까운 관계를 의미한다. 가령 엄마와 딸이나 남편과 아내, 연인같은 친밀한 관계 말이다. 비록 이 카드가 사랑에 대한 열망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돈에 대한 욕구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 이유는 이 카드의 숙명적 존재에 해당하는 카드가 바로 다이아몬드 에이스이기 때문이다.

이런 설명을 들으니, 마이클 코넬리가 다른 카드가 아닌 '에이스 오브 하트'를 '캐시 블랙'을 상징하는 카드로 선택한 것은 당연한 결과인 듯 보인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선인이 아니라, 악인들인데, 주인공 캐시 블랙이 다른 주인공들과 차별화 되는 것은 바로 마음(heart)를 갖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마이클 코넬리는 독자들이 캐시 블랙이 감옥에 들어가게되었던 이유가 '사랑'때문이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글을 썼다고 한다.

캐시 블랙.

강인하고 독립적인 여성.

맥스에 대한 사랑의 추억 속에서 매일 그를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그녀는 맥스와 자신의 딸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넘치며, 자신과 딸의 행복을 위해 돈이 필요하다.

카드 점에서 이 카드는 사랑과 행복을 나타내는데, 과연 캐시는 그녀가 아끼고 사랑하는 존재와 행복해 질 수 있을까.

 

한편 잭 오브 스페이드 (Jack of Spades)는 이 책의 남자 주인공에 해당하는 잭 카치(Jack Karch)의 별명이다.

 

잭 오브 스페이드 카드는 오랫동안 거짓말쟁이,사기꾼, 악당, 죄수,반역자, 도둑, 질투..등 좋은 않은 것의 대명사로 불리워 왔던 카드다. 간단히 한마디로 정의하면 나쁜 녀석(The bad boy)라 할 수 있는 의미를 지닌 카드라할까. 작가가 이름이나 별명을 허투루 짓지 않으며 상당히 고심해서 만드는 것은 상식중의 상식. 결국 잭 카치의 별명으로 이것 만한 것은 없다.

특히 spade는 영어로 '삽'이란 뜻이 있기에 시체를 사막에서 처리하기위해 자동차 트렁크에 삽을 넣고 다니는 잭 카치에게 어울린다.

"자넬 잭 오브 스페이드라고 부르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구먼. 트렁크에 삽을 넣고 다니니 말이야."(p.251)

사실 스페이드는 영어로 '삽'이라는 뜻을 갖고 있지만, 원래는 '스파다'라는 이탈리아어(스페인어로는 '에스파다')에서 기인한다.

'스파다'의 의미는 '검(칼)'을 의미하며, 스페이드의 모양도 칼모양에서 연유한다. 하므로 이 작품 속에서 폭력과 광기의 상징과 같은 잭 카치가 잭 오브 스페이드 카드로 설정한 것에 대해 설명된다. Jack of Spades가 상징하는 인물은 '올거 더 데인 (Ogier The Dane)'이라는 샤를 마뉴의 12 성기사중 한 명인데, 전설에 따르면 Courtain이라는 명검을 들고 다녔다고 한다. 이래저래 검과 관련된다.

 

잭 카치(Jack Karch)의 성(姓)인 Karch는 'karc'에서 왔는데, karc의 의미가 중세 독일어의 '교활한 (cunning), 남모르게 살짝하는 (Sly)'에서 유래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 처럼 많은 성들이 처음에는 별명에서 기인했던 것이다. 우리말로 하면 '교활한 잭' 정도가 되겠다.

 

작가가 '캐시 블랙'이란 이름과 '잭 카치'란 주인공의 이름에 매우 신경을 썼다는 것은 작품의 여러 대목에서 드러난다.

다음은 캐시 블랙과 잭 카치에 대한 이름 관한 작가의 설명으로 사용된 것.

 

캐시. 어떤 이름의 약잔가? 카산드라?"

"캐시디요."

'부치 캐시디 할때 그 캐시디? 부모님이 범법자를 좋아하셨나보군.'

'아뇨. 닐 캐시디 할 때 캐시디요. 아버지도 항상 여행을 다니셨죠. 어쟀든 그렇다고 들었어요."

p.323

 

잭 카치는 어릴 때 종종 마술사인 아버지와 합동 마술 공연을 하기도 했다. 작고한 그의 아버지는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초까지 스트립의 여러 카지노와 호텔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유명 마술사 '놀라운 카치!'이다.

아들 카치는 '잭 오브 스페이드'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이는 아버지 카치가 아들 카치를 우편낭에 넣어 자물쇠로 잠그고 그 우편낭을 다시 커다란 상자에 넣은 후 자물쇠로 잠갔다 다시 열자 아들은 사라지고 대신 스페이드 잭 카드 한 장만 남아있던 마술쇼에서 유래한 것이다.

p.243

 

 

캐시 블랙과 잭 카치는 둘다 범죄자라는 점에서만 같을 뿐, 둘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은 판이하게 다르다. 캐시 블랙은 사막이 바다가 되는 곳을 마음 속에 그리며 살아 가는 인물이다. 그래서 [달과 6펜스]에 나오는 스트릭랜드가 타히티 섬을 자신의 도피처이자 영혼의 고향으로 삼은 것처럼, 캐시와 맥스는 그 곳을 생각하며 현실을 견뎌 낸다.

 

그 후 캐시와 맥스는 섬으로 갔고, 복제를 하거나 타락시킬 수 없는 곳이 적어도 한 군데는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p.88

 

마지막을 위하여, 사막이 바다가 되는 곳을 위하여.(To the end. To the place where the desert is ocean.) (p.151)

 

 

 

잭 카치가 캐시 블랙의 집에서 발견한 액자 뒤쪽 판지에 적혀 있는 써머싯 몸의 글을 통해 작가는 슬쩍 [달과 6펜스]와의 연관성을 드러낸다.

 

" 고개를 들어 타히티의 윤곽을 보는 순간, 나는 이곳이 내가 평생동안 찾고 있던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I looked up and saw the outline of Tahiti and I realized this was the place I had been looking fo all my life.)"

 

여담인데, [달과 6펜스]라는 작품 제목에도 달(Moon)이 등장한다. 익히 알려진대로 달은 '꿈'을, 6펜스는 '현실'을 의미한다. 캐시 블랙이 억눌린 과거라는 울타리 속에서도 '달'을 꿈꾸며 사는 인물이라면, 잭 카치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이다. 소설 속에서 잭 카치가 끊임없이 25센트짜리 동전을 만지작 거리며 동전 마술을 하는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세계의 전모는 다음과 같은 양식으로 이해된다.

 

카치는 팔츠 너머에 있는 관목 지대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조슈아나무를 바라보다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사막은 황량한 모습일 때 진정으로 아름답다.

p.230

 

사막이 사막일 때 진정 아름답다고 느끼는 냉혈한. 욕망의 도시를 대변하는 것 같은 인물. 그의 광기는 모두 이런 세계관에서 빚어지는 것이다. 반면 사막이 바다가 되는 곳은 쫓으며 삶을 살아가며 그것이 다름 아닌 마음(heart)이란 것을 깨닫게 되는 캐시 블랙과는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이러한 극명한 대조가 주는 긴장감이 끝까지 무기력해지지 않으며 독자의 주의를 끈다.

 

그런데, 잭 카치를 작품내에서 지독하게 잔인한 살인마로 묘사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간단하다. 악당인 캐시 블랙에 몇 백배 악한 인물을 만들어낸 이유는 독자가 상대적으로 선한 캐시 블랙을 응원하고, 감정이입을 통해 작품 속에 빠져들게 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잭 카치는 소위 도덕적 사고능력, 충동적 행동 욕구에 제동을 걸고 억압하는 전두엽에 손상을 입은 싸이코페스로 같은 존재다. 그리하여 자신의 감정과 (살인)욕구를 서슴없이 따르기에 평범한 사람이라면 악몽 속에서나 해봄직한 행동을 거침없이 실행에 옮기는 인물이라 하겠다. 함부르크의 사회학자 얀 필립 림츠마는 감정이입이 결여되며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다고 하는데, 잭 카치가 바로 그런 타입의 악인인 셈이다. 얼핏 생각하기에 이런 악인은 소설 속에서 판지처럼 일차원적인, 전형적인 인물이되기 쉬운데, 스릴러의 대가인 코넬리는 잭 카치의 아버지와 연관된 과거를 슬쩍 슬쩍 이야기 속에 끼워놓는 기술을 써서 잭 카치란 악인을 살아있는 인물로 만들어 놓았다. 실로 질투심이 들 정도로 대단한 솜씨다.

 

제인 데이비스 (Jane Davis)

 

그런데, 한편으로는 작가의 작명에 대해 너무 대단한 것을 기대하는 일은 금물일 듯 싶다. 꿈보다 해몽이 되기 십상이다. 가령, 캐시 블랙이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해 여권에 새겨 넣은 새 이름이 '제인 데이비스(Jane Davis)'인데, 어떤 대단한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별다른 뜻 없이 지은 작가 주변인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어에 근원을 둔 이름들의 십중 팔구가 야훼(하나님)와 관련이 있기에, 그것을 그럴싸한 의미망으로 잡아내어 작품을 해석해 나갈 수 있겠지만, '제인 데이비스'는 단지 마이클 코넬리의 작가 웹사이트를 만들고, 관리하고 있는 여동생 이름일 뿐이다. 데이비스란 성을 가진 남자와 결혼한 여동생 제인 코넬리. 다시말하면, 캐시 블랙이나 잭 카치처럼,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맞춰 특별히 생각해서 지은 이름이라기보다는, "이쯤에서 사이트 만들고, 관리하느라 애쓰고 있는 여동생 이름을 한 작품 정도에는 써줘야 겠네."하는 기분으로 가볍게 넣어줬다는 느낌이랄까.

코넬리의 다른 작품에서도 이런 작명 습관은 종종 볼 수 있다. 가령 [탄환의 심판]에 등장하는 미키의 조사원 탐정인,'데니스 워치에초브스키'란 발음이 쉽지 않은 이색적인 이름의 소유자가 있다. 이 인물은 코넬리가 책이 나오기까지 도움을 준 사람이라 감사의 의미로 작명하여 작품 속 인물의 이름으로 활용한 것이다.([탄환의 심판] 맨 뒤에 있는 코넬리가 쓴 '책이 나오는데 수고해줘서 감사하고 싶은 인물'에 어김 없이 '제인 데이비스'가 있다.이 책 [보이드 문]의 '감사의 말'에도 '내 웹사이트의 디자이너이자 관리자인 제인 데이비스에게도 항상 웹사이트를 최신으로 흥미롭게 꾸며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라고 밝히고 있다. 제인 데이비스가 코넬리의 웹페이지 마스터이자, 여자 형제라는 것은 코넬리 팬에게는 널리 알려진 사실.)

이런 뒷이야기는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마치 인류가 달을 정복하기 전에, 달에 대한 이런 저런 환상과 이야기를 가졌지만, 달 착륙 이후 달의 실체를 알고, 낭만적 환상이 깨져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할까. 하지만 작가는 작품을 쓰고, 그것에 대한 해석은 전적으로 독자들 몫이니(오독(誤讀)은 세상 모든 독자의 특권이며, 이해는 오해이 일부일 뿐 아닌가.), 작가의 작명 의도가 원래 무엇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총평

 

마이클 코넬리는 본인이 영화 시나리오를 쓴다는 조건 하에 이 작품의 영화화 권리를 팔았고, 그것이 예정대로(2003년) 딤임팩트와 피스 메이커등을 만들었던 미미 래더 감독에 의해 영상으로 옮겨졌었더라면, (캐시 블랙 역에 다이안 레인, 잭 카치역에 알파치노가 거론되었다고 한다) 영화 개봉과 함께 출간되어 우리는 이 근사한 작품을 좀 더 일찍 접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계획이 무산되면서 우리는 이 걸작을 자그마치 13년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뒤늦게 공개된 이 작품이 전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별로 받지 못했다. (캐시 블랙이 자신의 작업에 디지털 카메라를 쓰지 않고, 폴라로이드를 쓰는 장면에서만 그런 느낌을 좀 받았을 뿐이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은 걸작이란 바로 이런 작품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말했지만 이 작품 [Void Moon]은 코넬리 최초의 여성 주인공이라는 점도 부각되지만, 무엇보다 코넬리가 범죄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최초의 작품이었기에 더욱 의의가 있다. 범죄자가 주인공이기에 독자들은 쉽게 동화되거나 연민을 느끼기 어렵다는 것은 상식. 게다가 독자가 이런 범법자에게 호감을 느끼게 해야하기에 더욱 힘들다.

마이클 코넬리는 독자의 동화를 위해서 세가지 전략을 썼다. 첫째 여성 주인공을 망각만이 구원이 될 것 같은, 과거의 그림자에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 속에 놓았다. (그것에 더하여, 모성애와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을 공유하는 레오와 정서적 공감대도 작품 전체에 애잔함과 서글픔의 색조를 띄는데 큰 역할을 했다.)

둘째,여자 주인공을 뒤쫓는 '악의 화신'이라 불러도 좋을만큼의 악인의 존재다. 캐시의 피에 흐르는 범법자의 주스가 애교로 느껴질 만큼의 강력한 싸이코패스라 그녀의 죄는 쉽게 희석된다. (이 작품은 잭 카치의 등장으로 굉장한 스피드를 얻는다. 거장의 솜씨로 악인이지만 무척 매력적으로 그려졌다. 전형성으로 채색된 '죽은' 인물이 아닌 탄력있는 악인이다. 악(惡)이 오롯이 자신의 이익에 의해서만 조정되는 행동이라 예나지금이나 우리의 마음을 끌기 때문에 그가 매력적으로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셋째, 주인공이 자신의 일에 최고의 전문가인 점을 부각 시켰다. 중반부에 펼쳐지는 그녀의 솜씨는 비록 범죄이긴 하지만 감탄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내가 스릴러에 대해 문맹이나 다름없었던 시절, '스릴러'라는 신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는바로 마이클 코넬리의 [시인]이라는 작품을 통해서였다.이 작품을 읽은 후 -나는 다른 수 많은 독자들처럼- 굶주린 듯 그의 책을 구해서 읽었고, 이 책 이후로 장르 소설에 대한 내 마음 가짐이 영원히 달라지고 말았을 정도로 마이클 코넬리는 내게 의미 깊은 작가다.

국내에 번역된 그의 여러 작품들을 두루 읽으면서, 스릴러 읽는 재미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이번 작품도 예외는 아니다.

막막한 슬픔의 분위기를 작품 전반에 스며들게 하면서, 한편으로 불꽃을 튀기며 타들어가는 도화선을 바라보는 것 같은 긴장감을 자아낸다. 사막이 바다가 되는 곳을 향해 몸부림치는 인간의 본원적인 서정을 표출하면서, 긴장과 공포를 시종일관 유지하는 솜씨를 보고 있자면,어째서 코넬리를 스릴러의 제왕이라 부르는지, 그리고 왜 그가 빚어낸 재미에 불잡혀 우리가 꼼짝할 수 없게 되는지 새삼 납득이 간다.

책을 읽을 때,책의 내용이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록 우리 두뇌는 관련된 내용을 의미있는 것으로 인식하는 화학물질을 방출한다고 한다.그렇다면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 대부분의 독자는 그로인해 격렬한 감정적 반응을 나타낼 듯 싶다.

캐시 블랙이 내리는 선택은 뜻밖의 선택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기에 차오르는 감동에 닫혔던 우리의 마음이 활짝 젖혀지게 되는 느낌을 받는다. 자동차의 가속 페달을 밟는 그녀 뒤를 잭 카치의 망령도, 자신의 범죄에 대한 갈망도, 맥스에 대한 죄책감도 따라붙지 못한다. 그 모든 것들 보다 앞서 달려나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우리도 그녀와 함께 마냥 달리게 된다.

우리의 삶 속에서 동력이 끊어지고, 절망의 그림자를 밟을 때마다, 이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며 용기를 얻게 될 듯 싶다.

 

끝내 스릴러와는 친해질 수 없다는 독자들 조차, 이 책을 한 번 잡으면, 쉽게 책을 놓지 못한 채 밤이 이슥하도록 페이지를 넘기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선다. 강력 추천이다.

 

 

 

 

 

(스팅이 몸담았던 그룹 폴리스 (The Police)의 앨범의 타이틀이 마침 [Synchronicity]라 이 앨범을 턴테이블 위에 여러차례 올려놓고 [보이드 문]을 읽었다. 스팅은 아서 쾨슬러의 열렬한 독자였는데, 그의 작품 [우연일치의 뿌리]라는 작품에 영감을 얻어 이 앨범 제목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책에 칼 융의 동시성(Synchronicity) 이론이 언급되어 있다.))

'의미있는 우연의 일치'를 융은 '동시성(Synchronicity)'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것은 좀더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우연은 아니다.

겉으로 드러나 눈에 보이는 현재의 세계가 전부는 아니고, 이 이면에는 감추어진 질서가 존재하며, 이 감추어진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서로 손을 맞잡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소위 '감추어진 질서' 속에서의 연결. 세상의 일은 우연히 벌어지고 있는 것 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동시성'이라는 방식으로 우주의 질서 안에서 관련지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다.

마이클 코넬리는 '운명'이라는 개념을 강화하기 위해 이 동시성(Synchronicity)을 작품 안으로 끌어 들였다.

 

동시성. 캐시는 그 단어의 뜻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지난 5년동안 꼼꼼하게 풀어봤던 [라스베이거스 선]의 크로스워드 퍼즐에 적어도 열두 번은 나온 단어였다. 겉으로는 별개로 보이지만 서로 관련된 일이 시간차를 두고 일어나는 것. 동시성. p.404

 

 

우주의 질서 속에서 어느 하나를 어그러뜨리면, 모든 것이 변한다.

 

 

파급 효과를 기억해. 방 안에 있는 뭔가를 바꾸면 그 일과 관련해 온 우주를 바꾸게 돼. 파급 효과를 미치는 거야.

p.132

 

하트 에이스를 떨어뜨림으로서 모든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것처럼, 의미있는 우연이 많은 것들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다 문득 맥스를 처음 만났을 때가 기억났다. 캐시는 언제나 그 만남을 서로 잘 어울리는 영혼들의 우연한 마주침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는 일, 캐시 자신에게는 결코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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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3-05-01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이안 레인과 알 파치노의 조화가 제법 어울리지만...이제 그들은 늙었기에...전 오히려 요즘 떠오르는 (이미 스타지만) 제니퍼 로렌스가 떠올르네요. 전 그녀의 대표작들보단 초기작인 "원터스 본"에서 정말 대단한 모습을 봤거든요. 이 소설의 여자주인공과도 제법 어울려보이고요.
 
레드브레스트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3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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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결국 우리 모두는 근시 아닐까

 

 

15살이 된 요 네스뵈는 어느날 몰데(molde)의 한 박물관에서 사진 한장을 본다.

 

그 사진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중에 불을 끄던 소방관의 사진이었다. 사진 속의 소방관은 묘하게 아버지를 닮아 있었고, 집으로 돌아온 요 네스뵈는 아버지에게 그 사진에 대해 이야기 한다.

 

제2차 세계대전.폭격. 화염.

 

아버지의 머리속에 부우욱 망령처럼 되살아나는 당시의 기억들.

 

네스뵈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 너의 형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단다. 네가 16살이 되면 알려주려 했지만, 말이 나왔으니 지금 이야기 해주마."

 

그렇게 해서 듣게 된 이야기는 믿겨지지 않는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제2차 세계 대전때 아버지는 독일의 히틀러를 위해서 레닌그라드 외곽에서 러시아군과 싸웠던 것이다. 독일의 나치 군모을 쓰고 있는 아버지의 사진까지 보니, 평소 아버지를 존경하던 어린 네스뵈는 자신의 세계가 한꺼번에 붕괴되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술회한다.

 

스탈린이냐, 히틀러냐..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당시 열 아홉살의 어린 아버지는 히틀러를 선택했던 것이다. 승승장구하던 독일이 패전 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게다가 어린시절을 미국에서 보낸 후 유럽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이 컸었다.) 당시의 많은 노르웨이 젊은이들이 히틀러를 유럽을 먹어치우려는 공산주의의 야욕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주는 구원자로 보았었다.

 

정치적 선택의 갈림길에 대한 딜레마는 진홍가슴새의 습성에 대한 엘렌의 다음 말에 잘 드러나 있다. 실로 '모든 선택은 하나의 포기(Every choice is a renunciation.)'라는 언명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 이 시기가 되면 진홍가슴새의 90퍼센트는 남쪽으로 떠나죠. 말하자면, 극소수만 위험을 감수하고 여기에 남는 거예요."

 

" 여기 남는 새들은 올겨울이 따뜻하리라는 희망을 품고 남은 거에요. 그렇게 되면 다행이지만, 그 기대가 어긋나면 죽는 거죠. 그렇다면 왜 그냥 만약을 대비해서 남쪽으로 날아가지 않는지 궁금하죠? 그냥 게으른 걸까요, 남아 있는 새들은?"

 

"중요한 사실은 만약 겨울이 따뜻하면, 다른 새들이 돌아오기 전에 최상의 위치에 둥지를 틀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계산된 위험인 셈이죠. 잘 되면 입이 찢어지도록 웃는 거고, 아니면 완전 엿먹는 거고요. 위험을 감수하느냐 마느냐. 괜히 도박을 했다가, 어느 날 밤 꽁꽁 얼어붙어 나뭇가지에 떨어질 수도 있어요. 봄이 올 때까지 얼어 있는 거죠. 반면 겁이 나서 남쪽으로 갔다가 돌아와보면, 둥지 틀 곳이 없을 수도 있고요. 사실 이건 우리가 늘 대면하는 영원한 딜레마예요." (p.17-18)

 

 

 

네스뵈의 아버지는, 더 나아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네스뵈의 아버지처럼) 독일 편에 섰던 1만 5천명의 노르웨이 젊은이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한쪽을 선택했던 것이다. 패자의 입장에 선 그들은 승리로만 자신을 치장하고픈 역사라는 위험한 거울을 통해 비춰질 자신들의 처참한 몰골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근시.

먼곳에 있는 물체를 잘 내다볼 수 없는 시력. 전쟁후 독일을 위해 싸웠다는 이유로 3년간 감옥 생활을 할 줄 알았더라면, 그로인해 그의 가족에게 경제적인 어려움이 봉착할 줄 미리 알았더라면, 네스뵈의 아버지는 분명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터이다.

그렇다. 그들은 우리 모두가 그러한 것 처럼, 앞을 내다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작품 곳곳에 근시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어쩌면 정말로 근시가 되어 가는지도 몰랐다.(p.20)

해리는 손으로 눈가에 그늘을 만들었다. 근시가 됐나? (p.21)

노인은 대답하며 의사를 바라보았다. 환자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눌 때는 안경을 벗으라고 의과대학에서 가르치기라도 하는 걸까?

아니면 근시인 의사들이 환자들과 시선을 피하기 위한 방법인 걸까? (p.34)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난 차라리 근시안적인 도덕주의와 결별하는 쪽을 택하겠어. (p.485)

 

반면에 앞날을 내다본듯 간교하게 살아남은 노인의 (여기에선 스포일링의 위험이 있으니 노인이라고만 쓴다) 시력은 상대적으로 매우 좋다. 

노인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베티는 깜짝 놀랐다. 물론 그녀의 명찰에 적힌 이름을 그대로 읽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노인의 시력이 아주 좋다는 뜻이다. 명찰 속 그녀의 이름은 그 위에 적힌 '접수원'이라는 직함보다도 더 작은 글씨였기 때문이다. (p.126)

 

 

 

 

 

이 작품이 기존의 요 네스뵈 작품과는 달리 더욱 깊은 맛이 느껴지는 이유는 소설 속에 사실을 바탕으로 둔 역사성을 과감하게 끌어들인데 있다. 그것도 감추고 싶었던 과거를 말이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신생국가였던 노르웨이는 아무래도 건전한 국가 이미지를 세우기 위해서 독일에 편들었던 과거보다는 저항했던 노르웨이의 레지스탕스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역사를 정립할 수 밖에 없었다. 종전 직후의 노르웨이는 강력한 저항운동으로 독일에게 대항한 것 처럼 비춰지고 싶어했다. (사실은 저항은 미약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노르웨이 정부와 역사가들은 악령을 항아리에 집에 넣고 봉인하는 것처럼 서둘러 독일 쪽 편에서 싸웠던 과거사를 덮어 버렸던 것이다. 이 경우 역사가가 사실의 친구라기 보다는, 사실의 비굴한 노예이거나 포악한 주인으로 전락한 셈이다.

 

하므로 요 네스뵈의 이 작품은 용기있게 시간을 거슬러 자신들의 어둡고 슬픈 과거를 드러냄으로서 자국민들이 그 당시의 진실과 상황을 폭넓게 볼 수 있도록 한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작품으로 평가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어두운 과거와 현재 진행중인 신나치주의와 연결시킴으로서 작품은 당대성까지도 획득하게 되었다. 묵은 상처를 끄집어 냄으로서 당대의 정치적 문맥과 결부시킨 작품이 비단 이 작품만은 아니겠으나,요 네스뵈 고유의 색채를 선보이며 납득할 만한 작품을 탄생시켰다고 느껴진다. 내가 앞 문장에서 '용기있게'라는 부사를 쓴 이유는, 이 작품이 작가 자신의 개인사가 고스란히 스며있기에, 요 네스뵈의 목소리가 그 어느 작품보다도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파고드는 목소리의 크기에 따라 비례하여 작품도 깊이와 설득력을 더 크게 얻었다.

 

"우리가 받은 처벌에 대해서라면 억울하지 않소. 난 현실주의자요. 우린 정치적 필요에 의해 재판을 받아야만 했소. 난 전쟁에 졌고. 그러니 불평따윈 하지 않아."(p.339)

 

"원통한 건 매국노라는 딱지가 붙은 거요.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소. 우리가 목숨걸고 이 나라를 지켰다는 걸. 그 사실이 위안이 된다오." (p.339) 이런 말은 실제로 요 네스뵈의 아버지가 했을 법한 매우 사실적인 말들이다.

 

 

 

"자신이 그런 일을 저지르기는 했어도, 여전히 이해받고 싶은 거야. 대부분의 인간이 그렇지, 알다시피.(p.533)"나 "어느 것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도덕적이고 비도덕적인 누가 결정할 수 있겠나? 심리학자? 법정? 정치가? (p.533)" 이런 대사들은 당시에 독일쪽으로 선택했던 사람들의 입장(아버지)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 같아서 확실히 다른 질감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네스뵈의 노력 때문일까. 최근의 젊은 역사가들에 의해 당시의 그 치욕적인 과거에 대해 객관적으로 역사를 쓰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이스라엘에서 출간된 히브리어 판본의 [레드브레스트].

                               제 2차 세계대전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민감한 주제인데,

                                리뷰를 읽어보니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었다.

      

 

 또 하나의 주인공 -매르클린 라이플

 

"매르클린 라이플은 독일에서 생산된 반자동 사냥총입니다. 라이플 중에서 가장 구경이 가장 큰 16밀리 총알을 사용하죠. 원래는 물소나 코끼리처럼 덩치 큰 동물들을 사냥할 목적으로 제작되었습니다. 1970년에 처음으로 생산되었는데, 겨우 300대가 제작되었던 1973년에 독일 정부가 판매를 금지시켰죠. 이유는 몇 가지의 간단한 조정과 매르클린의 망원조준기만 있으면 최강의 살인 무기로 이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73년 당시 이미 세상에서 수요가 가장 많은 암살 무기가 됐죠. 300대의 매르클린 중에서 최소한 100대는 살인청부업자 그리고 바더 마인호프나 붉은 여단 같은 테러 단체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흠. 100대라고 했나?" 마이리크가 인쇄물을 다시 해리에게 건냈다. "그렇다면 나머지 200대는 원래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는 뜻이군. 사냥에 말이야."

"매르클린은 무스 사냥을 비롯해 노르웨이에서 흔한 어떤 사냥에도 적합하지 않습니다."

"정말인가? 왜 그렇지?"

(중략)

"첫째로 노르웨이에서 사냥은 백만장자의 스포츠가 아닙니다. 망원 조준기가 달린 매르클린은 15만 마르크 정도 하는데, 다시 말해 벤츠 한 대 값이죠. 게다가 실탄 하나에 90마르크나 합니다. 둘째로 16밀리 총에 맞은 무스는 마치 기차와 충돌한 것처럼 보이죠. 꽤 지저분해집니다."

[레드브레스트], p.201-202

 

이 책에서 방안으로 들어온 코끼리만큼이나 강렬하고 묵직한 존재감을 보인 것은 '매르클린(Märklin)'이라는 사냥총이었다.

나는  위에 인용한 부분을 읽으며, 즉각적으로 '1막에서 총이 벽에 걸려있었다면, 그것은 마지막에 반드시 발사되어야한다. (If there is a gun hanging on the wall in the first act, it must fire in the last. )'라는 안톤 체홉의 말을 떠올렸다. 소위 '체홉의 총'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문구. 보통은 복선(foreshadowing)과 군더더기 없는 글 쓰기에 대한 대표적인 말로 언급되는데, 나는 그런 문학 장치적인 측면을 떠나, 액면 그대로 이 말을 생각했다. 초반부분에 나온 이 어마어마한 살상무기가 작품의 어느 순간에 발포되리라는 예상을 한 것이다. 과연 이 총을 맞을 대상은 누구이며,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목동의 피리소리를 따라가는 수백만마리의 쥐떼중의 한 마리처럼 정신없이 책을 읽어 나갔다.

생각해보니, 요 네스뵈의 이 '매르클린 라이플'에 대한 사랑은 꽤 깊은 듯 싶다. 뛰어난 완성도를 보였던 후기작 [레오파드]에도 매르클린 라이플에 대한 언급이 있어 [레드브레스트]를 읽은 독자들을 반갑게 했다.

 

물건을 둘러보던 해리의 시선이 검은 케이스에 조심스럽게 찍힌 글자에 멈췄다.

"이거, 제가 생각하는 물건이 맞습니까?" 해리가 물었다.

"매르클린이지. 아주 귀한 라이플이야. 실패작이라서 몇 자루밖에 생산되지 않았어. 지나치게 무겁고, 구경도 크지. 코끼리 사냥에 쓰인다네."

"그리고 인간 사냥에도요." 해리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 총에 대해 아나?"

"세계 최고의 망원 조준기가 달렸죠. 100미터 앞에서 코끼리를 잡을 때 필요한 물건은 아닙니다.암살용으로 딱 좋죠." 해리가 손으로 케이스를 쓰다듬자, 추억이 밀려들었다. "네, 이 총에 대해 좀 압니다."

-요 네스뵈,[레오파드], p.241

 

그리고 당연한 수순으로 이 총의 실재 존재여부에 대해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Märklin을 구글링해보면, 다음 사진과 같은 주로 독일산 장난감 기차모형의 이미지들이 찾아진다. 그리고 Marklin rifle을 검색어로 넣으면 미국산 '말린 사냥총(Marlin rifle)'이 검색결과에 잡힌다.

 

 

 

 

 

 

 

"어떤 총을 원해요?"

"라이플."

"그거야 쉽죠."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매르클리 라이플."

"매르클린? 장난감 기차회사요?" 올센이 물었다.

([레드브레스트], p.141)

 

 

상당한 시간을 소비하면서 찾아본 최종적인 검색 결과를 여기에 밝히자면, 이 책에 등장하는 매르클린 사냥총은 작가 요 네스뵈의 순수한 창작물이다. 요컨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총이란 이야기다. [레오파드]에서 화제가 되었던 가공할만한 고문기구 '레오폴드의 사과'에 이어서 [레드브레스트]에 등장하는 이  진귀한 사냥총도 순전히 요 네스뵈의 머리 속에서 나온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총의 실존 여부에 대해 궁금해서 추적하던 중,  ( BBC에서 제작한 55분짜리 월드북 클럽 인터뷰를 듣다가) 결국 작가의 입으로 '이것은 제 순수한 상상력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인터뷰에서 이 총 매르클린에 대해 너무 그럴듯하게 (사실적으로) 요 네스뵈가 이야기해서 진행자인 Harriett Gilbert가 실제로 존재하는 총이냐고 거듭 물었을 정도였다.

작가는 이 총의 이름을 장난감 기차로 유명한 독일의 유서깊은 장난감 회사인 Märklin에서 가져왔으며, 개인적으로 이름이 맘에 든다고 밝힌다. 혹자는 잘 알려진 미국의 '말린 사냥총 (Marlin rifle)'을 연상케하는 스펠링에 독일적인 분위기를 주기 위해 독일 장난감 회사 이름을따온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이 매르클린의 존재에 대한 논란은 이미 총기 매니아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는데, 거대한 16밀리 총알을 사용하는 것과, 코끼리나 물소사냥용이라는 묘사를 근거로 실존하는 사냥총 중에 영국산 600 Nitro Express (15.75mm의 총알을 사용)를 모델로 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꽤 있었다.이것은 1899년 개발된 두개의 총신을 가진 코끼리 사냥총이다. 아래에 올린 사냥총은 매르클린의 모델이 되었을 법한 600 Nitro Express 사냥총. 매르클린처럼 코끼리나 물소 사냥을 위한 만들어진 총이다.

 

 

 

  

 

 

 

15.75밀리미터 총알의 위용.(사진에서 오른쪽) 매르클린의 거대한 총알은 대략 이런 느낌이다라는 것을 이 사진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매르클린 사냥총을 손에 넣은 범인이 최후로 노리는 대상은 과연 누구일까? 이 총의 파괴력은 과연 어느정도일까,코끼리를 쏘기 위해 만든 총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저런 궁금증을 당의정 삼아 핥으며 책을 읽으면 어느새 책은 끝나버린다.

 

 

이 작품의 번역에 관하여

요 네스뵈의 전담 영문 번역가인 돈 바틀렛(Don Bartlett)에게 어떤 번역가를 존경하냐고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은 '인터넷의 혜택을 받지 못했던 시절에 작업했던 번역가들'이었다.

 

그렇다. 필경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 번역은 더욱 힘들었을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하지만 인터넷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현재에도 번역이란, 특히 좋은 번역이란 좀처럼 이루어 내기 힘든 일임에 틀림없다. 돈 바틀렛에 따르면 좋은 번역을 위한 최고의 시나리오는 작가,번역자,편집자 셋이 완전히 참여해서 서로를 믿으며 일하는 것이라 한다. 번역자가 원문 텍스트에서 읽을만한 버전의 번역본을 편집자에게 넘기면, 편집자는 언어의 사용과 작품과 시리즈 내에서 일관성을 점검하는 일을 한다. 요 네스뵈의 작품의 경우, 번역자와 편집자가 이런것들을 확실히하기 위해 매우 밀접하게 작업한다고 밝힌다.

 

 

 

국내 번역본의 제작 과정을 상세하게 아는 것은 아니지만, 출판사의 웹사이트를 들낙거리며 알게 된 것은, 편집자와 번역자 모두 충실함과 완벽을 위해 상당한 공을 들였다는 점이다. 특히 빼어난 번역가라고 칭찬받는 돈 바틀렛이 번역한 영어 판본 번역본을 능가하는 면은, 노진선님의 번역은 독자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는 점이다. 책에 대한 배경을 모두 숙지한 후, 꼼꼼하게 쓰신 역주는 책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되었다.(영어판본에는 역주없음.)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유럽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이 책에는 독일어와 러시아어가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모두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다.(영어판본에는 독일어와 러시아가 그대로 나오고 영어번역이 되어있지 않기에 그 언어를 모르면 이해할 수 없기에 매우 불친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Redbreast를 울새나 개똥지빠귀가 아닌, 진홍가슴새로 번역한 부분은 특히 탁월한 선택이어서 감탄했다. 맨 첫장에 작가가 인용한 셀마 라게를뢰프의 ' 진홍가슴새의 비밀(Christ Legends)'의 이미지와도 맞고, 개똥지빠귀라는 이름에서는 얻을 수 없는 시적(詩的)인 분위기를 획득했기 때문이다.

 

 

 

요 네스뵈에 따르면 돈 바틀렛의 번역이 훌륭하지만, 언어란 복잡한 것이기에 노르웨이어에서 영어로 번역되면서 사라지는 것 중 하나가 자신이 작품에서 심어놓은 '유머(humor)'라며 아쉬워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노르웨이어에서 영어로 번역되는 과정에 참여하거나 조절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작가가 할일은 그저 믿고 맡기는 일이라고 그는 말한다.

 

개인적으로 국내판 [레드브레스트]의 경우, 번역이 참 좋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p.332쪽의 (집으로 가는 길에 해리는 자신에게 어떤 벌을 줄까 고민했다. 뭔가 가혹하면서도 앞으로 다시는 이런 짓을 할 수 없게 만드는 벌이어야 한다. 에어로빅 수업을 들어야겠다.)

 

 

 

이런 부분에서 해리의 유머감각이 드러나 빙긋이 웃게 되었고, part 5 [일곱날]에 해리홀레가 엘렌의 자동응답기에 남기는 장면에선 차오르는 슬픔외에는 선택할 감정이 없었다. 이렇게 독자의 감정을 쥐락펴락하는 것의 일차적인 공로는 물론 작가겠지만, 좋은 번역없이는 그러한 전달이 불가능하다고 단언 할 수 있다. 영문판본으로 읽었을 때보다, 한국어 번역본으로 읽었을 때 훨씬 좋았고 감동적인 이유는 내 짧은 영어실력 탓이 있었지만, 위화감없는 매끄러운 번역의 덕이 무척 크다. 눈앞을 가리고 있던 베일이 싹 걷힌 듯한 느낌이랄까.

 

 

 

 

 

총평

게오르그 루카치는 위대한 작가의 특징으로 '진실의 대한 갈증, 현실성의 열광적인 추구, 그리고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라고 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요 네스뵈는 이 세가지를 모두 만족시킨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특히 기존의 두 작품 [스노우맨]과 [레오파드]도 좋았지만, 이 작품을 읽고 나서 더욱 그러한 느낌을 받았다.

 

이 작품은 루카치가 말한 예술가는 외부세계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비출수 있는 청명한 거울 역할을 한다라는 말을 상기 시킨다. 봉인해 버리고 싶었던 과거사를 왜곡없이 비추는 용기 있는 작품이다. 암초로 치부되던 노르웨의 과거사를 가감없이 보여주어 오히려 제대로 된 방향을 인도해주는 등대같은 역할을 해주고 있다.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거대한 체스판의 졸(卒) 신세였던 젊은이들이 내린 선택이 결국 어떤 지점까지 그들을 인도했는지를 다양한 시각으로 묘사했는데, 이를 통해 사회의 부당한 오해를 씻고 과거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제공했다. 주안점을 역사쪽에 맞추어도 상당히 흥미있고, 미스터리 스릴러 쪽으로 맞춰도 꽤 만족스럽다. 이 작품을 쓸 당시에 네스뵈의 에너지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작품이다. 이런 큰 얼개의 작품을 만들기위해서는 아무래도 작가적 역량이 담보되어야하는데, 역시 요 네스뵈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큰 주제의 무게에 스토리가 무너져 내리지 않았다. 기대치를 훌쩍 넘어선다.

 

히브리어로 된 성경의 인물들이 등장하고, 유명한 성경 테마인 다윗과 밧세바, 우리아의 일화가 작품속의 인물들과 포개져서 강한 상징성을 드러낸다. 이런 기술적인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이.야.기.가 있다는 점이 이 작품을 빛나게 하는 요소일 것이다. 요 네스뵈만이 할 수 있는 진짜 이야기가 있어서일까. 읽는 사람의 마음이 움직여진다. 몇몇 장면과 문장은 몇번이고 읽고 싶을 정도로 빼어나게 아름답다.

 

이런 기분을 나 혼자만 느끼기엔 미안할 정도로 작품이 근사하다. 주저없이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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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3-04-01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덕분에 요 네스뵈의 [스노우맨]을 얼마전에 읽었어요,,,이 책도 읽으려고요. 그래서 리뷰는 책 읽고 읽을게요,,,[레오파드]도 그렇고,,,하악하악,,아니 어찌 책을 이렇게 빨리 많이 읽으시는지????쫓아가기 힘드네요,,,,ㅎㅎㅎㅎㅎㅎ

Mephistopheles 2013-04-01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비슷하게 곰사냥, 코끼리 사냥에 쓰이는 라이플이 있긴 있었는데...반동이 워낙 심하다 보니 명중률이 아주 높진 않았나 봅니다. 그래도 타겟이 무식하게 크다보니 대부분 맞긴 맞았다곤 하지만 곰이란 동물은 심장에서 1센치만 벗어나도 무시무시한 반격을 하는 포유류 최강의 생물이라 별 효용은 없었을 꺼에요. 영화 불가사리 보면 그 비슷한 라이플이 나오긴 합니다.(어제 저녁에 홀레가 발사한 라이플에 두 인물이 박살나는 걸 읽은 1인)

nude 2013-09-14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헤드헌터, 스노우맨, 레오파드에 이어 현재 레드브레스트를 읽고 있는 중입니다. 저도 매르클린이란 가상의 무기가 궁금하였는데 이 글을 읽고 의문점이 해결이 되었습니다. 좋은 리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