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드 문 - 달이 숨는 시간,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7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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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노 칩보다는 물에 빠졌을 때의 기포에 초점을 맞춰 찍은 사진이다. 카지노 칩을 반복적으로 던져서 튀어오르는 물방울이 가장 아름다운 것을 선택했다. 물거품이 헛됨, 공허함을 나타내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 한글 판본 표지에서도 느껴지듯이 이 소설의 배경은 카지노의 도시 라스 베이거스다. 사막에 세워진 욕망의 도시. 트럼프와 카지노 칩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

 

코넬리가 만들어낸 소우주

 

스티븐 킹은 [뉴요커]와의 어느 인터뷰에서 소설이란 땅 속의 화석처럼 발굴되는 것이라고 믿는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마이클 코넬리가 발굴한 것은 실로 대단한 것인 셈이다. 그는 사람이 자고 있는 호텔 방에 들어가 현금이나 보석, 노트북 컴퓨터등을 훔치는 사람의 이야기를 LAPD 경찰로부터 듣고, 이 작품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 캐시 블랙(Cassie Black)을 구상했다고 한다.

범죄자에 대한 짧은 이야기로 작가는 독자들이 푹 빠지게 만드는 하나의 소우주를 창조해 냈다.

이 전까지 경찰의 관점에서 8권의 책을 쓰던 작가에게 이런 범죄자의 시선에서 쓴 작품은 적잖은 도전이었음을 고백한다.

게다가 이전에는 쓴 적이 없었던 여성 주인공이라는 점도 이 책이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들 속에서 갖는 의미가 크다.

작가는 주인공 캐릭터에 사실감을 불어 넣기 위해,"여자 (a woman)라면 그곳에서 무엇을 할까?"라는 생각보다는 " 이 사람(a person)이 그곳에서 무엇을 할까?"라는 관점으로 글을 썼다고 한다.

 

 

 

Void Moon -제목이 갖는 상징성

 

 

아직도 점을 치는 사람들이 있다니. 그들의 점괘로 혜성처럼 나타날 불길한 날들.

- 이성복(시인)

 

 

고도로 기술문명이 발달된 현대사회에서도 사람들은 미신을 계속 믿고 있다. 미신이 여지껏 건재한 까닭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어떤 상황에 대해 개인을 초월하는 어떤 힘이 있다고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믿기 때문일 것이다.

미신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곳은 어디인가, 우선 스포츠 분야를 떠올릴 수 있다. 프로야구선수들이 타석에서 보이는 일련의 행동,의식(가령 정해진 횟수만큼 흙을 발로 차고, 헬멧등을 고쳐쓰고 정해진 횟수만큼 방망이를 투수쪽으로 휘두르는 행위)은 비논리적이고 터무니 없어 보이지만, 그런 행위를 보였을때 얻었던 홈런이나, 안타와 같은 보상행위로 인해 강화된 행동임에 틀림없다. 인간의 마음 회로에 그것이 원인과 결과라는 연결고리를 형성하게된 것이다.

스포츠 분야말고 이런 미신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또 다른 곳은 바로 도박판이다.

행운과 불운이 지배하는 곳.

이 책은 수 많은 사람들이 운과 불운을 뼈저리게 느끼는 도박의 도시, 라스베이거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때문일까. 이 작품에는 많은 미신, 점성술, 카발라, 오컬트적인 요소들이 그득하다. 등장인물 중 레오 렌프로의 존재이유 중 하나는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다. 그는 점성술이 가장 흥했다는 신바빌로니아의 사제가 되었어도 손색이 없었을 정도로 점성술과 미신의 숭배자이다.이름도 '사자자리'를 뜻하는 Leo 아닌가. (그 옛날,작업을 앞두고 레오가 자신과 맥스에게 강요했던 온갖 규칙과 예방책이 생각났다. 작업 전에는 검은색에 베팅하지 마라., 닭고기를 먹지마라. 빨간 모자를 쓰지 마라 등등. 그런 것들이 캐시에게는 금을 밟으면 엄마 등이 부러진다는 식의 미신처럼 느껴졌다. (p.62))

 

하물며 주인공은 미신적 행위를 배제 하기 힘든 도둑이다. (불잡히느냐 마느냐가 너무도 중요한 그들에게 이성으로 설명하기 힘든 금기와 미신은 태생적으로 그들에게 씻어내기 힘든 무엇이다.) 프롤로그에서 맥스가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 그건 의식의 일부라고 말하는 장면 (맥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건 의식의 일부였다.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p.6))은 바로 이런 도둑들의 심리와 행동을 잘 보여준다.

게다가 이 책의 시간적 배경은 1999년이다. 세기말적 분위기에 휩싸였던 시기아닌가. 작가는 영민하게도, 점성술을 믿는 사람들에게 검은 고양이와 같은-불운의 상징인 보이드 문(Void Moon)이라는 개념을 작품에 끌어들였고, 급기야는 제목으로 사용하기까지 했다.

 

 

 

(잘 찍은 달 사진은 아니지만, 직접 찍은 사진으로 올리고 싶어서 200mm 렌즈로 찍어본 보름달 사진. 코넬리는 달이 갖는 상징성을 십분 활용하여 작품을 썼다.)

 

근데 보이드 문이 뭐죠?

"점성학적 현상이야. 달이 한 별자리에서 다른 별자리로 옮겨갈 때, 어떤 별자리에도 속하지 않는 때가 생기지. 그런 현상이 일어나면 달이 다음 별자리로 들어갈 때까지 '보이드 오브 코스 (void of course)'상태에 있다고 해. 그게 보이드 문이야. (중략)

그 시간은 운이 따르지 않는 때야, 캐시. 보이드 문 아래에서는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어. 어떤 나쁜 일이라도 말이지. 그러니까 그 시간에는 꼼짝 말고 있으라는 얘기야." p.83

 

또한 작가는 달이 갖고 있는 미신적인 요소를 십분 활용한다. 미국 사람들은 보름달을 너무 오래 쳐다보는 사람은 미칠 가능성이 높다고 믿거나, 보름달이 뜨면 말다툼이 생기고, 이상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미신을 슬쩍 건드린다.

 

그럴 만도 하죠. 오늘 밤엔 사람들이 좀 거치네요. 달 때문인가봐요. 보름달이에요. 못봤어요? 이 도시에 있는 어떤 네온 간판보다도 밝게 빛나고 있어요. 언제나 보름달이 뜨는 밤에는 이 도시 사람들이 좀 더 날카로워지는 것 같아요. 여기 오래 있어서 그런 모습을 많이 봤어요.

p.150

 

또 하나. 달의 순환과 여성의 생리적 순환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달이 여성성을 상징한다는 것은, 비둘기가 평화를 상징한다는 것 만큼이나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달(Moon)'이 들어가는 제목과 여자 주인공을 처음으로 전면에 내세운 점은 분명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달은 떠있는 시간때문에 밤의 이미지를 환기시킨다. 밤에 활동하는 도둑인 캐시 블랙(Cassie Black). 검정(Black)은 밤을 상징하는 색이라는 점까지 고려한다면, 작가가 여러모로 신경 쓴 이름이다.

void라는 단어는, 공허한, 텅빈 (느낌)을 나타내는 뜻이 있다. 영어로 '그 무엇도 그의 죽음이 만들어낸 공허함을 채울 수 없다'라고 쓰면, 'Nothing can fill the void made by his death.' 정도가 될 텐데, 캐시 블랙의 마음이 딱 그러하다.

그녀는 인생의 순간 순간, 추운날 곱은 손을 녹이기기 위해 불을 쬐듯이 죽은 스승이자 남편인 맥스가 만들어내는 추억에 언마음을 녹인다.그리고 그리움은 뾰족한 송곳이 되어 그녀를 찌른다. 그렇다면 Void Moon이란 '공허한 여인'이라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그녀의 기억은 끝없는 풀밭과 같다. 맥스의 망령이 생의 순간 순간마다 달그락 거리며, 그녀의 마음 속에서 풀을 뜯고 있다.

 

 

준비 작업을 하는 동안 캐시는 자신의 스승이자 애인이었던 맥스와의 추억이 자꾸만 떠올랐다.클레오파트라 호텔에서의 비극적인 결말은 빼고 좋은 시절만 끄집어낼수는 없었다. p.54

 

자꾸만 맥스가 떠올랐다. 그와 함께했던 시절과 그의 마지막도 생각났다. 돌아오자마자 이렇게 지독한 고통과 회한에 사로잡힐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라스베이거스는 항상 풍경이 변하고, 스스로를 재창조한다. 본질적으로 보기 좋은 허울에 불과한 한 장소가 그토록 애특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곳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곳이 그랬다. 그리움이 사무쳤다. 캐시는 맥스 이후로 다른 남자를 사귄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 고통은 자신이 평생을 안고 가야 할 그리고 순순히 받아들여야 할 유일한 재산일지도 모른다. p.89

 

작품 전체에 맥스에 대한 캐시의 사랑과 그리움이 미만해 있기때문일까, 내가 받은 전반적인 느낌은 애틋함과 애잔함이었다. 범죄자인 캐시에 대한 호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이런 캐시의 인간적인 면모 때문이었던 것 같다.

삶 속에서 맥스의 윤곽을 지우지 못하고, 출렁거리는 공허함의 바다 속에서 생활하는 그녀에게 괴로움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한 그녀에게 또 다른 공허함을 주는 것은 딸과 함께 지내지 못한다는 점일 것이다. 이것은 그녀에게 공허함과 동시에 살아야 할 이유를 제공한다.

이 지점에서 대두되는 것이 바로 이 책을 채우고 있는 캐시 블랙의 모성애와 엄마로서의 책임이다. (앞서 말한) 달이 품고 있는 여성성때문에 점성술에서 달은 어머니, 모성애, 자궁, 가정을 상징한다.

 

마이클 코넬리는 이 작품을 완성한(2000년) 무렵, 처음으로 아버지가 된 지 얼마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자신의 글쓰기에 아버지/어머니적인 본능이 스며들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아버지다움으로 충만했던 코넬리가 자신의 부성애을 캐시 블랙에게 투영시키며 글을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void에는 트럼프 카드에서 짝패가 없는 것 나타내는 뜻도 있다.( a lack of any cards in one suit)

작품의 배경은 라스베이거스. 라스베이거스 하면, 카지노, 카지노하면 트럼프 카드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이 void라는 단어의 다층적인 의미를 이용하여 제목으로 사용하고, 또 그런 장면을 작품 속에 집어 넣은 코넬리에게 경탄을 금할 수가 없다.

 

재빨리 카드를 꺼내 한장씩 넘겼다. 확인하고 넘어가는 카드가 많아질 수록 두려움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카드도 하트 에이스가 아닌 것을 확인 했을 때, 캐시는 큰 소리로 욕을 내뱉으면서 카드 뭉치를 집어던졌다.

(중략)

"뭐야? 52픽업 게임하고 있었어?"

"51픽업이라고 해야 맞겠는데요." p.316

 

작가는 이것에 멈추지 않고, 두 주인공을 상징하는 카드를 독자에게 내어 보인다.

 

 

두 명의 주인공 - Ace of Hearts VS Jack of Hearts

 

에이스 오브 하트(Ace of Hearts)의 특징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하트 에이스'는 강력하고 독립적인 여성들을 끌어당기며, 하트가 감정을 뜻하기에 누군가의 가장 가까운 관계를 의미한다. 가령 엄마와 딸이나 남편과 아내, 연인같은 친밀한 관계 말이다. 비록 이 카드가 사랑에 대한 열망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돈에 대한 욕구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 이유는 이 카드의 숙명적 존재에 해당하는 카드가 바로 다이아몬드 에이스이기 때문이다.

이런 설명을 들으니, 마이클 코넬리가 다른 카드가 아닌 '에이스 오브 하트'를 '캐시 블랙'을 상징하는 카드로 선택한 것은 당연한 결과인 듯 보인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선인이 아니라, 악인들인데, 주인공 캐시 블랙이 다른 주인공들과 차별화 되는 것은 바로 마음(heart)를 갖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마이클 코넬리는 독자들이 캐시 블랙이 감옥에 들어가게되었던 이유가 '사랑'때문이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글을 썼다고 한다.

캐시 블랙.

강인하고 독립적인 여성.

맥스에 대한 사랑의 추억 속에서 매일 그를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그녀는 맥스와 자신의 딸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넘치며, 자신과 딸의 행복을 위해 돈이 필요하다.

카드 점에서 이 카드는 사랑과 행복을 나타내는데, 과연 캐시는 그녀가 아끼고 사랑하는 존재와 행복해 질 수 있을까.

 

한편 잭 오브 스페이드 (Jack of Spades)는 이 책의 남자 주인공에 해당하는 잭 카치(Jack Karch)의 별명이다.

 

잭 오브 스페이드 카드는 오랫동안 거짓말쟁이,사기꾼, 악당, 죄수,반역자, 도둑, 질투..등 좋은 않은 것의 대명사로 불리워 왔던 카드다. 간단히 한마디로 정의하면 나쁜 녀석(The bad boy)라 할 수 있는 의미를 지닌 카드라할까. 작가가 이름이나 별명을 허투루 짓지 않으며 상당히 고심해서 만드는 것은 상식중의 상식. 결국 잭 카치의 별명으로 이것 만한 것은 없다.

특히 spade는 영어로 '삽'이란 뜻이 있기에 시체를 사막에서 처리하기위해 자동차 트렁크에 삽을 넣고 다니는 잭 카치에게 어울린다.

"자넬 잭 오브 스페이드라고 부르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구먼. 트렁크에 삽을 넣고 다니니 말이야."(p.251)

사실 스페이드는 영어로 '삽'이라는 뜻을 갖고 있지만, 원래는 '스파다'라는 이탈리아어(스페인어로는 '에스파다')에서 기인한다.

'스파다'의 의미는 '검(칼)'을 의미하며, 스페이드의 모양도 칼모양에서 연유한다. 하므로 이 작품 속에서 폭력과 광기의 상징과 같은 잭 카치가 잭 오브 스페이드 카드로 설정한 것에 대해 설명된다. Jack of Spades가 상징하는 인물은 '올거 더 데인 (Ogier The Dane)'이라는 샤를 마뉴의 12 성기사중 한 명인데, 전설에 따르면 Courtain이라는 명검을 들고 다녔다고 한다. 이래저래 검과 관련된다.

 

잭 카치(Jack Karch)의 성(姓)인 Karch는 'karc'에서 왔는데, karc의 의미가 중세 독일어의 '교활한 (cunning), 남모르게 살짝하는 (Sly)'에서 유래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 처럼 많은 성들이 처음에는 별명에서 기인했던 것이다. 우리말로 하면 '교활한 잭' 정도가 되겠다.

 

작가가 '캐시 블랙'이란 이름과 '잭 카치'란 주인공의 이름에 매우 신경을 썼다는 것은 작품의 여러 대목에서 드러난다.

다음은 캐시 블랙과 잭 카치에 대한 이름 관한 작가의 설명으로 사용된 것.

 

캐시. 어떤 이름의 약잔가? 카산드라?"

"캐시디요."

'부치 캐시디 할때 그 캐시디? 부모님이 범법자를 좋아하셨나보군.'

'아뇨. 닐 캐시디 할 때 캐시디요. 아버지도 항상 여행을 다니셨죠. 어쟀든 그렇다고 들었어요."

p.323

 

잭 카치는 어릴 때 종종 마술사인 아버지와 합동 마술 공연을 하기도 했다. 작고한 그의 아버지는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초까지 스트립의 여러 카지노와 호텔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유명 마술사 '놀라운 카치!'이다.

아들 카치는 '잭 오브 스페이드'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이는 아버지 카치가 아들 카치를 우편낭에 넣어 자물쇠로 잠그고 그 우편낭을 다시 커다란 상자에 넣은 후 자물쇠로 잠갔다 다시 열자 아들은 사라지고 대신 스페이드 잭 카드 한 장만 남아있던 마술쇼에서 유래한 것이다.

p.243

 

 

캐시 블랙과 잭 카치는 둘다 범죄자라는 점에서만 같을 뿐, 둘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은 판이하게 다르다. 캐시 블랙은 사막이 바다가 되는 곳을 마음 속에 그리며 살아 가는 인물이다. 그래서 [달과 6펜스]에 나오는 스트릭랜드가 타히티 섬을 자신의 도피처이자 영혼의 고향으로 삼은 것처럼, 캐시와 맥스는 그 곳을 생각하며 현실을 견뎌 낸다.

 

그 후 캐시와 맥스는 섬으로 갔고, 복제를 하거나 타락시킬 수 없는 곳이 적어도 한 군데는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p.88

 

마지막을 위하여, 사막이 바다가 되는 곳을 위하여.(To the end. To the place where the desert is ocean.) (p.151)

 

 

 

잭 카치가 캐시 블랙의 집에서 발견한 액자 뒤쪽 판지에 적혀 있는 써머싯 몸의 글을 통해 작가는 슬쩍 [달과 6펜스]와의 연관성을 드러낸다.

 

" 고개를 들어 타히티의 윤곽을 보는 순간, 나는 이곳이 내가 평생동안 찾고 있던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I looked up and saw the outline of Tahiti and I realized this was the place I had been looking fo all my life.)"

 

여담인데, [달과 6펜스]라는 작품 제목에도 달(Moon)이 등장한다. 익히 알려진대로 달은 '꿈'을, 6펜스는 '현실'을 의미한다. 캐시 블랙이 억눌린 과거라는 울타리 속에서도 '달'을 꿈꾸며 사는 인물이라면, 잭 카치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이다. 소설 속에서 잭 카치가 끊임없이 25센트짜리 동전을 만지작 거리며 동전 마술을 하는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세계의 전모는 다음과 같은 양식으로 이해된다.

 

카치는 팔츠 너머에 있는 관목 지대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조슈아나무를 바라보다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사막은 황량한 모습일 때 진정으로 아름답다.

p.230

 

사막이 사막일 때 진정 아름답다고 느끼는 냉혈한. 욕망의 도시를 대변하는 것 같은 인물. 그의 광기는 모두 이런 세계관에서 빚어지는 것이다. 반면 사막이 바다가 되는 곳은 쫓으며 삶을 살아가며 그것이 다름 아닌 마음(heart)이란 것을 깨닫게 되는 캐시 블랙과는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이러한 극명한 대조가 주는 긴장감이 끝까지 무기력해지지 않으며 독자의 주의를 끈다.

 

그런데, 잭 카치를 작품내에서 지독하게 잔인한 살인마로 묘사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간단하다. 악당인 캐시 블랙에 몇 백배 악한 인물을 만들어낸 이유는 독자가 상대적으로 선한 캐시 블랙을 응원하고, 감정이입을 통해 작품 속에 빠져들게 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잭 카치는 소위 도덕적 사고능력, 충동적 행동 욕구에 제동을 걸고 억압하는 전두엽에 손상을 입은 싸이코페스로 같은 존재다. 그리하여 자신의 감정과 (살인)욕구를 서슴없이 따르기에 평범한 사람이라면 악몽 속에서나 해봄직한 행동을 거침없이 실행에 옮기는 인물이라 하겠다. 함부르크의 사회학자 얀 필립 림츠마는 감정이입이 결여되며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다고 하는데, 잭 카치가 바로 그런 타입의 악인인 셈이다. 얼핏 생각하기에 이런 악인은 소설 속에서 판지처럼 일차원적인, 전형적인 인물이되기 쉬운데, 스릴러의 대가인 코넬리는 잭 카치의 아버지와 연관된 과거를 슬쩍 슬쩍 이야기 속에 끼워놓는 기술을 써서 잭 카치란 악인을 살아있는 인물로 만들어 놓았다. 실로 질투심이 들 정도로 대단한 솜씨다.

 

제인 데이비스 (Jane Davis)

 

그런데, 한편으로는 작가의 작명에 대해 너무 대단한 것을 기대하는 일은 금물일 듯 싶다. 꿈보다 해몽이 되기 십상이다. 가령, 캐시 블랙이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해 여권에 새겨 넣은 새 이름이 '제인 데이비스(Jane Davis)'인데, 어떤 대단한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별다른 뜻 없이 지은 작가 주변인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어에 근원을 둔 이름들의 십중 팔구가 야훼(하나님)와 관련이 있기에, 그것을 그럴싸한 의미망으로 잡아내어 작품을 해석해 나갈 수 있겠지만, '제인 데이비스'는 단지 마이클 코넬리의 작가 웹사이트를 만들고, 관리하고 있는 여동생 이름일 뿐이다. 데이비스란 성을 가진 남자와 결혼한 여동생 제인 코넬리. 다시말하면, 캐시 블랙이나 잭 카치처럼,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맞춰 특별히 생각해서 지은 이름이라기보다는, "이쯤에서 사이트 만들고, 관리하느라 애쓰고 있는 여동생 이름을 한 작품 정도에는 써줘야 겠네."하는 기분으로 가볍게 넣어줬다는 느낌이랄까.

코넬리의 다른 작품에서도 이런 작명 습관은 종종 볼 수 있다. 가령 [탄환의 심판]에 등장하는 미키의 조사원 탐정인,'데니스 워치에초브스키'란 발음이 쉽지 않은 이색적인 이름의 소유자가 있다. 이 인물은 코넬리가 책이 나오기까지 도움을 준 사람이라 감사의 의미로 작명하여 작품 속 인물의 이름으로 활용한 것이다.([탄환의 심판] 맨 뒤에 있는 코넬리가 쓴 '책이 나오는데 수고해줘서 감사하고 싶은 인물'에 어김 없이 '제인 데이비스'가 있다.이 책 [보이드 문]의 '감사의 말'에도 '내 웹사이트의 디자이너이자 관리자인 제인 데이비스에게도 항상 웹사이트를 최신으로 흥미롭게 꾸며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라고 밝히고 있다. 제인 데이비스가 코넬리의 웹페이지 마스터이자, 여자 형제라는 것은 코넬리 팬에게는 널리 알려진 사실.)

이런 뒷이야기는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마치 인류가 달을 정복하기 전에, 달에 대한 이런 저런 환상과 이야기를 가졌지만, 달 착륙 이후 달의 실체를 알고, 낭만적 환상이 깨져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할까. 하지만 작가는 작품을 쓰고, 그것에 대한 해석은 전적으로 독자들 몫이니(오독(誤讀)은 세상 모든 독자의 특권이며, 이해는 오해이 일부일 뿐 아닌가.), 작가의 작명 의도가 원래 무엇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총평

 

마이클 코넬리는 본인이 영화 시나리오를 쓴다는 조건 하에 이 작품의 영화화 권리를 팔았고, 그것이 예정대로(2003년) 딤임팩트와 피스 메이커등을 만들었던 미미 래더 감독에 의해 영상으로 옮겨졌었더라면, (캐시 블랙 역에 다이안 레인, 잭 카치역에 알파치노가 거론되었다고 한다) 영화 개봉과 함께 출간되어 우리는 이 근사한 작품을 좀 더 일찍 접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계획이 무산되면서 우리는 이 걸작을 자그마치 13년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뒤늦게 공개된 이 작품이 전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별로 받지 못했다. (캐시 블랙이 자신의 작업에 디지털 카메라를 쓰지 않고, 폴라로이드를 쓰는 장면에서만 그런 느낌을 좀 받았을 뿐이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은 걸작이란 바로 이런 작품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말했지만 이 작품 [Void Moon]은 코넬리 최초의 여성 주인공이라는 점도 부각되지만, 무엇보다 코넬리가 범죄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최초의 작품이었기에 더욱 의의가 있다. 범죄자가 주인공이기에 독자들은 쉽게 동화되거나 연민을 느끼기 어렵다는 것은 상식. 게다가 독자가 이런 범법자에게 호감을 느끼게 해야하기에 더욱 힘들다.

마이클 코넬리는 독자의 동화를 위해서 세가지 전략을 썼다. 첫째 여성 주인공을 망각만이 구원이 될 것 같은, 과거의 그림자에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 속에 놓았다. (그것에 더하여, 모성애와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을 공유하는 레오와 정서적 공감대도 작품 전체에 애잔함과 서글픔의 색조를 띄는데 큰 역할을 했다.)

둘째,여자 주인공을 뒤쫓는 '악의 화신'이라 불러도 좋을만큼의 악인의 존재다. 캐시의 피에 흐르는 범법자의 주스가 애교로 느껴질 만큼의 강력한 싸이코패스라 그녀의 죄는 쉽게 희석된다. (이 작품은 잭 카치의 등장으로 굉장한 스피드를 얻는다. 거장의 솜씨로 악인이지만 무척 매력적으로 그려졌다. 전형성으로 채색된 '죽은' 인물이 아닌 탄력있는 악인이다. 악(惡)이 오롯이 자신의 이익에 의해서만 조정되는 행동이라 예나지금이나 우리의 마음을 끌기 때문에 그가 매력적으로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셋째, 주인공이 자신의 일에 최고의 전문가인 점을 부각 시켰다. 중반부에 펼쳐지는 그녀의 솜씨는 비록 범죄이긴 하지만 감탄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내가 스릴러에 대해 문맹이나 다름없었던 시절, '스릴러'라는 신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는바로 마이클 코넬리의 [시인]이라는 작품을 통해서였다.이 작품을 읽은 후 -나는 다른 수 많은 독자들처럼- 굶주린 듯 그의 책을 구해서 읽었고, 이 책 이후로 장르 소설에 대한 내 마음 가짐이 영원히 달라지고 말았을 정도로 마이클 코넬리는 내게 의미 깊은 작가다.

국내에 번역된 그의 여러 작품들을 두루 읽으면서, 스릴러 읽는 재미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이번 작품도 예외는 아니다.

막막한 슬픔의 분위기를 작품 전반에 스며들게 하면서, 한편으로 불꽃을 튀기며 타들어가는 도화선을 바라보는 것 같은 긴장감을 자아낸다. 사막이 바다가 되는 곳을 향해 몸부림치는 인간의 본원적인 서정을 표출하면서, 긴장과 공포를 시종일관 유지하는 솜씨를 보고 있자면,어째서 코넬리를 스릴러의 제왕이라 부르는지, 그리고 왜 그가 빚어낸 재미에 불잡혀 우리가 꼼짝할 수 없게 되는지 새삼 납득이 간다.

책을 읽을 때,책의 내용이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록 우리 두뇌는 관련된 내용을 의미있는 것으로 인식하는 화학물질을 방출한다고 한다.그렇다면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 대부분의 독자는 그로인해 격렬한 감정적 반응을 나타낼 듯 싶다.

캐시 블랙이 내리는 선택은 뜻밖의 선택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기에 차오르는 감동에 닫혔던 우리의 마음이 활짝 젖혀지게 되는 느낌을 받는다. 자동차의 가속 페달을 밟는 그녀 뒤를 잭 카치의 망령도, 자신의 범죄에 대한 갈망도, 맥스에 대한 죄책감도 따라붙지 못한다. 그 모든 것들 보다 앞서 달려나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우리도 그녀와 함께 마냥 달리게 된다.

우리의 삶 속에서 동력이 끊어지고, 절망의 그림자를 밟을 때마다, 이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며 용기를 얻게 될 듯 싶다.

 

끝내 스릴러와는 친해질 수 없다는 독자들 조차, 이 책을 한 번 잡으면, 쉽게 책을 놓지 못한 채 밤이 이슥하도록 페이지를 넘기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선다. 강력 추천이다.

 

 

 

 

 

(스팅이 몸담았던 그룹 폴리스 (The Police)의 앨범의 타이틀이 마침 [Synchronicity]라 이 앨범을 턴테이블 위에 여러차례 올려놓고 [보이드 문]을 읽었다. 스팅은 아서 쾨슬러의 열렬한 독자였는데, 그의 작품 [우연일치의 뿌리]라는 작품에 영감을 얻어 이 앨범 제목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책에 칼 융의 동시성(Synchronicity) 이론이 언급되어 있다.))

'의미있는 우연의 일치'를 융은 '동시성(Synchronicity)'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것은 좀더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우연은 아니다.

겉으로 드러나 눈에 보이는 현재의 세계가 전부는 아니고, 이 이면에는 감추어진 질서가 존재하며, 이 감추어진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서로 손을 맞잡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소위 '감추어진 질서' 속에서의 연결. 세상의 일은 우연히 벌어지고 있는 것 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동시성'이라는 방식으로 우주의 질서 안에서 관련지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다.

마이클 코넬리는 '운명'이라는 개념을 강화하기 위해 이 동시성(Synchronicity)을 작품 안으로 끌어 들였다.

 

동시성. 캐시는 그 단어의 뜻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지난 5년동안 꼼꼼하게 풀어봤던 [라스베이거스 선]의 크로스워드 퍼즐에 적어도 열두 번은 나온 단어였다. 겉으로는 별개로 보이지만 서로 관련된 일이 시간차를 두고 일어나는 것. 동시성. p.404

 

 

우주의 질서 속에서 어느 하나를 어그러뜨리면, 모든 것이 변한다.

 

 

파급 효과를 기억해. 방 안에 있는 뭔가를 바꾸면 그 일과 관련해 온 우주를 바꾸게 돼. 파급 효과를 미치는 거야.

p.132

 

하트 에이스를 떨어뜨림으로서 모든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것처럼, 의미있는 우연이 많은 것들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다 문득 맥스를 처음 만났을 때가 기억났다. 캐시는 언제나 그 만남을 서로 잘 어울리는 영혼들의 우연한 마주침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는 일, 캐시 자신에게는 결코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p.146



 
 
Mephistopheles 2013-05-01 11:14   댓글달기 | URL
다이안 레인과 알 파치노의 조화가 제법 어울리지만...이제 그들은 늙었기에...전 오히려 요즘 떠오르는 (이미 스타지만) 제니퍼 로렌스가 떠올르네요. 전 그녀의 대표작들보단 초기작인 "원터스 본"에서 정말 대단한 모습을 봤거든요. 이 소설의 여자주인공과도 제법 어울려보이고요.
 
레드브레스트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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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결국 우리 모두는 근시 아닐까

 

 

15살이 된 요 네스뵈는 어느날 몰데(molde)의 한 박물관에서 사진 한장을 본다.

 

그 사진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중에 불을 끄던 소방관의 사진이었다. 사진 속의 소방관은 묘하게 아버지를 닮아 있었고, 집으로 돌아온 요 네스뵈는 아버지에게 그 사진에 대해 이야기 한다.

 

제2차 세계대전.폭격. 화염.

 

아버지의 머리속에 부우욱 망령처럼 되살아나는 당시의 기억들.

 

네스뵈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 너의 형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단다. 네가 16살이 되면 알려주려 했지만, 말이 나왔으니 지금 이야기 해주마."

 

그렇게 해서 듣게 된 이야기는 믿겨지지 않는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제2차 세계 대전때 아버지는 독일의 히틀러를 위해서 레닌그라드 외곽에서 러시아군과 싸웠던 것이다. 독일의 나치 군모을 쓰고 있는 아버지의 사진까지 보니, 평소 아버지를 존경하던 어린 네스뵈는 자신의 세계가 한꺼번에 붕괴되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술회한다.

 

스탈린이냐, 히틀러냐..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당시 열 아홉살의 어린 아버지는 히틀러를 선택했던 것이다. 승승장구하던 독일이 패전 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게다가 어린시절을 미국에서 보낸 후 유럽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이 컸었다.) 당시의 많은 노르웨이 젊은이들이 히틀러를 유럽을 먹어치우려는 공산주의의 야욕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주는 구원자로 보았었다.

 

정치적 선택의 갈림길에 대한 딜레마는 진홍가슴새의 습성에 대한 엘렌의 다음 말에 잘 드러나 있다. 실로 '모든 선택은 하나의 포기(Every choice is a renunciation.)'라는 언명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 이 시기가 되면 진홍가슴새의 90퍼센트는 남쪽으로 떠나죠. 말하자면, 극소수만 위험을 감수하고 여기에 남는 거예요."

 

" 여기 남는 새들은 올겨울이 따뜻하리라는 희망을 품고 남은 거에요. 그렇게 되면 다행이지만, 그 기대가 어긋나면 죽는 거죠. 그렇다면 왜 그냥 만약을 대비해서 남쪽으로 날아가지 않는지 궁금하죠? 그냥 게으른 걸까요, 남아 있는 새들은?"

 

"중요한 사실은 만약 겨울이 따뜻하면, 다른 새들이 돌아오기 전에 최상의 위치에 둥지를 틀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계산된 위험인 셈이죠. 잘 되면 입이 찢어지도록 웃는 거고, 아니면 완전 엿먹는 거고요. 위험을 감수하느냐 마느냐. 괜히 도박을 했다가, 어느 날 밤 꽁꽁 얼어붙어 나뭇가지에 떨어질 수도 있어요. 봄이 올 때까지 얼어 있는 거죠. 반면 겁이 나서 남쪽으로 갔다가 돌아와보면, 둥지 틀 곳이 없을 수도 있고요. 사실 이건 우리가 늘 대면하는 영원한 딜레마예요." (p.17-18)

 

 

 

네스뵈의 아버지는, 더 나아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네스뵈의 아버지처럼) 독일 편에 섰던 1만 5천명의 노르웨이 젊은이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한쪽을 선택했던 것이다. 패자의 입장에 선 그들은 승리로만 자신을 치장하고픈 역사라는 위험한 거울을 통해 비춰질 자신들의 처참한 몰골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근시.

먼곳에 있는 물체를 잘 내다볼 수 없는 시력. 전쟁후 독일을 위해 싸웠다는 이유로 3년간 감옥 생활을 할 줄 알았더라면, 그로인해 그의 가족에게 경제적인 어려움이 봉착할 줄 미리 알았더라면, 네스뵈의 아버지는 분명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터이다.

그렇다. 그들은 우리 모두가 그러한 것 처럼, 앞을 내다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작품 곳곳에 근시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어쩌면 정말로 근시가 되어 가는지도 몰랐다.(p.20)

해리는 손으로 눈가에 그늘을 만들었다. 근시가 됐나? (p.21)

노인은 대답하며 의사를 바라보았다. 환자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눌 때는 안경을 벗으라고 의과대학에서 가르치기라도 하는 걸까?

아니면 근시인 의사들이 환자들과 시선을 피하기 위한 방법인 걸까? (p.34)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난 차라리 근시안적인 도덕주의와 결별하는 쪽을 택하겠어. (p.485)

 

반면에 앞날을 내다본듯 간교하게 살아남은 노인의 (여기에선 스포일링의 위험이 있으니 노인이라고만 쓴다) 시력은 상대적으로 매우 좋다. 

노인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베티는 깜짝 놀랐다. 물론 그녀의 명찰에 적힌 이름을 그대로 읽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노인의 시력이 아주 좋다는 뜻이다. 명찰 속 그녀의 이름은 그 위에 적힌 '접수원'이라는 직함보다도 더 작은 글씨였기 때문이다. (p.126)

 

 

 

 

 

이 작품이 기존의 요 네스뵈 작품과는 달리 더욱 깊은 맛이 느껴지는 이유는 소설 속에 사실을 바탕으로 둔 역사성을 과감하게 끌어들인데 있다. 그것도 감추고 싶었던 과거를 말이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신생국가였던 노르웨이는 아무래도 건전한 국가 이미지를 세우기 위해서 독일에 편들었던 과거보다는 저항했던 노르웨이의 레지스탕스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역사를 정립할 수 밖에 없었다. 종전 직후의 노르웨이는 강력한 저항운동으로 독일에게 대항한 것 처럼 비춰지고 싶어했다. (사실은 저항은 미약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노르웨이 정부와 역사가들은 악령을 항아리에 집에 넣고 봉인하는 것처럼 서둘러 독일 쪽 편에서 싸웠던 과거사를 덮어 버렸던 것이다. 이 경우 역사가가 사실의 친구라기 보다는, 사실의 비굴한 노예이거나 포악한 주인으로 전락한 셈이다.

 

하므로 요 네스뵈의 이 작품은 용기있게 시간을 거슬러 자신들의 어둡고 슬픈 과거를 드러냄으로서 자국민들이 그 당시의 진실과 상황을 폭넓게 볼 수 있도록 한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작품으로 평가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어두운 과거와 현재 진행중인 신나치주의와 연결시킴으로서 작품은 당대성까지도 획득하게 되었다. 묵은 상처를 끄집어 냄으로서 당대의 정치적 문맥과 결부시킨 작품이 비단 이 작품만은 아니겠으나,요 네스뵈 고유의 색채를 선보이며 납득할 만한 작품을 탄생시켰다고 느껴진다. 내가 앞 문장에서 '용기있게'라는 부사를 쓴 이유는, 이 작품이 작가 자신의 개인사가 고스란히 스며있기에, 요 네스뵈의 목소리가 그 어느 작품보다도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파고드는 목소리의 크기에 따라 비례하여 작품도 깊이와 설득력을 더 크게 얻었다.

 

"우리가 받은 처벌에 대해서라면 억울하지 않소. 난 현실주의자요. 우린 정치적 필요에 의해 재판을 받아야만 했소. 난 전쟁에 졌고. 그러니 불평따윈 하지 않아."(p.339)

 

"원통한 건 매국노라는 딱지가 붙은 거요.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소. 우리가 목숨걸고 이 나라를 지켰다는 걸. 그 사실이 위안이 된다오." (p.339) 이런 말은 실제로 요 네스뵈의 아버지가 했을 법한 매우 사실적인 말들이다.

 

 

 

"자신이 그런 일을 저지르기는 했어도, 여전히 이해받고 싶은 거야. 대부분의 인간이 그렇지, 알다시피.(p.533)"나 "어느 것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도덕적이고 비도덕적인 누가 결정할 수 있겠나? 심리학자? 법정? 정치가? (p.533)" 이런 대사들은 당시에 독일쪽으로 선택했던 사람들의 입장(아버지)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 같아서 확실히 다른 질감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네스뵈의 노력 때문일까. 최근의 젊은 역사가들에 의해 당시의 그 치욕적인 과거에 대해 객관적으로 역사를 쓰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이스라엘에서 출간된 히브리어 판본의 [레드브레스트].

                               제 2차 세계대전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민감한 주제인데,

                                리뷰를 읽어보니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었다.

      

 

 또 하나의 주인공 -매르클린 라이플

 

"매르클린 라이플은 독일에서 생산된 반자동 사냥총입니다. 라이플 중에서 가장 구경이 가장 큰 16밀리 총알을 사용하죠. 원래는 물소나 코끼리처럼 덩치 큰 동물들을 사냥할 목적으로 제작되었습니다. 1970년에 처음으로 생산되었는데, 겨우 300대가 제작되었던 1973년에 독일 정부가 판매를 금지시켰죠. 이유는 몇 가지의 간단한 조정과 매르클린의 망원조준기만 있으면 최강의 살인 무기로 이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73년 당시 이미 세상에서 수요가 가장 많은 암살 무기가 됐죠. 300대의 매르클린 중에서 최소한 100대는 살인청부업자 그리고 바더 마인호프나 붉은 여단 같은 테러 단체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흠. 100대라고 했나?" 마이리크가 인쇄물을 다시 해리에게 건냈다. "그렇다면 나머지 200대는 원래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는 뜻이군. 사냥에 말이야."

"매르클린은 무스 사냥을 비롯해 노르웨이에서 흔한 어떤 사냥에도 적합하지 않습니다."

"정말인가? 왜 그렇지?"

(중략)

"첫째로 노르웨이에서 사냥은 백만장자의 스포츠가 아닙니다. 망원 조준기가 달린 매르클린은 15만 마르크 정도 하는데, 다시 말해 벤츠 한 대 값이죠. 게다가 실탄 하나에 90마르크나 합니다. 둘째로 16밀리 총에 맞은 무스는 마치 기차와 충돌한 것처럼 보이죠. 꽤 지저분해집니다."

[레드브레스트], p.201-202

 

이 책에서 방안으로 들어온 코끼리만큼이나 강렬하고 묵직한 존재감을 보인 것은 '매르클린(Märklin)'이라는 사냥총이었다.

나는  위에 인용한 부분을 읽으며, 즉각적으로 '1막에서 총이 벽에 걸려있었다면, 그것은 마지막에 반드시 발사되어야한다. (If there is a gun hanging on the wall in the first act, it must fire in the last. )'라는 안톤 체홉의 말을 떠올렸다. 소위 '체홉의 총'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문구. 보통은 복선(foreshadowing)과 군더더기 없는 글 쓰기에 대한 대표적인 말로 언급되는데, 나는 그런 문학 장치적인 측면을 떠나, 액면 그대로 이 말을 생각했다. 초반부분에 나온 이 어마어마한 살상무기가 작품의 어느 순간에 발포되리라는 예상을 한 것이다. 과연 이 총을 맞을 대상은 누구이며,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목동의 피리소리를 따라가는 수백만마리의 쥐떼중의 한 마리처럼 정신없이 책을 읽어 나갔다.

생각해보니, 요 네스뵈의 이 '매르클린 라이플'에 대한 사랑은 꽤 깊은 듯 싶다. 뛰어난 완성도를 보였던 후기작 [레오파드]에도 매르클린 라이플에 대한 언급이 있어 [레드브레스트]를 읽은 독자들을 반갑게 했다.

 

물건을 둘러보던 해리의 시선이 검은 케이스에 조심스럽게 찍힌 글자에 멈췄다.

"이거, 제가 생각하는 물건이 맞습니까?" 해리가 물었다.

"매르클린이지. 아주 귀한 라이플이야. 실패작이라서 몇 자루밖에 생산되지 않았어. 지나치게 무겁고, 구경도 크지. 코끼리 사냥에 쓰인다네."

"그리고 인간 사냥에도요." 해리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 총에 대해 아나?"

"세계 최고의 망원 조준기가 달렸죠. 100미터 앞에서 코끼리를 잡을 때 필요한 물건은 아닙니다.암살용으로 딱 좋죠." 해리가 손으로 케이스를 쓰다듬자, 추억이 밀려들었다. "네, 이 총에 대해 좀 압니다."

-요 네스뵈,[레오파드], p.241

 

그리고 당연한 수순으로 이 총의 실재 존재여부에 대해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Märklin을 구글링해보면, 다음 사진과 같은 주로 독일산 장난감 기차모형의 이미지들이 찾아진다. 그리고 Marklin rifle을 검색어로 넣으면 미국산 '말린 사냥총(Marlin rifle)'이 검색결과에 잡힌다.

 

 

 

 

 

 

 

"어떤 총을 원해요?"

"라이플."

"그거야 쉽죠."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매르클리 라이플."

"매르클린? 장난감 기차회사요?" 올센이 물었다.

([레드브레스트], p.141)

 

 

상당한 시간을 소비하면서 찾아본 최종적인 검색 결과를 여기에 밝히자면, 이 책에 등장하는 매르클린 사냥총은 작가 요 네스뵈의 순수한 창작물이다. 요컨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총이란 이야기다. [레오파드]에서 화제가 되었던 가공할만한 고문기구 '레오폴드의 사과'에 이어서 [레드브레스트]에 등장하는 이  진귀한 사냥총도 순전히 요 네스뵈의 머리 속에서 나온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총의 실존 여부에 대해 궁금해서 추적하던 중,  ( BBC에서 제작한 55분짜리 월드북 클럽 인터뷰를 듣다가) 결국 작가의 입으로 '이것은 제 순수한 상상력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인터뷰에서 이 총 매르클린에 대해 너무 그럴듯하게 (사실적으로) 요 네스뵈가 이야기해서 진행자인 Harriett Gilbert가 실제로 존재하는 총이냐고 거듭 물었을 정도였다.

작가는 이 총의 이름을 장난감 기차로 유명한 독일의 유서깊은 장난감 회사인 Märklin에서 가져왔으며, 개인적으로 이름이 맘에 든다고 밝힌다. 혹자는 잘 알려진 미국의 '말린 사냥총 (Marlin rifle)'을 연상케하는 스펠링에 독일적인 분위기를 주기 위해 독일 장난감 회사 이름을따온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이 매르클린의 존재에 대한 논란은 이미 총기 매니아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는데, 거대한 16밀리 총알을 사용하는 것과, 코끼리나 물소사냥용이라는 묘사를 근거로 실존하는 사냥총 중에 영국산 600 Nitro Express (15.75mm의 총알을 사용)를 모델로 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꽤 있었다.이것은 1899년 개발된 두개의 총신을 가진 코끼리 사냥총이다. 아래에 올린 사냥총은 매르클린의 모델이 되었을 법한 600 Nitro Express 사냥총. 매르클린처럼 코끼리나 물소 사냥을 위한 만들어진 총이다.

 

 

 

  

 

 

 

15.75밀리미터 총알의 위용.(사진에서 오른쪽) 매르클린의 거대한 총알은 대략 이런 느낌이다라는 것을 이 사진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매르클린 사냥총을 손에 넣은 범인이 최후로 노리는 대상은 과연 누구일까? 이 총의 파괴력은 과연 어느정도일까,코끼리를 쏘기 위해 만든 총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저런 궁금증을 당의정 삼아 핥으며 책을 읽으면 어느새 책은 끝나버린다.

 

 

이 작품의 번역에 관하여

요 네스뵈의 전담 영문 번역가인 돈 바틀렛(Don Bartlett)에게 어떤 번역가를 존경하냐고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은 '인터넷의 혜택을 받지 못했던 시절에 작업했던 번역가들'이었다.

 

그렇다. 필경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 번역은 더욱 힘들었을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하지만 인터넷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현재에도 번역이란, 특히 좋은 번역이란 좀처럼 이루어 내기 힘든 일임에 틀림없다. 돈 바틀렛에 따르면 좋은 번역을 위한 최고의 시나리오는 작가,번역자,편집자 셋이 완전히 참여해서 서로를 믿으며 일하는 것이라 한다. 번역자가 원문 텍스트에서 읽을만한 버전의 번역본을 편집자에게 넘기면, 편집자는 언어의 사용과 작품과 시리즈 내에서 일관성을 점검하는 일을 한다. 요 네스뵈의 작품의 경우, 번역자와 편집자가 이런것들을 확실히하기 위해 매우 밀접하게 작업한다고 밝힌다.

 

 

 

국내 번역본의 제작 과정을 상세하게 아는 것은 아니지만, 출판사의 웹사이트를 들낙거리며 알게 된 것은, 편집자와 번역자 모두 충실함과 완벽을 위해 상당한 공을 들였다는 점이다. 특히 빼어난 번역가라고 칭찬받는 돈 바틀렛이 번역한 영어 판본 번역본을 능가하는 면은, 노진선님의 번역은 독자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는 점이다. 책에 대한 배경을 모두 숙지한 후, 꼼꼼하게 쓰신 역주는 책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되었다.(영어판본에는 역주없음.)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유럽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이 책에는 독일어와 러시아어가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모두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다.(영어판본에는 독일어와 러시아가 그대로 나오고 영어번역이 되어있지 않기에 그 언어를 모르면 이해할 수 없기에 매우 불친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Redbreast를 울새나 개똥지빠귀가 아닌, 진홍가슴새로 번역한 부분은 특히 탁월한 선택이어서 감탄했다. 맨 첫장에 작가가 인용한 셀마 라게를뢰프의 ' 진홍가슴새의 비밀(Christ Legends)'의 이미지와도 맞고, 개똥지빠귀라는 이름에서는 얻을 수 없는 시적(詩的)인 분위기를 획득했기 때문이다.

 

 

 

요 네스뵈에 따르면 돈 바틀렛의 번역이 훌륭하지만, 언어란 복잡한 것이기에 노르웨이어에서 영어로 번역되면서 사라지는 것 중 하나가 자신이 작품에서 심어놓은 '유머(humor)'라며 아쉬워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노르웨이어에서 영어로 번역되는 과정에 참여하거나 조절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작가가 할일은 그저 믿고 맡기는 일이라고 그는 말한다.

 

개인적으로 국내판 [레드브레스트]의 경우, 번역이 참 좋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p.332쪽의 (집으로 가는 길에 해리는 자신에게 어떤 벌을 줄까 고민했다. 뭔가 가혹하면서도 앞으로 다시는 이런 짓을 할 수 없게 만드는 벌이어야 한다. 에어로빅 수업을 들어야겠다.)

 

 

 

이런 부분에서 해리의 유머감각이 드러나 빙긋이 웃게 되었고, part 5 [일곱날]에 해리홀레가 엘렌의 자동응답기에 남기는 장면에선 차오르는 슬픔외에는 선택할 감정이 없었다. 이렇게 독자의 감정을 쥐락펴락하는 것의 일차적인 공로는 물론 작가겠지만, 좋은 번역없이는 그러한 전달이 불가능하다고 단언 할 수 있다. 영문판본으로 읽었을 때보다, 한국어 번역본으로 읽었을 때 훨씬 좋았고 감동적인 이유는 내 짧은 영어실력 탓이 있었지만, 위화감없는 매끄러운 번역의 덕이 무척 크다. 눈앞을 가리고 있던 베일이 싹 걷힌 듯한 느낌이랄까.

 

 

 

 

 

총평

게오르그 루카치는 위대한 작가의 특징으로 '진실의 대한 갈증, 현실성의 열광적인 추구, 그리고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라고 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요 네스뵈는 이 세가지를 모두 만족시킨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특히 기존의 두 작품 [스노우맨]과 [레오파드]도 좋았지만, 이 작품을 읽고 나서 더욱 그러한 느낌을 받았다.

 

이 작품은 루카치가 말한 예술가는 외부세계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비출수 있는 청명한 거울 역할을 한다라는 말을 상기 시킨다. 봉인해 버리고 싶었던 과거사를 왜곡없이 비추는 용기 있는 작품이다. 암초로 치부되던 노르웨의 과거사를 가감없이 보여주어 오히려 제대로 된 방향을 인도해주는 등대같은 역할을 해주고 있다.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거대한 체스판의 졸(卒) 신세였던 젊은이들이 내린 선택이 결국 어떤 지점까지 그들을 인도했는지를 다양한 시각으로 묘사했는데, 이를 통해 사회의 부당한 오해를 씻고 과거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제공했다. 주안점을 역사쪽에 맞추어도 상당히 흥미있고, 미스터리 스릴러 쪽으로 맞춰도 꽤 만족스럽다. 이 작품을 쓸 당시에 네스뵈의 에너지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작품이다. 이런 큰 얼개의 작품을 만들기위해서는 아무래도 작가적 역량이 담보되어야하는데, 역시 요 네스뵈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큰 주제의 무게에 스토리가 무너져 내리지 않았다. 기대치를 훌쩍 넘어선다.

 

히브리어로 된 성경의 인물들이 등장하고, 유명한 성경 테마인 다윗과 밧세바, 우리아의 일화가 작품속의 인물들과 포개져서 강한 상징성을 드러낸다. 이런 기술적인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이.야.기.가 있다는 점이 이 작품을 빛나게 하는 요소일 것이다. 요 네스뵈만이 할 수 있는 진짜 이야기가 있어서일까. 읽는 사람의 마음이 움직여진다. 몇몇 장면과 문장은 몇번이고 읽고 싶을 정도로 빼어나게 아름답다.

 

이런 기분을 나 혼자만 느끼기엔 미안할 정도로 작품이 근사하다. 주저없이 일독을 권한다.

 

 

 

 

 

 

 

 

 

 

 

 

 

 

 

 

 

 

 



 
 
시아 2013-04-01 09:54   댓글달기 | URL
저는 덕분에 요 네스뵈의 [스노우맨]을 얼마전에 읽었어요,,,이 책도 읽으려고요. 그래서 리뷰는 책 읽고 읽을게요,,,[레오파드]도 그렇고,,,하악하악,,아니 어찌 책을 이렇게 빨리 많이 읽으시는지????쫓아가기 힘드네요,,,,ㅎㅎㅎㅎㅎㅎ

Mephistopheles 2013-04-01 15:16   댓글달기 | URL
그 비슷하게 곰사냥, 코끼리 사냥에 쓰이는 라이플이 있긴 있었는데...반동이 워낙 심하다 보니 명중률이 아주 높진 않았나 봅니다. 그래도 타겟이 무식하게 크다보니 대부분 맞긴 맞았다곤 하지만 곰이란 동물은 심장에서 1센치만 벗어나도 무시무시한 반격을 하는 포유류 최강의 생물이라 별 효용은 없었을 꺼에요. 영화 불가사리 보면 그 비슷한 라이플이 나오긴 합니다.(어제 저녁에 홀레가 발사한 라이플에 두 인물이 박살나는 걸 읽은 1인)
 
경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6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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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훗날 숲속에서

기억의 숲속에서

뜻밖에 나타나서

손을 뻗쳐서

나를 구해주오.

 

 

-프레베르, [이 사랑]중

 

미나토 가나에의 신작 [경우]를 읽다가, 이 작품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사용되고 있는 '파란 리본'은 프레베르가 말한 '뜻 밖에 나타나서 구원해주는 손'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우주 어딘가에 연결되어 있는 고리말이다. 이 파란 리본은, 어머니가 남겨준 혈육에 대한 징표인 동시에, 두 명의 고아원 출신 여 주인공들 사이를 이어주는 혈육보다 더 질긴 끈을 의미한다. 

[경우]는 결국 '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이야미스'라는 말이 있다. '싫음(혐오)'라는 말과 '미스터리'라는 말을 합친 조어(造語)인데, 보통 뒷맛이 개운치 않고, 싫은 기분이 되는 미스터리 소설들을 이 괄호 안에 집어 넣는다. 이 '이야미스'의 매력은 인간의 진흙탕같이 어둡고, 부정적인 부분을 철저하게 묘파해 내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인간의 묘한 이중 심리랄까. 좋은 사람이 등장해서 따스한 결말에 이르는 훈훈한 이야기를 바라는 독자들이 있는 반면, 눈살이 절로 찌푸려지는 인간의 악이나 어두운 그늘을 보고 싶은 독자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참담한 전개와 그로테스크한 심리 상태의 묘사가 이어지는 내용의 책을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붙잡고 있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2011년 3월 대지진이라는 거대한 트라우마를 경험한 일본인들에겐 '해피엔딩'이 어쩐지 거짓처럼 느껴지는 사람들이 늘어서 이러한 이야미스 소설이 히트를 치게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이 '이야미스'라는 장르의 꼭짓점 위에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이 있었다. 이야미스의 주된 독자층이 30대 여성이라고 하지만, 혀를 내두를 정도로 많이 책이 팔린 것을 보아서는 [고백]에는 고정독자 이상을 빨아들이는 무엇인가가 있는 듯 보인다. 나 역시 그녀의 대표작인 [고백]으로 작가를 만났고, 그 후에 출간된 [속죄]를 읽으면서 어째서 그녀를 '이야미스의 여왕'이라 부르는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런데, 최근에 국내 출간되는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 속에서 작가의 변모를 감지하게 된다. 가령 비채에서 작년에 공개된 [왕복서간]의 경우 그러한 변화는 두드러진다.  일본 독자들이 이야기하는 '독(毒)이 있는 미나토 가나에'와 '독이 없는 미나토 가나에' 사이에서 작가는 이작품을 통해 후자에 발을 담그게 될 것임을 보여준다. 특히 두 번째와 세 번째 이야기의 결말 부분을 읽어보면, 이러한 작가의 변모를 쉬이 수긍하게 될 것이다.예전에 발표했던 초기 작품들은 그녀가 '악의(惡意)'의 까발림에 전력을 기울였기에 읽은 후에 부대낄 정도의 어두운 뒷맛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작가는 사랑과 화해를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 작품들과는 확연히 유리된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공개된 [경우] 역시, 검은 미나토 가나에 보다는 하얀 미나토 가나에에 가까운 작품으로 휘몰아치는 갈등 속에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을 끊지 않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일본 뿐 아니라 국내 독자들은 대부분 [고백]에서 독을 뿜어내던 어두운 미나토 가나에의 이미지에 경도되어 있는 듯 보인다. 그래서일까. 밝은 분위기의 가나에 작품은 어딘지 심심하고, 담백하다고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작품을 좀더 진하고 걸죽하게 그려내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토로하는 독자들도 있다. 처음에 독자와 마주했던 이미지가 앞서 말했던 '이야미스'적이라서 그 첫인상의 강렬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독자들이 많이 까닭이다. 가나에의 작품들의 평가 기준점은 언제나 데뷔작 [고백]이다. 자신이 만들어온 스타일의 익숙함에서 벗어나려는 작가에게 이것만큼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녀가 전략적으로 정면 돌파해야할 지점은 바로 이 곳일 것이다. [고백]이 주었던 충격을 담으면서도 그것의 아류나 변주가 아닌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 [경우]는 비록 [고백]을 잠시 잊을 만큼, 전폭적인 갱신을 일궈내지는 못했지만 (번갈아가면서 화자가 바뀌는 방식을 사용한 것은, 가나에의 전형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자신의 작품을 '답습'하지 않으려는 그 노력의 산물임에는 틀림없다.  

 

  

 

소녀시절부터 공상을 좋아했던 작가는 결국 그녀의 상상력을 작품으로 치환하여 독자들에게 선사해주었다. 국내에 출간된 7권의 책.

([경우]가 가장 최근에 나온 작품이라 맨 앞으로 빼서 사진을 찍었다. 그외는 순서없음.) 

거짓말 이야기를 좋아하고, 집에 컴퓨터가 있어서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밝히는 미나토 가나에.

자신있는 장르가 없었기에 여러장르를 도전해보자는 마음으로, 우선 청춘소설을 쓰게 되었고, 두번째 도전한 작품이 '고백'의 1장에 해당하는 [성직자]였다. ([성직자]는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여 2주만에 썼다고 한다)

 

 

 

 

미나토 가나에의 국내 출간작을 모두 읽어본 결과, 모든 작품이 균등한 질(質)을 유지하고 있지는 않다고 느꼈다. 사실 그 자체가 거의 불가능 한 일이 아닐까. 초특급 뮤지션이라고 해서 매번 모두의 환영을 받는 음반을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특히 가나에의 경우 일급 데뷔작 [고백]으로 인해, 독자들의 기대치가 하늘을 찌르기 때문에 다른 작품들이 어쩔수 없이 비교되고 평가절하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작품 면면을 살펴보면, (데뷔작의 임팩트에는 미치지 못할 지라도) 어느 선 이상의 수준을 유지하는 작품들이 다수라는 점을 느꼈다. 그리고 자기 색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글을 쓰려는 노력들이 보인다.([왕복서간]은 서간체 형식, [N을 위하여]는 인터뷰 형식을 차용했다. 이번에 나온 [경우]는 [파란 하늘 리본]이라는 동화와 함께 나와 독특한 맛을 선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나에의 작품이 나올 때마다 독자들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읽게되는 것이다.  

여담인데 미나토 가나에 사인을 할때는 저렇게 쓰다가는 금방 기진맥진해지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될정도로 한자 한자 정성들여서 쓸정도로 다정다감하고, 애니메이션 성우 목소리 처럼 귀여운 목소리의 소유자라고 한다. (실제로 인터뷰 목소리를 들어보니, 애띤  목소리!) 작가 개인은  본인이 쓰는 작품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을 선사해서 재미있다. 

 

 

 

 

 

 

 

미나토 가나에의 최신작[경우]는, 초판 한정 특별판으로 소설 본문에 등장하는 [파란 하늘 리본]이라는 동화집이 포함된 [경우 선물세트]가 제작되었다. 스야마 유카가 그린 예쁜 그림들과 미나토 가나에가 직접 쓴 동화가 가나에 팬들의 소장 욕구를 높여준다.

동화책의 일부를 스캔해 보았다.

 

 

 

 

내가 비채 편집부에 감탄했던 것은 바로 이 파란 리본 모양의 책 갈피용 끈!

파란 리본은, 작품 속에서 가족의 혈액을 넘어선 그 이상의 더 깊은 연결의 끈을 상징하는데, 그 부분을 놓지지 않고, 책갈피 끈으로 만든 편집부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 [경우]를 드라마화 감독은 이 작품의 주제를 '인간은 외로움으로 연결되어 있다'것을 주제로 하고 있다고 보았는데, 두 주인공 모두 버려진 아이들이라, 성장과정에서 외로움을 떼어낼 수 없었다. 그런 그녀들을 묶어 준 것이 바로 '파란 하늘 리본' 인 셈이다.

 

 

 

 

 

 

먼저 [파란 하늘 리본]이라는 귀여운 그림의 동화를 먼저 읽은후, [경우]의 첫 장을 펼쳤는데 (함께 온 동화가 소설과 이어진다는 사전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다음의 문장을 만나고 살짝 놀랐었다.

 

제5회 일본 그림책 대상 신인상을 수상한 [파란 하늘 리본]이 전국의 서점에 깔린 것은 지난달 9월 20일. 아무리 신인상 수상을 알리는 띠지를 둘렀다고 해도, 이름 없는 신인작가의 그림책이 이렇게 폭발적으로 팔리는 일은 없다. 하지만 아주 드물게 작은 계기가 앞바다까지 밀어주고, 커다란 파도가 다시 대해로 데려가줄 때가 있다. (p.9)

 

 

파란 리본으로 연결되듯, 두 책이 이어져 있었다.

[경우]가 기존 작품들과 다른 점은, 애시당초 영상화(드라마-이 작품은 ABC 아사히 방송 창립 60주년 기념 스페셜 드라마로 영상화 되었다)를 목적으로 두고 글을 썼다는 점일 것이다. 이 전에 시나리오를 썼던 경험이 있고, 드라마는 소설과 영화와는 달리 표현에 제약이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썼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추상적 이미지에서 좀 더 구체적인 이미지들이 작품 속에 펼쳐지기에 필치에 생동감이 느껴진다.  

 

 

(파란색 책갈피 끈을 리본모양으로 묶고, 동화책과의 연결을 강조하여 찍은 사진. 파란색이 두드러지도록 그 부분만 색을 남겨 보았다.)

 

미나토 가나에는 한 인터뷰에서 '지금의 시대는 누구나 사소한 것으로 악인도 선인도 될 수 있고, 가해자도 피해자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었고, 작품 내에도 그런 장면이 등장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사람은 태어난 환경에서 그 인생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은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는 전언을 보내온다. 

 

 

등장인물에 생생함을 넣어주기 위해 고심한다는 미나토 가나에. 디테일한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집필 전에 주요 인물들의 이력서를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처음에 캐릭터 설정을 해 놓지 않으면 이야기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믿고 있는 듯 한데, 그런 버릇은 [고백]부터 [경우]까지도 초지일관한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작품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전반적인 특징은, 후던잇(whodunit)이나 하우던잇(howdunit)과 같은 전통적인 추리소설의 포팻을 따르지 않는다 점일  것이다. 그것보다는 어떤 사건과 관련된 등장인물들의 내면 심리를 탐색하는 와이던잇(whydunit)에 가깝다.

 

 

열세 살 살인자, 그보다 더 어린 희생자...

허물어진 현대의 상식을 차가운 시선으로 담아낸 서점 대상 수상작!

 

"내 딸을 죽인 사람은 바로 우리 반에 있습니다"라는 엄청난 고백을 던지고 법인인 학생들에게 믿을 수 없는 가혹한 복수를 실행하는 담임선생님! 너무나도 충격적인 내용에 출간 즉시 독자들의 열띤 찬반양론을 불러일으킨 충격의 화제작.  (비채 도서목록 발췌)

 

 

2012년에 읽은 책중 가장 빠르게 읽은 책이다.

책이 두껍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주인공들이 주고 받는 편지를 탁구 구경하듯 오른쪽 왼쪽 오른쪽 왼쪽..., 읽다 보면, 어느새 끝.

몰입도의 게이지를 MAX로 만들어 버리는 책.

게다가 각 작품마다 반전을 숨겨놓아, 끝부분에서 '아아..끄응'하고 신음하게 된다.

이번에 읽은 [경우]도 참 빨리 읽었는데, 가나에 소설의 가독성은 역시 알아 줘야 할 듯 싶다.

 

 

[왕복서간]은 서간체 소설의 매력을 듬뿍 보여준 작품. 잠깐 걸작 [고백]을 잊었을 정도로 개인적으로 맘에 들었던 작품집이었다.

 

 

 

 

체한 듯 걸려 있는 기억, 풍선처럼 부푼 죄책감...

그때 나는 누구를 구해야 했을까요?

 

편지라서 하게되는 거짓말, 편지라서 허락되는 죄, 편지라서 가능한 고백! 사건의 전말이 봉투 밖으로 흘러나온다. 충격적 결말 그리고 밀려드는 감동! 편지 형식으로만 전개되는 연작 미스터리! 미쓰다 류헤이, 미야자키 아오이 주연 전격 영화화!  (비채 도서 목록 발췌)

 

 

 

고백과 같은 색깔의 어두운 미나토 가나에를 만나고 싶다면, 바로 [속죄]를 권한다. 속도감있게 읽히는 점은 가나에가 갖고 있는 장점!

 

 

 

살인자는 어머니, 희생자는 아버지...그날 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고급 주택들이 즐비한 도쿄의 주택가. 유난히 무더운 여름밤, 이 아름다운 동네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의사 아버지에 우아한 어머니, 의대생 큰아들, 유명 사립학교에 다니는 딸, 잘생긴 막내 아들. 그림같이 완벽한 다카하시 가족들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비채 도서 목록 발췌)

 

 

[고백],[야행관람차]나 [소녀]같은 작품들을 보면, 미나토 가나에가 10대 학생들의 심리나 말에 대단히 사실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많은 독자들이 그 이유를 과거에 가나에가 가사 선생님이었던 이력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작가 스스로가 패스트 푸드점에 가서 중학생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등의 남다른 노력도 그 이유 인듯 보인다. 이러한 각고의 노력을 하는 작가이기에 그의 작품이 나오기만을 고대하게 되는 것 같다.

그녀가 응시하는 어둠의 깊이를 가늠해 보려는 마음에 자꾸 다음 작품을 출간하라고 채근하게 된다. 

 



 
 
 

 

 

(시집을 꽂아 놓은 책꽂이에서 오랜만에 정호승 시인의 시집들을 ([서울의 예수], [흔들리지 않는 갈대]) 꺼내 읽어 보았습니다.)

 

또 기다리는 편지

 

-정호승

 

지는 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오랜만에 정호승 시인의 시집을 펼쳐서 그의 작품들을 읽었습니다. 그의 시를 읽다보니, 시집들을 사서 몇번이고 읽던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지금은 확실히 '꽃'보다 '밥'을 위해 살고 있지만). 꽃을 소중히 생각하며 보냈던 시절입니다. 그때의 제가 가끔 현재의 저에게 때때로 편지를 보내온다고 느끼는 걸 보면, 제가 완전히 변한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정호승시인의 시집들을 꺼내서 읽게 된 것은 최근에 출간된 산문집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를 읽었기 때문입니다.

제목처럼 '인생에 용기가 되어줄 이야기'로 빼곡히 채워져 있는 책입니다.

읽고 나서 강하게 머리 속에 남아있는 글들이 있고,작품이 진심으로 마음에 들어서 제가 찍은 사진들과 함께 포스팅 해봅니다.

책의 일부만 맛보기로 발췌했기때문에, 정호승 시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참된 의미를 이해하시기 위해서는, 당연히 이 포스팅 보다는, 산문집을 꼭 읽어보시라고 권합니다.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이후, 7년만에 정호승 시인이 내놓은... 진정한 힐링을 보여주는 산문집입니다.)

 

 

 

p.249 꽃 한 송이가 밥 한 그릇보다 더 귀할 수 있다.

 

 

‘맞아, 꽃 한 송이가 밥 한 그릇보다 더 소중할 때가 있는 거야.

그러자 제 마음에 힘이 솟았습니다. 그동안 청춘의 산맥을 넘어 장년의 강을 건너 노년의 산기슭을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지금껏 저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만 꽃보다 밥을 위해 더 열심히 살아온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은 오랫동안 자성의 시간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저로 하여금 다시 그 청춘의 시절처럼 밥보다 꽃을 더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행여 지금 제가 아름답다면 그래도 청춘 시절에 밥보다 꽃을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행여 지금 제가 아름다움을 잃었다면 꽃보다 밥을 더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꽃이 없으면 제 삶은 아름다워지지 않습니다. 제 삶에 꽃이 피지 않으면 봄도 가을도 오지 않습니다. 제 삶에 꽃이 더 소중해야 비로소 저는 한 사람 아름다운 인간이 됩니다.

 

 

 

p.106 해가 질 때까지 분을 품지 말라

 

 

분노는 벌레처럼 저를 갉아먹습니다. 어떠한 분노든 제 인생을 쓰러뜨립니다. 분노에서는 제 인생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긍정성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하든 단 하루라도 분노하지 않고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그렇지만 그게 마음먹은 대로 잘되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분노의 가슴을 지닌 채 하루하루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도 오늘의 제 삶이 그나마 건강하게 유지되고 있는 까닭은 바로 ‘해가 질 때까지 분을 품지 말라’는 이 말씀 덕분입니다.

이 말씀은 제 분노의 가슴을 부드러운 손길로 씻어주고 재워줍니다. 더러워진 제 몸을 씻어주는 맑고 따뜻한 물과 같습니다. 하루를 다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 저는 이 말씀을 보석처럼 꺼내 생각합니다. 해가 질 때까지 오늘의 분을 다 풀었는지, 아니면 그대로 품고 잠자리에 들었는지 생각합니다. 만일 오늘 하루의 분을 다 풀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다면 지금이라도 분을 풀어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듭니다. 그렇게 하면 그날 하루의 분이 다소 풀립니다. 하루가 모여 1년이 되고, 1년이 모여 인생이 되기 때문에 그때그때 분을 푼다면 제 인생 전체에 쌓일 분노의 양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p.75 새들은 바람이 가장 강하게 부는 날 집을 짓는다.

 

 

그때 문득 봄이 오면 왜 꽃샘바람이 꼭 불어오는지, 나뭇가지가 왜 바람에 잔잔하게 부러져 거리에 나뒹구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까치와 같은 작은 새들로 하여금 집을 지을때 그런 나뭇가지로 지으라고 그런 것입니다. 만일 꽃샘바람이 불어오지 않고 나뭇가지 하나 부러지지 않는다면 새들이 무엇으로 집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또 떨어진 나뭇가지가 마냥 크고 굵기만 하다면 새들이 그 연약한 부리로 어떻게 나뭇가지를 옮길 수 있겠습니까.

새들은 바람이 가장 강하게 부는 날 집을 짓습니다. 강한 바람에도 견딜 수 있는 튼튼한 집을 짓기 위해서입니다. 태풍이 불어와도 나뭇가지가 꺾였지 새들의 집이 부서지지 않는 것은 바로 그런 까닭입니다.

 

 

p.91 펜을 바꾼다고 글씨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펜이라는 도구를 바꾸어야 하는게 아니라 제 글씨체를 바꾸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원고가 잘 써지지 않아 노트북을 바꾼 적도 있습니다. 노트북이 너무 구형이라 인터넷 속도가 느린데다 무엇보다도 자판을 쳤을 때 손가락 끝에 전달되는 느낌이 갈수록 거칠고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 노트북으로 글을 쓰다간 쓸 수 있는 글도 제대로 못 쓰겠다 싶어 새것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노트북을 바꾸었다고 해서 원고가 잘 써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서투른 목수가 연장 나무라는 것과 같을 뿐이었습니다.

결국 문제는 본질에 있었습니다. 제 글씨체가 문제이지 펜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속이 변해야 겉이 변할 수 있고, 본질이 변해야 현상이 변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본질의 변화에는 무관심한 채 외양의 변화만을 요구했습니다. 이는 자신은 변하지 않고 남이 변하기만을 바라는, 자신은 탓하지 않고 남만 탓하기를 즐기는 삶의 부정적 태도 입니다.

 

 

p.422 시계는 살 수 있지만 시간은 살 수 없다.

 

제 책상 서랍 속에도 손목시계가 몇 개 있습니다. 기념품이나 선물로 받은 것도 있고 직접 산 것도 있습니다. 예전엔 시계 하나 지니기 어려웠는데 요즘은 사용하지도 않는 시계가 몇 개나 됩니다. 시계가 많다고 해서 시간이 많아지는 게 아닌데도 말입니다.

시계 속에 시간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시계는 시간이 아닙니다.

시계는 시간의 흐름을 확인하고 인지할 수 있는 물건일 뿐 그 속에 제 인생의 시간은 없습니다. 저는 시간 안에 사는 존재이지 시계 안에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시간은 소멸돼가는 본성을 지녔지만 시계는 하나의 물체 그대로 존재합니다.

 

 

p.298 고통은 그 의미를 찾는 순간 더 이상 고통이 아니다.

 

 

이는 고통의 상황을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변모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고통을 어떻게 적극적으로 긍정적으로 해석하느냐, 고통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느냐 하는 점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고통을 고통으로 받아들이면 고통뿐이지만,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더 이상 고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유 있는 고통은 있어도 의미 없는 고통은 없다는 것입니다.

 

 

p.217 흰 구름도 짜면 비가 된다.

 

 

하늘이 아름다운 것은 구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구름이 없다면 하늘 자신조차 심심하고 지루할 것입니다. 하늘은 구름을 통하여 자신의 변화무쌍한 아름다움을 한껏 보여줍니다.

구름 중에서 비를 내리는 구름은 먹구름입니다. 그런데 ‘흰 구름도 짜면 비가 된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비록 흰 구름일지라도 빨래 짜듯 힘껏 짜면 비를 오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무슨 일이든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는 가능성이 내포된 말입니다.

저는 하늘에 떠 있는 흰 구름을 보면 이 말이 먼저 떠오릅니다. 언제 어디에서 알게 된 말인지는 모르지만 이 말을 안 지 참 오래되었습니다. 그래서 가끔 ‘맞아, 내 인생의 하늘에 떠 있는 흰 구름도 짜면 비가 올 수 있는 거야!’하고 속으로 중얼거립니다.

 

 

 

p.183 꽃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황하지 않는다.

 

 

봄날에 피는 꽃을 한번 보십시오. 꽃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황하지 않습니다. 꽃을 피우려고 애쓰지 않으면서도 꽃을 피우고, 피어난 꽃은 그대로 방황하지 않고 열심히 삽니다. 누가 보든 말든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하늘을 향해 피어 있다가 때가 되면 시들어 열매를 맺습니다. 베트남의 틱낫한 스님은 "한 송이 꽃은 남에게 봉사하기 위해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다. 오직 꽃이기만 하면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한 사람의 존재 또한 그가 만일 진정한 인간이라면 온 세상을 기쁘게 하기에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이 책에 담긴 말씀들은 모두 제 인생에 용기를 준 영혼의 양식들입니다. 저는 지금 그 말씀의 양식을 오병이어(五餠二魚)처럼 나눠 먹고 싶습니다. 바구니에 담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예수에게 건네준 소년의 마음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다.

과연 그 말처럼, 작가가 오랜 성찰 끝에 써낸 글들은 잠언처럼 묵직하게 마음 속으로 파고 듭니다. 각박해 진 삶 속에서 주변에 꼭 권해주고 싶은 구절들이 만재해 있는 이 책은, 인생에 순간 순간마다 펼쳐서 되새기고 싶을 만큼 마음에 와 닿습니다.

 

추천하고 싶네요.

 

 

 

 

 

 

 

 



 
 
 

 

 

 

 

무라카미 하루키를 특별히 좋아하지 않더라도, 이 책은 선물하고, 선물 받으면 정말 괜찮을 듯 싶습니다.

 

부담없는 내용과 공감가는 글, 그리고 책 자체가 너무 예쁘게 나왔기 때문에

 

특히 여성분들의 호응이 매우 클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윗 사진의 컨셉은 '핑크' 입니다.^^ '바다표범의 키스' 글자색과 깔맞춤했다는...ㅎ)

 

 

 

 

이것은 책을 사고 덤으로 받았던 머그컵입니다.

 

하루키를 좋아하고, 이 책을 재밌게 읽은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완소아이템이지요.

 

이제는 초레어템이 되었습니다.(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뿌듯..ㅋㅋ)

 

 

 

 

머그컵의 뒷면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포스트잇도 함께~(곰돌이 부자(혹은 모녀)도 슬쩍 찬조 출연했습니다.^^)

 

 

이 책에 대한 제 자세한 리뷰는 ...아래의 링크를 따라 가시길~~^^

 

 http://blog.aladin.co.kr/722392126/5728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