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만 아는 농담 - 보라보라섬에서 건져 올린 행복의 조각들
김태연 지음 / 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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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에세이를 읽지만, 읽은 모든 에세이가 다 마음에 들진 않는다. 그들의 삶과 생각을 존중하지만 다 내 마음과 같진 않다. 그래서 실망하기도 하고, 공감 없이 읽기도 한다.

 

기대 없이 읽기 시작한 에세이인데, 읽다 보니 마음에 드는 문장이 많이 인덱스를 덕지덕지 붙였다.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글을 만났다. 따뜻하고, 소박하고, 사랑스럽다. 정확히 어떤 요소들이 마음을 끌었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어렵다. 그냥 좋았다.

 

국제 결혼을 하고 남태평양 보라보라 섬에서 9년의 생활을 담은 에세이. 여행이 아닌 삶이 되버린 섬. 말도 통하지 않고, 전기도 자주 나가고, 덥고, 모기도 많고.. 불편하다면 한 없이 불편한 이유를 말할 수 있고, 답답하겠고, 그래서 후회할 때도 있겠지만 그것도 그저 흐르는 삶으로 받아들이고, 주어진 것들에 적응하며 즐거움을 찾는 그들의 삶과 마음을 들여다 보았다.

 

친한 이웃과의 사이에서 생긴,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그들만의 농담이 되어 때때로 그들만 알 수 있는 웃음을 주듯이, 글을 읽는 나도, 글 속에 흐르는 기분 좋음이 느껴져 그들의 농담에 동참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배를 탔다. 그래서 나도 내일의 일은 모르겠다. 꽤 많은 장의 내용이 내일의 일은 모르겠다로 끝난다.

 

그런 섬에 산다고 꼭 미니멀 라이프를 이루며 자연과 함께하는 느림만을 상상한다면, 틀렸다. 미드 보기를 좋아하고, 마트에서 사 먹고 집까지 배달이 되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될 수 없음이 아쉬운 삶이다. 그렇지만 자연과 사람과 고양이가 있어 채워지는 삶이기도 하다.

 

살다보면 정말 사소한 것들이 우리를 위로한다. 그게 무엇인지 아는 작가가 좋았고, 내 삶의 사소함을 지나치지 않고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는 내가 좋았다.

 

P16. 잠시 숨을 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낭만적인 사람. 생각해보면 나의 가난을 핑계로 지금껏 얼마나 많은 이들의 낭만을 비웃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다른 이의 낭만을 미웃지 않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괜찮은 어른이 되는 걸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P23. ‘그리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동화를 믿는 어른이 있을까. 그 누구도 영원을 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사랑을 할 때 하는 약속들은 헤어지기 전까지만 유효하다고 했다. 사랑을 해보고 읽어보고 잊어본 사람이라면, ‘영원히 사랑해라는 말에 더 이상 속지 않게 된다. 그러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아주고 싶은 사람을,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된다. 여기서 진짜 어른들의 동화가 시작된다. 비극일지 희극일지 모르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애초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사랑이 허락되는 동안 사랑하는 것뿐이다. 내일의 일은 모르겠다.

 

P64. 친구를 따라 집 근처로 나갔더니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틈 안쪽에 밥그릇과 안내문이 있었다. 길고양이에게 사료를 주면 쥐의 서식을 방지할 수 있고, 고양이들이 쓰레기봉지를 훼손하지 않으니 사료를 버리지 말아달라는 내용이었다. 친구의 얼굴이 마냥 밝지 않았다. 쉽게 상상이 됐다. 곱지 않은 시선을 피해 구석진 곳에 들어가 사료를 주고도, 빈 그릇을 보면 고양이가 먹은건지 사람이 내다 버린 건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워했을 친구의 모습이, 어쩌면 빈 그릇이 가장 무거웠을지도 모른다. 사료를 굳이 버려버리는 사람이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을까. 내게는 친구의 마음만이 와닿았다. 몸 구석구석 퍼졌다.

 

P164. 요즘 나는 매일같이 해 질 때를 기다린다. 엄마가 좋아하는 분홍색으로 하늘이 물든 날에는 사진을 찍어서 보낸다. 엄마는 그것도 고맙다고 하고, 나는 미안해지고 만다. 가장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공짜라서.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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