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로 태어나지 않은 이상 누구나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한다. 정확하게는 돈을 벌기 위해서인데, 돈을 번다는 것은 결국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함이니 삶 = 일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아주 드문 경우, 취미 = 일 = 삶이 되는 경우를 볼 수 있지만, 이는 말 그대로 매우 적은 숫자의 사람들에게 국한된 것이고, 이들 중에도 실은 취미 = 일 = 삶이라는 형태가 가공되거나 과다하게 포장되어 팔리는 걸 보면 실제로는 이 삼박자가 맞아떨어지는 삶이라는 어렵다.
물론 취미 = 일 = 삶까지는 아니라도 최소한 일 = 삶이 차지하는 빈도를 줄이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 이 역시 자주 볼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오로지 인간에게만 통용되는 사치나 욕심이라는 것, 물욕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범위에서 예상할 수 있는 욕심, 예컨데 교육열이나 문화욕구 같은 것을 포함한 모든 것들을 내려놓으면 어느 한도내에서는 생활을 영위하는데 드는데 필요한 재화의 양이 낮아지고, 이에 따라 조금 더 많은 시간을 일이 아닌 다른 것을 하면서 보낼 수는 있다. 다소 보헤미안적이기는 하지만, 인간극장 같은 프로에서 어쩌다 소개되는 사람들의 사연을 보면 결국 도시라는 구조에 붙어 사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도시의 삶이 요구하는 막대한 비용을 벌어들여야 하는 필요를 벗어난 삶을 찾아낸 이들이 있기는 하다. 여기서 포기할 것은 안정적인 직장, 도시의 분주하지만 화려할 수도 있는 cliche, 문명의 이기, 그리고 아이나 교육인 경우도 포함된다.
기실 인터넷과 케이블 또는 위성방송이 일상화되고 노력여하에 따라서는 산골이나 어촌의 한적한 마을에 칩거하는 삶이라 해도 세상 돌아가는 것 정도는 알 수 있고, 벽촌의 삶에서 문제가 되기도 하는 전기공급 같은 것도 태양열 발전기 설치를 통해 많은 해결을 볼 수 있는데, 사실 전기만 제대로 들어와도 냉난방부터 물사용까지 거의 모든 문명의 이기를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원한다면 칩거하지만, 최소한 세상만사를 virtual하게나며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일 또한 자기 재주껏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컴퓨터와 인터넷을 갖춘 상태라면 디자인이나 프로그래밍 계통의 일은 거의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법무, 세무나 번역 같은 일도 가능은 하다. 시급직이고 계약에 임시직이니만큼 4대보험도 없고 돈도 짜겠지만, 높은 개인생산성, 그러니까 봉급을 위해 지출되어야 하는 일종의 생산단가가 낮으니만큼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서울에서 거주하면서 월 500만원을 받아도 사실 거주비용과 교통비, 생활비, 그리고 도시에 살기 때문에 발생하는 각종 비용을 생각하면 많으면서도 부족할 수도 있지만, 수도권을 벗어난 삶이라면 그 반을 벌어도 훨씬 풍족할 수 있을게다.
일에 쓰는 시간이나 부담이 적다면 그 남는 시간은 취미생활이나 배움에 쓰일 수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운동을 못하는 어린아이였던 나는, 정작 나이가 들어버린 지금에는 운동과 몸을 쓰는 것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지난 5년 간의 꾸준한 단련으로 근력이 조금 세졌으니까, 다른 무술을 배우거나, 남보다 조금은 더 재주가 있다고 생각되는 외국어를 배울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런 생활이라면 책을 원없이 읽을 수 있겠지 싶다. 집 한 구석, 마당 한 구석에 책을 읽기 좋은 공간을 마련할 것이다. 거기에 벚꽃나무라도 몇 그루 심는다면 봄에는 꽤나 운치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의 삶을 벗어날 수가 없다. 말은 쉽지만 삶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꾼다는 것은 큰 모험이고, 그 모험이 장기적으로 성공할 지에 대한 자신도 없거니와, 기본적인 준비를 위한 비용 또한 마련된 것이 없다. 사실 넓디 넓은 미국에서 물산이 풍부하고 사람이 많이 몰려있는 동부나 서부를 벗어나더라도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내가 하는 일은 큰 무리없이 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그러면 무엇이 당면한 문제일까? 우선 이주하고자 하는 주의 면허를 따야한다. 내가 속한 주는 워낙 많은 사람이 모여들기 때문에 시험도 어렵고 면허도 다른 지역과 통해있지 않기에 나 역시 다른 주의 혜택을 받을 수가 없다. 그런데, 시험을 본 것도, 공부를 한 것도 모두 까마득한 옛 일이라서 이에 대한 어려움 있다. 그 어떤 것보다도 큰 걸림돌이다. 공부도 다 때가 있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이 괜한 것이 아니라고 새삼 느낀다.
시험이 되면 다른 것은 나 아닌 다른 주변의 사람들을 설득하는 문제가 된다. 우선 시험이 된다면 그때의 업무량과 준비상태를 보고 판단할 일이다.
카잔차키스가 영국을 돌아본 시기는 1940년을 전후한, 독일이 일으킨 영토침공이 대륙을 넘어 확전되던 때였다. 거기에 1차대전 이후 점점 그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이 눈으로 보이고 몸으로 느껴지던 시절의 영국이었다. 거기에 사회의 양극화, 그러니까 귀족과 신사로 대변되는 상류계층과 그 하부구조를 받치고 있던 노동자 계급의 대립과 차이가 뚜렷하던 그 시절 그가 영국에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눈으로 내가 들여다본 것은 제국에 대한 그리스인로서의 부러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양면성 - 키프로스의 독립을 둘러싼 - 그리스에서는 볼 수 없는 활력과 힘, 자기최면이나 요망에 불과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리스가 같지 못한 영국 사회의 다이나미즘. 그 시절 터키의 지배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문화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오래된, 하지만, 고대 제국과 영광의 잔재만 남아있던 그리스를 보면서 느꼈을 비애. 모레아와 지중해, 중국과 일본, 스페인과 러시아까지 돌아본 그의 여행편력이 부럽기 그지 없다. 그러면서도 단순한 즐거움에 그치지 않고 이를 하나의 작품으로 녹여낸 그의 필력 또한 그 부러움의 대상이다. 기행문임에도 불구하고 한 통의 사진도 들어있지 않았다는 점이 그 힘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그가 묻는다. 영국은 제국의 경영자로써 그 품위와 공정성을 영국 자신의 이익이 걸린 일에도 적용할 수 있는가? 지금 우리가 21세기의 제국을 꿈꾸는 모든 나라들에게 묻고 싶은 말일지도 모른다.
최근에 나온 그의 빌-산-버린 책 3이 2주 정도면 내 손에 들어온다. 그간 장정일이 쓴 독서일기 일곱 권, 거기에 빌-산-버 두 권에 공부까지 모두 열 권의 독서일기를 읽었다. 비교적 요즘의 책에서는 약간 덜하지만, 정말이지 그가 읽은 책과 내가 읽은 책이 만나는 지점이 없다는 사실은 황당을 넘어 허탈하다. 주체할 수도 없이 많은 책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라지만, 그와 나의 독서궤적이 이렇게 엇나갈 수 있을까?
이런 경향은 초기의 독서일기에서는 더욱 심하다. 그러니까 90년대의 책만 해도 내가 읽기는 커녕 들어보지도 못했고, 어쩌다 아주 우연히 운 좋은 날 헌책방에서 마침 떠올리지 못한다면 만날 수도 없을 책들이 가득하다. 이런 점에서 장정일의 독서일기는 훗날 자기계발의 광풍과 함께 몰아닥친 독서경영서적과는 확연히 차별된다. 일례로, 내가 가진 독서경영서적이나 작가등단을 위한 독서후기서적을 몇 권 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문학서적, 계발서적, 에세이류가 등장하고 내 눈에는 꽤나 비슷한 단상을 제공하면서 비슷한 시기에 어쩌면 이다지도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이 비슷한 책을 썼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데 비해서 장정일의 독서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한 사람의 침잠을 보여준다. 특히 다른 그런 류의 책들과는 달리 장정일의 독서일기에는 좋은 책과 나쁜 책 모두 후기를 적어놓았기에 더욱 빼어남과 솔직함을 느낀다.
일찌기 공무원이 되어 8-5시까지 일을 하고는 발을 씻고 저녁을 먹은 후 자기 전까지 책을 읽는 삶을 생각했다는 장정일은 작가로서의 유명세 만큼이나 정말 많은 책을 읽은 사람이다. 요즘의 신진작가들이 입에 붙은 말이 책을 별로 읽지 않았어도 글을 쓰는데 지장이 없다는 것인데, 그들의 신선함과 대중성을 좋아하면서도 그만큼 느껴지는 가벼움과 얕음은 그 자체로 그들의 깊이를 보여준다. 요컨데,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좋은 글을 쓰려면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나도, 어쩔 수 없는 고시대의 유물같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이다.
여행과 독서가 지속적으로 가능한 삶. 마음이 편안하고 몸을 단정히 할 수 있는 삶에 드는 비용은 얼마나 될까? 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일과 공부를 병행해야할 이유가 된다. 다음의 삶을 준비하는 자세로써 말이다.
고작 책 두 권에 참 많은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문득 조금은 반성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