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을 다녀오는 길이다. 콜로라도주의 중심도시 덴버의 공항에서 돌아오는 비행기편을 기다리면서 잠깐 여유가 생겨서, 더 정확하게는 다른 일이나 정신을 좀먹는 것들에서 자유로운 시간을 갖게 되어 밀린 정리를 할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간만에 페이퍼를 열었다.  지지부진하면서도 구력이란 것이 있는건지 책읽기를 이어가고는 있다. 그런데 나를 확 잡아끄는 moment를 느끼는 것이 많이 힘든 것이 내 솔직한 요즘의 심정인데, 세속의 일을 완전히 떨어낸다면 모를까, 보통사람처럼 보통의 걱정과 신경을 쓰면서 살다보면 어느덧 늘 즐기던 것들도 몰입도가 떨어지는 것 같다.  이럴 땐 만화책이나 추리소설을 마구 읽어내는 것으로 마중물을 부어줄 수도 있는데, 그런 마음도 들지 않을 땐 그냥 답이 없는 것 같다.  















구해놓은 위화의 소설을 몰아서 읽고 있다. 여전히 약간 촌스러운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하지만, 생소한 장치와 감성을 볼 수 있어서 익숙한 작가들과는 다른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아주 보통 중국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데, '인생'에서는 중일전쟁부터 현대까지 중국이 겪은 일들을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 그려낸 점이 빼어났다.  '무더운 여름'과 '4월 3일 사건'에서의 단편들은 왠지 중구난방 같기도 했는데, 역자의 후기를 보면 이야기를 꾸며내는 기법이라고 한다.  아직도 몇 권이 더 남은 위화를 다 읽으면 아마 쑤퉁이나 모옌으로 가야할 것이다.  아니면 적절한 때를 기다리고 있는 다른 많은 책들 중 마음이 가는 녀석들로 관심을 옮겨갔다가 다시 오게 될 수도 있다. 내 삶이 그러고보면 무척 되는대로 같다.  이러다가 조울증이라도 생기는 건 아닌지?


'일본환상문학선집'의 두 번째. 란포를 구하면서 함께 구해 읽었다만, 시간도 많이 지났고 그다지 큰 흥미를 느끼기보다는 상당히 지루하게 이어지는 묘사에 피곤했었기 때문에 달리 쓸 말이 없다.  그저 일본근대문학에 갖는 꾸준한 관심의 발로라고 생각된다.  다른 작품에선 다른 느낌을 주려나?




이런 책들을 참 좋아하는데, 왠지 요즘에는 자주 읽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는 중세유럽의 가장 파란만장했던 시기를 세력권의 한복판에서 살아간 여인이다. 한 900년 정도만 더 늦게 태어났더라면 대단한 인생을 살았을 것 같다.  그 유명한 헨리 2세의 wife였고, Lionheart 리처드왕의 엄마였고, 그녀가 지참금으로 가져간 프랑스의 영토로 아마도 프랑스-영국의 100년전쟁의 이유가 되었을 여인이다.  종교에 죽고 사는 그 시절의 인간들의 모습도 다소 우습고, 너무 친하게 지내다가 어떤 특별한 이유가 없이 싸움이 나는 왕이나 대귀족들의 인간관계가 재밌다.  '살라미스 해전'은 너무 긴 시간을 두고 조금씩 읽어서 책의 안쪽으로 들어가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 것 같다.  다만 유럽이 지금의 유럽인 까닭을 과거로 trace해나가다 보면 레콩키스타, 십자군전쟁, 프랑크-사라센전쟁...그리고 살라미스 해전이 있다고 할 만큼 고대의 전쟁인 주제에 우리가 아는 그 후의 2000년 유럽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페르시아가 이때 그리스를 격파하고 세력을 심었더라면 그리스에서 로마로 전해진 문명도 달라졌을 것이라고 하는데, 잘은 모르겠지만, 2000년 후의 end result는 전혀 다른 유럽이었거나 세계질서였을 것이란 이야기가 아주 이상하지는 않다.


책을 읽어나가는 것이 조금은 신기하고 정신적 여유가 아닌 사치로도 느껴지는 요즘이다. 밀린 일도 무엇도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생존이 걸린 프로젝트를 하나씩 해결해서 완전한 쇄신을 이뤄내야 한다.  2018년은 그런 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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