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사진이라는 아주 초창기의 발명품이 나온 이래 지금까지 영상기술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왔다.  극장에서 모두 모여서 보는 영화에서, TV와 비디오, 디스크, 파일까지 지금은 다양한 방법으로 그보다 더 다양한 것들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극장에 들어가면 모두 동일한 비용으로 비슷한 자리에 앉아서 영화를 보는데 이게 은근히 기술발전에 따라 생긴 좋은 의미의 평준화를 보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계기가 어제 있었다.  머리털이 나고 처음으로 오페라극장에 가서 '호두까기 인형' 공연을 본 것이 어제였는데, SF Civic Center근처에 있는 SF War Memorial 센터에서 오후공연을 보게 된 것이다.  여름에 미리 예매를 해 두었고 미리 일정을 뽑아놓았기에 편하게 관람했지만, 당일 모여든 사람들을 보니 갑자기 표를 사서 가기엔 무리가 있을 것 같다.  어쨌든, 객석이나 의자 모두 너무 오래된 시설이라서 상당히 불편했는데, 특히 이런 live performance의 특성상 자리위치에 따라 가격차이가 많이 나는데, 당연히 좋은 자리일수록 비싸고 상대적으로 먼 자리일수록 보다 더 낮은 가격으로 표값이 책정되어 있다.  이는 비단 발레공연 뿐만 아니라 연극, 뮤지컬, 콘서트 같은 거의 모든 live 공연이 그런 방식을 채택하고 있고, 특별한 불만은 없다.  


하지만 어제 공연을 보면서 평등이라는 관점에서 새삼 극장이라는 장소, 극장영화라는 매체의 우수성에 대해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두서없이 든 생각이라서 글로 정리가 잘 되지는 않는데, 공연을 보면서 문득 산업혁명시대에, 돈을 많이 번 자본가들이 잘 차려입고 드나들었을 오페라하우스 같은 것의 이미지가 떠오르면서 상대적으로 훨씬 더 가난했을 대다수의 겨울과 크리스마스를 생각하게 되었고, 여기서 어떤 생각의 끈이 잡혀 현대의 영화관까지 왔던 것 같다.  책이나 재담꾼의 이야기 말고는 대단한 entertainment가 없던 시대에 visual한 entertainment로써 오페라나 뮤지컬, 음악공연을 간다는 건 엄청난 호사였을 것이다.  아마 처음엔 왕과 귀족의 전유물이었을 것이고, 대혁명과 산업혁명 이후엔 자본가들이 차지한 이 venue의 혜택은 어떤 의미에서는 아직까지도 보다 더 완벽하게 모든 이들에게 돌아가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아니, 역설적으로 지금 시대에 어쩌면 가장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만 생각해보면 엄청난 의미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나누는 지표가 이런 live 공연이 아닌가 싶다.  


극장은 모두 동일한 요금을 내고 들어가서 선착순으로 좋은 자리를 찾을 수 있고, 대개의 경우 돈이 더 많다고 더 혜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건 물론 live 공연처럼 엄청난 연습과 교육을 거친 performer들이 매회 live로 '노동'을 해가는 것에 대한 공임이 따르지 않는 무한재생이 가능한 영상매체의 특성상 가능한 것이긴 하고, live공연을 보는데, 매일 드나드는 것도 아니고 일년에 한번 두번 갈까말까 한 수준이라서 가격면에서도 대다수의 계층이 부담할 수 있는 수준이기는 하니까 어떤 문제의식을 가질만한 건 아니다.  하지만, 뭔가 묘한 찝찝함이 남는다. 


남자치고는 상당히 멜로우한 구석이 있어서 발레공연이 딱히 지겹지는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런 잡념이 공연 중에 떠올랐다는 건, 결국 생각이 조금은 사잇길로 빠졌다는 증거가 아닌가 싶다.  


오는 내내 길이 밀려서 저녁운동을 포기하고 와인을 마신 후 잤는데, 뭐가 잘못됐었는지 속이 뒤집어지는 바람에 아침까지 골골하게 누워있다가 겨우 몸을 추스려 서점에 나왔다.  곧 운동을 하려고 채비를 했는데, 몸은 조금 거부하고 있다.  이렬수록 강하게 자신을 채찍질해야 한다.  결론은 꼭 운동을 하겠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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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2-18 1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과거의 오페라 극장이나 음악 공연장에 왕과 귀족들뿐만 아니라 소위 잘 나가는 비평가들이 모였던 장소였을 거예요. 그들은 구경하기 좋은 자리에 앉아서 공연이나 연주를 감상해요.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나가거나 크게 야유를 했을 거예요. 정확한 내용은 아니지만, 빅토르 위고 중심의 젊은 작가들과 보수적인 기성세대 작가들은 극장만 모이면 서로 조롱하고, 몸싸움을 했다고 해요. 과격한 미래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려고 극장에 난입해서 게릴라 퍼포먼스를 진행했어요. 저는 극장이 기성세대, 보수들이 좋아하는 여가 공간이었다고 생각해요. ^^

transient-guest 2017-12-19 09:28   좋아요 0 | URL
그랬었나요..ㅎ 저는 그냥 객석구조를 볼 때 영화과보다 확실히 돈의 위계에 의한 서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갑자기 든 생각인데 계속 영화관과 대비한 과거의 질서 같은 것을 떠올렸어요. 지금도 어쩌면 영화관보다 덜 대중적이고 보다 더 문화적으로 고급(?)하다고 보여지는 점도 있고 해서, 기성세대, 보수, 상대적으로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한국이나 여기나 많이 비싸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