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책을 비롯하여 많은 아날로그 혹은 물리적인 thing이 사라져가고 있다. 전기문명은 거의 모든 것들의 digital화를 가능케하여 이미 음악이나 글, 그리고 영화 같은 매체들은 physically 구매해서 소장되기보다는 digitally 다운로드되어 소비된다.  


그런데 만약 그 어딘가의 누군가가 플러그를 빼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이 플러그가 빠지는 시점에 거의 모든 것이 digital화되어 물체로서의 책이나 음반, 영화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아니 책에만 한정해서 생각할 때,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책을 제대로 모으기로 맘먹은 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기실 그런 생각이 없이 그저 보는 책을 사모으고 치우지 않았던 것인데, 5-6년인가 전에 문득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기록의 전승 혹은 전달자로서의 identify를 규정하고 나같은 사람들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일종의 dying breed로서 언젠가 올지 모르는 암흑시대를 대비하자는 것.  다분히 소아적이고 RPG덕후 같은 생각이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가끔씩은 의무감을 갖고 내가 가진 것들을 늘려나가고 있다. 


책을 주로 이야기하지만, 게임도 사서 소장하는 편이고 음반이나 영화도 그렇게 모아들이기 때문에 언젠가 수집가들의 최고경지라는 부동산을 오롯히 이들을 정리하고 보관하기 위한 공간으로 사야하는 날이 올 것이다. 


세상은 넓고 인물도 많다는 말처럼 박균호님의 '수집의 즐거움'을 읽으면서 나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살짝 덜 외로워졌고, 그보다 더는 엄청 부러워하면서 술술 읽어지는 이 책으로 일은 놔버린채 오후를 보내고 있다.  피규어는 큰 관심이 없지만, 좋아하는 캐릭터의 피규어나 어린 시절의 로망이었던 로봇들을 종종 amazon.com에서 구경하곤 한다. 가격이 어마해서 그 값이면 책이 몇 권이야라면서 한번도 주문까지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수입이 더 늘어나고 공간적인 여유가 생기면 구해서 그간 모은 영화 - VHS, DVD, Blueray - 를 정리하면서 소품으로 사용해보고 싶다.  


알라딘에서 예쁜 소품이 많이 나오는데, 이만큼씩 책을 사면서도 오로지 미국이라는 이유로 이런 것들을 받아볼 수 없음이 너무 안타깝다.  '미스터 요리왕'을 주문하면 받을 수 있는 이자카야 맥주잔은 정말 갖고 싶은데...


'수집의 즐거움'을 보면서 그 아이템선정의 기발함에 놀라고, 착착 감기는 내용에 감탄하고 있다.


폴 앤더슨은 Tau Zero등 엄청나게 유명한 작품들을 다수 만들어낸 SF의 거장이다.  '브레인 웨이브'는 처음 접한 건데, 갑자기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체들의 머리가 좋아지는 일이 생기고 거기에 따른 혼란과 발전, 퇴보를 그리고 있다.  막연하게 생각하면 모두 머리가 좋아지면 다 좋을 것 같지만 자아가 너무 강해져서 각각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 단순한 허드렛일은 더 이상 아무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등, 모두가 똑똑해진 사회에서 각각의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형태의 삶을 살거나 그대로 사회를 바꾸어나가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면 역시 진화=발전의 등식은 성립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동의하게 된다.  결국 인류의 뛰어난 자들, 그러니까 IQ가 500정도로 올가가버린 원래 똑똑했던 사람들은 지구를 떠나서 우주로 퍼져나가는 방향으로, 이제 한 150정도가 된 사람들은 평화롭게 지구에서 남는 것으로 대략 정리가 되면서 결말을 맺는데, 아주 기발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플롯이었다.  네뷸러나 휴고상을 여러 번 수상했는데, 괜히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이틀간 큰 프로젝트를 하나씩 마무리했더니 오늘은 아무래도 힘이 빠진다.  내일은 또다시 열심히 일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내 '수집의 즐거움'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아니 어쩌면 '수집의 즐거움'이 원동력이 되어 단조로운 일상을 RPG모험으로 바꾸어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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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7-10-19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모으고 싶어도, 자주 이사 다녀야 하는 이 타향 살이 덕분에 늘 힘들어요.
그래도 저는 책 욕심을 버리지 못해 조그만 방 하나를 거의 책으로 채워놓고 있긴 해요.
이사 자주 다니기 싫어서, 책 옮기고 정리하기 힘들어서라도,
이 활동가 생활 때려치우고, 돈 많이 벌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transient-guest 2017-10-20 01:27   좋아요 0 | URL
activist의 삶에 따라오는 많은 것들 중 정주문제는 참 힘들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도 꾸준히 책을 읽고 사유하시고, 사회에 도움이 되는 활동을 하는 건 대단한 기백과 용기, 문제의식이 아닌가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 다른 걸 생각해보는 건 물론 human nature같습니다만..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