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의 책을 직접 읽어 보지는 못했다.  그전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인가 하는 책을 보관함에 담아 놓기는 했는데, 그 뒤로는 직접적인 관심보다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서, 때로는 악행의 의지가 없이도, 악이 행해진다는 법칙으로 한 동안 자주 접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단순해 보이는 법칙이 의외로 역사속의 많은 사건, 그리고 인물들의 행위나 변명을 설명해 주는 것을 볼 수 있다.  겉도는 이야기 말고, 따라서 한나 아렌트를 구해서 읽어봐야 할 것이다.


하인츠 구데리안은 독일의 군인으로서, 현대의 전차전을 사실상 정립하고 전술을 만들어낸 명장으로 알려져 있다.  밀덕들이 롬멜과 함께 자주 거론하는 전차전의 아버지 같은 사람인데, 군인집안에서 태어났고, 2차대전에서는 히틀러 휘하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특히 그때까지 전차를 보병의 보조유닛정도로 보던 시각을 완전히 뒤엎고 전차를 주력으로 하여 보병과 포병부대를 지원배치하고 함께 움직이는 기동전술로 2차대전 초기에 특히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인간으로서의 구데리안도 일견 특별히 흠잡을 만한 것들이 없어 보이기는 한다.  언제나 군인으로써 국제법에 준수하여 전쟁을 수행하려고 했고, 전쟁중에 일어난 포로학살이나 민간인학살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명하고는 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1) 우발적이거나 (2) 상세한 안내가 전달되지 않은 상황에서 상대방의 격렬한 저항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났거나 (3) 자질이 모자란 나치극렬분자의 문제 또는 (4) 게릴라전에 대한 결과물로써, 애초에 희생자들이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고 회고하고 있는 점을 보면 의심스러운 부분이 없지는 않다.  


더구나 이 책을 쓴 것은 그가 전범재판에서 책임을 면한 후, 그 증언과의 일관성을 배제할 수 없었을 상황에서 쓰여졌을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난 그의 말을 다 믿을 수는 없다.   


여기에 유태인 학살에 대한 그의 기억이나 입장이 사실상 거의 표명된 것이 없고, 나치당의 집권에 따른 민주주의의 후퇴나 자유민권의 압살, 전쟁으로 나아간 독일의 운명에 대한 성찰도 거의 보이지 않는 이 회고록에서는 그저 군인으로써, 군인의 눈으로 본 2차대전의 이야기와 간간히 나오는 전쟁 중의 대량학살과 고문에 대한 유감 외에는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한 군인이 전차를 이용한 전략전술, 여기에 관련된 성공과 실패의 복기가 내용의 전부가 된다.  


누구나 자기가 살았던 시대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말로 변명을 하기에는 좀 구린 구석이 있다는 것이다.  구데리안은 물론 자기의 기준 안에서 최대한 국제법을 준수하고 합리적인 전쟁과 후속처리를 위해 노력했겠지만, 극단적으로 미국과의 빅딜을 통해 처벌을 피하고 전후에는 사업가로 변신하여 부귀영화를 누렸던 731부대의 수뇌부와 구데리안과의 차이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시대를 바꾼 그의 천재성을 폄하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이 책을 보는 내내 불편함을 느꼈던 것은 일종의 '악의 평범성'을 여기서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앞과 뒤를 모두 잘라내고 보면, 아메리칸 스나이퍼 크리스 카일은 전쟁영웅이고, 국가가 자신을 필요로 하던 시기에 열과 성의를 다해서 군인으로써의 의무를 다한 용사라고 하겠다.  하지만, 이 사람의 관점은 그 왜곡이 매우 심각한데, 특히 철저한 이분법적 사고에 기인한 선악논리는 전투상황에서 자신의 임무수행을 위해 필요했을 정신무장의 단순함을 뛰어넘는 오만하고 무지한 미국인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 하여 매우 불편하고, 또 매우 안타깝기 그지없다.  


부시의 임기 동안 부자는 더 큰 부자가 되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전쟁터로 나갔으며, 중산층은 무너져버렸다.  그 시기를 살아낸 내가 볼 때 미국이 벌인 수 많은 전쟁들 중에서도 2차 이라크 침공은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나 정당화가 불가능한 범죄인데, 이 범죄와 애국을 버무린 거짓말에 속아 삶과 목숨을 바친 이들의 선의는 이해하지만, 그 정신에 박힌 신념의 근거는 빈약하다는 말로는 다 표현이 되지 못한다.  


크리스 카일의 묘사에 따르면 아랍인은 미군의 진주를 지지하는 평화로운 사람들과 이들을 괴롭히는 악한 무슬림으로 나뉘는데, 미국의 적인 그들을 카일은 야만인이라고 부른다.  이런 극단적인 타자화, 그리고 이에 따른 구분에 따라 그는 그가 죽인 생명에 대한 회한이나 존중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데, 이 또한 심한 불쾌감을 참을 수가 없다.  책을 보고 나서 생각하니 영화가 아무리 잘 만들어졌다고 해도, 난 이 영화를 보지는 않을 것 같다.  이스트우드도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찰튼 헤스턴처럼 변해가고 있는 듯.  보수에서 또라이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   알 권리가 있고, 알아야 할 의무가 우리는 있다.  이런 면에서 무지는 죄라는 성서말씀이 틀린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외국의 사례에서 보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일종의 법칙이 한국 근대사에도 적용이 될 수 있을까?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본다.  하지만, 우리 근대사, 특히 해방 이후 사회-정치-경제-법조-언론분야에서의 행태를 보면 확답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점이 있다 (최소한 50-90년대까지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 이후 김영상-이명박-박근혜로 이어지는 무법정치의 시기를 구분하는 것은 이런 연유로 의미가 있다.  즉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의 시기에는 대다수 국민의 '악의 평범성'을 논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보는데, 일단 대다수 국민에게는 결정권도, 올바른 인식을 갖추는데 필요한 정보도, 의식도, 삶도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승만-박정희 시기와 전두환-노태우 시기의 구분도 가능한데, 아무래도 좀더 시간이 지날수록 국민의 인식도 삶의 모습도 좋아지면서, 의식수준이 높아지고, 이에 따른 민주화의 열망이나 올바른 사회의식이 자리잡여 갔다는 점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결정권이 겉으로나마 존재하는 지금 한국이란 나라의 '악의 평범성'은 그 정점에 도달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죄, 소련과 미국이 진주하여 들어온 죄, 특히 미군정이 주도한 국가개편과정에서의 무분별한 친일파기용과 이를 업은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는 죄로 시작된 잘못 끼워진 국가재건의 단추가 지금까지 이어지게 된 것은, 비록 그 시작의 책임은 타자에게 물을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 내려오면서 만들어진 일부의 기득권화 과정, 또 이에 대한 대다수의 지향을 보면서, 한홍구 교수가 이야기하는 '책임'은 우리 모두의 것임을 느낀다.  


지도자의 역할은 중요하다.  그들에 편승하는 세력을 어떻게 주도하고 가이드하느냐에 따라 국민 대다수의 정서가 발전/성장할 수도 있고, 퇴행할 수도 있다.  책임의식이 없는 자세가 국가전반으로 확대되어 국민 대다수가 자기만 잘살면 된다는 attitude를 형성하던 군부독재시기로 다시 돌아온 지금을 보면, 한홍구 교수 같은 이의 외침이 얼마나 먹혀들지는 의문이다.  


당장 급한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매사에 있어 우선순위가 된 지금이다.  보편적으로 잘 살거나 아주 못살게 되면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나 바꿈에 대한 소망이 생기는데, 지금의 현상은 딱 그 가운데에 국민 대다수를 두고 있는 형국이다.  민주주의가 진화한 것처럼 군부독재도 철저한 study에 기초하여 진화한 셈이다.  마치 고용주가 어떻게든 고용인을 쥐어짜되, 딱 버틸만큼의 wage만 주는 것처럼.  


그저 읽고 생각하고 나누는 수밖에 없는데, 그런 행위조차도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생각하는 방법이, 사고관이 다른 지금의 20-30대의 사회의식은 어떤 형태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내가 아는 것이 다라는 사고를 갖다보면 어느새 늘어난 나이와 함께 꼰대가 될 수 있음이다.  열린 마음으로, 그리고 언제나 겸손하게 세상을 바라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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