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주요가구를 주문하는 것 외에는 거의 arrange가 끝났다. 오늘은 마침 어제 주문하고 셋팅한 인터넷과 전화선이 들어오는 날이라서 일터로 나가지 못하고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이런 서비스가 들어오는 시간대를 잡아주기 때문에 오후 12-2시 사이에는 텅빈 오피스에서 기다려야 한다. 가구도 무엇도 없고 인터넷도 없기 때문에 업무는 그야말로 문서작업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곧 들어갈지 더 기다릴지 고민하고 있다.  땅바닥에 앉아서 문서를 작업하는 건 상당한 중노동이라는 생각과 도서관이든 어디든 바닥에 잘 주저앉아 책을 보고 공부를 하던 학창시절로 돌아가는 듯한 기분의 사이 어디엔가 내 정신이 맴돌고 있는 상태.  


새 오피스가 있는 건물은 이전의 오피스보다 훨씬 더 중심가로 나왔음에도 근처에 도보로 갈 수 있는 음식점이 많이 있다. 무엇보다 나의 비공식 아지트가 되어버린 서점에서 매우 가까운, 차로는 대충 5분 정도 떨어져 있기 때문에 내 로망을 실현하는 것도 가능해진 것이다. 내 사무실을 운영하던 첫 해, 고즈넉한 반스앤노블서점 (다른 장소에 있다가 폐업한)의 카페에 앉아서 언젠가 잘 돌아가는 회사가 되면 목요일이나 금요일의 오후에 다소 한가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날, 볕이 좋은 서점카페의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간단한 업무를 보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하겠다는 로망 말이다.  비록 그때의 지점은 사라지고 없지만 그래도 이 근처에서는 거의 유일한 오프라인서점이 되어버린 이곳의 반스앤노블이 지척이라니.  누군가 햇살이 따가운 늘어지는 어느 금요일 오후 3-4시에 이곳에 오면 한 구석에서 간단한 문서꾸러미와 책 한 권을 집어들고 나와 노닥거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런 저런 찬사가 가득한 작품이고 읽는 재미도 좋았으나 딱 거기까지. 활극이나 본격추리도 아니고 사회파도 아닌 경찰학교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다소 끔찍하기도 하지만 소소한 사건들이 해결되는 이야기. 주인공이라고 할 만한 인물은 없으나 중심은 '교장'이 되어버릴 운명의 임시교수라고 하겠다.  비상한 관찰력으로 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을 파악하고 위험한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주된 플롯인데, 소설의 재미보다도 그냥 일본인들을 끔찍하고 잔인하게 만드는 어떤 민족성이나 본능이 폐쇄되고 왜곡된 환경과 관계에서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엿본 느낌이라서 읽은 후에는 꽤나 불쾌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호흡은 짧게 가져갈 수 있는, 매우 빨리 읽을 수 있는 책인데, 가격에 비해 이런 점도 조금은 불만스럽기도 하다. 여하튼 꼭 책이 두꺼워야 하는 건 아니지만 요즘에 나오는 책의 활자크기와 글자수에 대비해서 가격이 적정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재미에도 불구하고 이 책도 그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명실공히 추리소설의 여왕이라는 수식어가 전혀 이상하지 않은 애거서 크리스티가 다른 필명으로 쓴 여섯 개의 작품들 중 첫 번째. 예전에 전작을 하면서 모조리 사들여 보관하다가 추리소설전작이 끝나고도 한참이 지난 이번에 읽었다. 읽는 내내, 계속 가슴과 머리를 망치로 두들겨 맞는 듯, 그렇게 울림을 받으면서 깊은 공감을 느꼈는데, 조앤의 무신경함과 정당화, 성인 ADHD스러운 면이 부각되는 독재, 그 안에서 온화한 인간성, 그리고 시대가 부과한 '결혼'이라는 제도에 따라 가정을 지키면서 꿈과 삶에서 멀어진, 스러져가는 로이드라는 남편을 보면서 서글펐고, 화가 났고, 잠깐 갱생의 여지가 보이던 조앤이 결국 일상으로 복귀한 후 도로아미타불로 다시 ADHD적인 삶의 독재와 인지무능의 철권통치를 이어감에 역시 천품은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오독인지 모르겠지만 마지막에 로이드가 그토록 바라던 삶을 시작하기 위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듯한 묘사를 봤는데,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다.  빅토리아시대를 넘어 지금까지도 어쩜 우리의 삶은 그렇게 편향된 사고와 성질머리, 자신의 생각과 말 외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휘둘리는지.  어쩜 그렇게 facade를 그리도 단단히 구축해놓고 안주하고 나머지는 애써 무시하고 인정하지 못하는지. 로이드에겐 농장경영의 꿈이, 나에게는 하와이에서의 삶에 대한 꿈이...


르귄이 자라나던 40-50년대의 버클리. 지금도 매우 자유로운 기풍으로 유명한 도시지만 미국의 다른 지역에선 흑백차별이 당연시되던 시절에 벌써 흑인학생에 학생회장을 하던 멋진 도시. 미국진보의 마지막 보루는 뉴욕과 켈리포니아라고 생각되는데, 그 켈리포니아에서도 버클리와 샌프란시스코는 트럼프의 미국에서 힘겹게 싸움을 이어가는 최전방이자 마지노선이 아닌가 싶다. 그런 자유로운 기풍의 도시에서 자라난 책을 좋아하는 여자아이는 판타지계의 거성이 되었으니, '맹모삼천지교'까지는 아니라도 사는 환경이 상당히 중요한 건 사실이다. 요즘 아시아계 부모들에게 '핫'한 곳은 그저 교육환경이 좋은, 덕분에 꾸역꾸역 몰려든 이들이 한껏 키운 버블로 집값이 천정부지로 솟은 동네들이지만 (쿠퍼티노, 어바인 같은), 사실 아이들은 이렇게 자유분방하고 충분히 diverse한 환경에서 자라야 한다. 부모들이 어찌나 난리들을 치는지 이제는 한국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딸리지 않을 조기사교육이 주류사회까지 잡아먹는 북새통을 이상적으로 보는 아시아계의 독소가 트럼프의 짓거리 이상 미국의 미국다움을 없애고 있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  자식이 있다면 조금으 더 slow한, 충분히 놀고 적절한 공부로도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그런 중소근교도시가 훨씬 더 나은 곳에서 독서와 운동, 놀이와 교양을 갖춘 삶을 줄 것이다.  물론 현실은 무자식이 상팔자


예전에는 '황금가지'나 '엘릭시르'에서 좋은 SF를 많이 출판해주었는데 요즘은 단연코 '아작'이 최고라고 생각될만큼 주기적으로 좋은 책이 많이 나와주고 있다. 호건의 '별의 계승자'를 시작으로 인연을 맺었는데 절판이나 품절되기 전에 지금까지 나온 대략 60여권을 모두 갖추려는 맘이 나를 조급하게 만든다. '옥스퍼드 시간여행 3부작'의 코니 윌리스는 단편도 상당히 많은 듯, '아작'에서도 여러 권을 벌써 들여왔고 대부분 상당히 인상적인 이야기들이 많다.


시도를 볼 때, 그리고 작가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으로 나쁘지 않게 본 책이지만, 알라딘서재의 고수 '나귀'님의 평을 보니 내가 이 책을 보면서 짚은 이런 저런 이슈들이나 의문점들이 다시 떠올랐다.  조금 더 선별하고 조금 더 파고들었더라면 더 나은 책이 되었을 것인데, 작가의 문제도 있겠지만 난 최후의 보루는 편집자라고 보기 때문에 편집과정에서 더 제대로 걸러내지 못한 점이 문제라고 본다.  언젠가 더 나은 책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테마.


넓어진 사무실에 아직은 채워넣은 인원이 없으니 반 이상을 일종의 Archive로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책은 거의 다 정리가 가능할 것 같은데, 대문사진에서 보이는 4X4 Ikea Kallax 다섯 개, 그리고 좁고 높은 Ikea Billy계열의 책장 10개, 여기에 회의실에 넣을 유리문이 달린 조금 팬시한 깊은 책장 세 개.  지금 사는 공간에도 어느 정도 책을 갖고 있으니.  그런데 문제는 그간 모아들인 영화와 게임소프트가 되는데, 이런 건 오픈공간에 두면 하나씩 없어질 것 같고 (책은 아무도 안 가져가지만) 막상 사는 곳에 두자니 자리가 모자랄 것 같다.  정리하면서 해결해갈 고민이다.  


다음 주부터는 새로운 공간에서 일과 정리를 병행하는 것으로 5월이 다 지나갈 것이니 벌써 한 해의 반에 성큼 다가선 느낌이다. 40대의 시간은 매년 1마일씩 빨라지면서 시속 40마일을 기본속도로 달려진다.


아는 만큼 읽어지고 보이고 이해된다.  이제 네 권이 남았고 시리즈를 끝낸 후 언젠가 시간이 나면 천병희교수의 원전번역을 읽을 차례.  배우는 것이 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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