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다른 일이 있어 집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내가 하는 일이란 것이 결국 지식노동이라서 전화와 PC 및 인터넷이 있고 처리할 문서만 곁에 있으면 어디서든 할 수 있기 때문에 누리는 호사이자 속박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사계절의 나라와는 비할 수 없지만 이곳의 기준으로는 무척 추운 겨울을 지내느라 이른 새벽이나 늦은 밤의 운동이 쉽지 않다. 그런 이유로 어제와 그제를 모두 쉬었기 때문에 자칫하면 풀어질 수 있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라도 오늘 오전에는 다소 센 강도로 upper body 운동을 진행했고 덕분에 좋은 기분으로 아침식사와 커피를 옆에 두고 일을 하고 있다.  I can't complain. 


뭔가 하루종일 긴 호흡을 갖고 처리할 일, 예를 들면 기관에 보내는 편지처럼 적게는 20페이지에서 많게는 50페이지 이상이 나오는 건 가급적 그것만 붙잡고 끝을 봐야 한다.  사무실을 떠나서 극단적으로 단순하게 만들어진 환경에서는 이런 일이 잘 처리되는데 아무래도 자잘한 행정업무와 서류더미가 쌓여 있고 아직은 서포트를 받지 못하는 탓에 주의가 분산되는 문제가 없어서 그럴 것이다.


책주문을 조금은 늦추려고 했으나 코니 윌리스의 '둠스데이북', '화재감시원', 그리고 '개는 말할 것도 없고'를 읽고 나서 갑자기 그가 쓴 '옥스퍼드 시간여행 시리즈'에 관심을 갖게 되어, 결정적으로는, 최근에 이 시리즈가 완간되어 버리는 바람에, 이런 저런 책을 여러 권 주문하게 되었다.  덕분에 3월부터는 다시 책이 가득 든 상자가 하나씩 도착할 것이고 나는 이미 포화상태인 모든 보관공간 어디를 이용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될 것이다.  


언젠가 더 나이가 들고, 조금 더 나은 형편이 되면 대략 20평 정도의 공간을 별도로 확보해서 책과 영화, 미디어와 게임자료를 보관하고 싶다. 일종의 연구소라고 해도 좋겠는데 일을 하지 않게 되는 언젠가의 시간이 와도 매일 출근할 곳으로 만들어 일정한 생활패턴을 유지하고 싶은 맘, 그리고 끝도 없이 집의 공간이 잠식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내가 무엇인가를 모으는 건 아마도 과거에 갖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집착일 수도 있는데 책도 그렇지만 게임이나 만화책, 영화를 모아들인 양을 보면 확실힌 그런 면이 없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빅뱅이론의 에피소드에서 보면 셸든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가졌던 모든 걸 버리지 못하고 모아둔 창고가 나오는데, 조금 심했다면 나도 그랬을지 모르겠다며 공감했으니까.  약간은 병적인 집착이라는 생각을 하는 이유다.


오후 세시무렵에 오늘 목표했던 수준의 업무를 진행했다. 무척 바쁘게 지나간 1월의 반작용인지 상대적으로 훨씬 slow한 2월이라서 밀린 업무를 진행하고 이참에 그간 미뤄지다 못해 이제는 무조건 빨리 마쳐야 하는 number 1 priority가 되어버린 회사의 홈페이지개정을 계획하고 있다. 연초에 갑자기 호스팅사이트의 시스템이 업그레이드되면서 통째로 날아가버린 탓에 임시화면만 띄운 상태인데 장기화되면 아무래도 사무실이 망한 줄 알고 연락이 안 올까봐 불안하다.  


하루종일 의자에 앉아 타이핑을 했더니 무척 답답하기도 해서 바깥으로 나왔는데, 한국대도시의 아파트밀집지역처럼 지근거리에 갈만한 곳이 많은 구조가 아니라서 결국 서점으로 왔다. 주말에는 나와서 노닥거릴 시간이 있지만 평일에는 좀처럼 나올 여유가 없는데 간만에 목요일에 나왔다.  맥주를 마시고 싶은데 한편으로는 아침에 너무 근육운동만 해서 그런지 한바탕 달리고 싶기도 해서 뭘 할까 망설이고 있다.


공적인 연구를 하는 대학이나 기관이 돈문제를 겪는 건 예나 지금이나 같아서 2025년의 미래에도 가장 강력한 재력으로 기관과 대학을 휘어잡고 있는 기부자의 등쌀에 연구원들을 과거로 보내고 있는 중. 그것도 무려 2차대전의 초반, 독일공군의 공습을 받아 무너질 성당을 중심으로 이런 저런 시간대를 오가면서 기부자가 원하는 유물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는 이야기. 그 맛보기는 '화재감시원'에서 잠깐 가능했는데, 아무래도 해결이 되지 않았는지 19세기말로 사람이 보내지고 그 이전에 보내진 연구원의 행동으로 시간의 연속성이 붕괴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 건 부수적인 임무. 그런데 막기는 커녕 한 걸음 더 나아가 만나서 사랑에 빠져 아이를 낳고, 그 아이는 다시 2차대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하는데, 그 만남을 방해하게 된다. 19세기 영국인들의 감성과 예의, 끔찍한 음식문화 사이에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그러니까 유물의 단서를 찾고, 또 뒤섞인 인과관계를 바로잡기 위한 좌충우돌이 소설의 주된 이야기가 된다.  앞서 읽은 '둠스데이북', '화재감시원', 그리고 이번에 주문한 몇 가지 이야기로 이루어진 옥스퍼드 시간여행 시리즈는 코니 윌리스의 걸작이 아닌가 싶은데, 일단 시간여행은 SF팬이라면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이야기인데, 거기에 네뷸러와 휴고상을 모두 받은 작가의 필력이라면 더 이상 저항하는 건 무리가 아니겠는가. 결국 이 책을 읽는 과정에서 주문한 책이 더 늘어나버렸고 늘 반복되는 나의 기다림은 또 시작되었다. nature finds its way라는 것이 결론인가.


셋트로 주문하지 못하고 낱권으로 주문한 탓에 이런 예쁜 박스를 받지 못했다. 오다가 파손되기도 하는 등 문제가 많고 그때마다 계속 claim을 걸어야 하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예전에 나온 책을 양장본으로 개정했고 1부가 세 권으로, 2부가 두 권으로 우선 나왔는데, 그걸 모르고 다섯 권으로 다 끝나는 걸로 생각했다. 시골뜨기 주인공이 기사가 되겠다고 고향을 떠나는 부분에서는 판타지의 전형이라고 생각했으나 딱 거기까만 그랬는데, 일단 주인공 카셀은 검술에 재능이 없기 때문이다.  처음엔 못해도 나중엔 기연을 통해 조금씩 강해지는 것이 판타지의 전형이라면 카셀은 무력엔 아예 소질이 없고 더 나아질 가능성도 없으며, 무엇보다 그가 '캡틴'으로 이끌게 되는 기사단하고도 그 꽃이라고 할 하얀늑대들 근처에도 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리더로 변화하는데, 무력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한 집단을 이끌 수 있다는 걸 상당히 설득력이 있게 보여준다.  정말 오랜만에 읽는 판타지, 적절히 무겁고 적당히 가벼우면서도 너무 동화같지 않기에 즐거웠다. 남은 이야기가 있어 기다림은 피할 수가 없는데 묘한 긴장감이 계속 이어지는 것도 그렇게 어쩌면 이야기의 주도권이 넘어갈지도 모르는 상황이라서 더욱 숨을 돌릴 수가 없다.  아무래도 판타지라는 장르가 서양에서 그들의 문화의 다양한 모티브를 가져와 만든 것이라서 novelty는 떨어질 수 밖에 없고 이에 따라 한국의 작가가 쓴 작품이 서양의 작품들과 비교할 때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는 것도 무리가 있지만 사고와 문화가 다른 사람이 서양의 판타지를 차용함을 통해 나올 수 있는 독특함이 있어 한국형 판타지도 잘 쓴 작품에 한해서 무척 매력적이다.  


이번 주만 놓고 보면 오늘까지는 원하는 수준의 업무량, 계획했던 것들을 상당부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문득 그간 너무 지쳐서, 아니면 나태하게 일을 해온 건 아닌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늘 주도적으로 일을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현실은 일에 끌려온 것이 지난 2-3년의 내 모습인 것 같아서, 말 그대로 심기일전해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각오를 다졌다.  I owe it to myself to work hard 랄까. 뭔가 좋은 일이 생기려면 공이 쌓여야 하는데 그 공을 쌓는 것이 2017-2018의 어려움을 견뎌내는 댓가였을지도 모르겠다.  Indecision by over-analyzing을 피하고 그저 action plan을 잡고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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