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 오후가 시작된 시간이다. 잠깐 볼일을 보고나서 사무실로 들어가는 대신 서점으로 와버렸다. 그만큼 한가하기도 하거니와, 달리 갈 곳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일이야 찾으면 뭐라도 할 일이 있겠지만, 어쩐지 머리를 쓰기 싫은 내 기분이 자연스럽게 서점으로 나를 보내버린 것이다. 밀린 이야기를 몇 개 정리하고 책을 좀 읽다가 하루를 마감할 생각이다. 오늘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잠깐 spin을 돌리고 한 시간동안 요가를 했다. 요가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나서의 세 번째 요가강습이었는데 오늘은 꽤 고강도의 동작이 많았던지 한 시간을 하면서 땀을 엄청 흘렸는데, 역기를 들면서 흘리는 땀과, 달리기를 하면서 흘리는 땀, 그리고 요가처럼 정적인 운동을 하면서 흘리는 땀의 느낌이 각각 다르다는 점이 무척 신기하다. 요가를 하고 나서는 그 좋은 기분을 그대로 이어가려고 더 이상 운동을 하지 않고 얼른 집에 가서 씻고 아침식사도 채식을 했다. 자주는 안 될 말이고 아주 가끔은 이렇게 아무런 일정이 없는 평일도 나쁘지 않다고 종종 말한다.  slow down된 business를 빼면 오늘이 딱 그런 날, 딱 그런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날이다.  봄바람이 부는 따스한 실리콘밸리의 날씨는 3-5월 사이가 가장 좋고, 9-11월이 그 다음으로 좋다.  인구가 갑자기 늘고 집값이 3-4배로 뛴 탓에 매연과 스모그도 늘었지만, 그래도 사는 곳은 산이 가까워서 그런지 저녁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공기가 정화되어 새벽이면 쌉쌀하고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다. 온갖 첨단기업이, 그리고 그걸 보고 몰려든 인간들이 돈을 싸들고 와서 집값을 올려버린 이유가 이런 좋은 환경이 아닌가 싶다.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의 작품은 환상과 역사, 그리고 현실을 경계를 넘나든다는 걸 '뒤마 클럽'을 읽으면서, 그리고 그 책을 원작으로 한 the 9th Gate를 그 전에 보면서 이미 알 수 있었다. 아마 내가 이 작가의 책 몇 권을 주문했던 계기가 '뒤마 클럽'이라고 기억하는데, 이번에 갖고 있는 두 권을 모두 읽고, 이는 다시 마침 중고로 풀린 물건들까지 작가의 소설을 모조리 주문해버리는 계기가 되었으니 책과 책, 작가와 작가, 때로는 작가와 책을 넘나드는 여행은 무척 즐겁다. 


때는 스페인왕정의 말기, 대략 19세기의 중반이다. 이미 검술이나 결투 같은 호사스러운 귀족의 취미는 피스톨같은 화기에 자리를 내어 준지 오래다. 한때 촉망받는 프랑스군의 장교였고 당시 파리의 검술대가였던 선생의 의발제자였던 돈 하이메 아스타를로아는 생계를 위한 검술교습으로 근근히, 딱 신사의 체면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으로 살아가고 있다. 살고 있는 아파트에는 과거 영광스러웠던 시절의 흔적과 책으로 채워져 있는데, 어울리는 사람들이라고는 그가 검술을 가르치는 귀족, 귀족의 자제, 그리고 카페에서 떠드는 이들 몇 명이 고작이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그의 삶에 어떤 여자가 걸어들어오면서 그가 몸담고 있던 세계의 안팎이 완전히 바뀌는데, 그가 dearly hold하고 있는 golden age의 가치관, 이에 근거한 대인관계까지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건 결국 검술과 검술로 대변되는 구시대의 가치관에 입각한 탈세속적일만큼 주변에, 사회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그의 탓이 가장 크다.  혁명가도 무엇도 협잡꾼에 다름아님을 알게 되고, 잠깐이나마 다시 사랑에 빠졌던 대상이 또한 그를 속였음을 알게 되는 노검객의 남은 인생이 무척이나 덧없게 느껴진다.  하나의 가치관을 고집하고 그 모습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모습에는 처연함 이상을 위엄이 있다만, 그거 말고는 달리 아무것에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건 좀 딱하다.  소설을 읽으면서 생뚱맞게도 펜싱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검도를 하지 못하게 되었고 아직도 그 부상이 완치되지 않았기에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더 무도에서 멀어지고 있는데, 혹시 서양의 검술을 익히는 것으로 이 맘을 달래볼 수 있으려나?


갑자기 현대로 와 버린 작품속의 세계에 문득 어지러움을 느끼면서 아주 잠깐이지만 책읽기를 미룰 생각이 들었던 건 결국 '검의 대가'에 너무 깊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종의 learning curve와도 같은 이 현상은 기실 책에서 책을 넘나들면서 흔히 겪는 일인데, 한 권의 책에 푹 빠져 읽고나면 그 증상이 좀더 심한 것 같다.  


주인공은 문화재급의 그림을 복원하는 화가. 어느 날 주문을 받아 작업을 하게 된 그림에서 숨겨진 메시지를 찾아내고, 단순히 그림값이 올라가는 계기로 생각되었던 그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그림속에 머물러 있었어야 할 미스테리가 하나씩 현실로 펼쳐진다. 이걸 풀어나가기 위해 그림속의 체스게임을 멘토와 함께 찾아낸 체스의 고수랑 풀어나가는 과정은 소설의 중요한 부분인데, 대충이지만 체스의 기본룰을 아는 것이 소설을 이해하는데 나름 도움이 됐다.  체스라는 게임에 대한 오이디푸스적인 해석도 신선했고, 장기판의 주인공들인 각 장기말, 특히 비숍에 대한 해석은 무척 특이했는데, 역시나 이 책을 보면서 체스를 두고 싶어진 나였다.  가끔 구닥다리 영국늙은이처럼 잘 만든 체스판, 역시 정성들여 만든 장기말을 양측에 포진시키고 책을 보면서 혼자 체스를 두는 자신을 그려보는데, 멋지다고 혼자는 생각해겠지만, 남들의 눈에는 셸든 쿠퍼처럼 보일 것 같다. '검의 대가'의 추리는 그리 어렵지 않았으나 의외의 반전에 잠깐 당황했던 책이다.


잔잔한 위로 같았던 책. 지친 눈과 마음을 차분하고 희망적으로 바꾸어 준, 뭔가 설레임을 가득 던져준 책.  늘 여행을 꿈꾸지만 현실은 일년에 한번 멀리 가는 것도 감지덕지하는 수준. 근처에 쉽게 다녀올만한 곳들이 많이는 있지만 어쩐지 마음의 여유가 없는 요즘은 쉬는 날은 그저 쉬고, 일하는 날엔 쉬는 날 어디론가 떠나는 것을 상상하는 기괴한 쳇바퀴를 돌리는 것이 이 아저씨의 일상이다.  사진과 글이 어우러진 펜그림이 무척 담백하다.


세계 최대의 서점거리 진보초. 일상의 아무런 꿈이 없이 그저 책을 읽고 산책을 다니는 삶을 살기 위해 일주일에 이틀 정도 아르바이트를 하던 저자는 우연한 계기로 서점에 입사하고 다시 우연히 그런 마음이 들어 중고서점을 열고 지금까지 버텨오고 있다. 차별화, 문화공간화, 다중적이고 유기적인 책과 다른 것들의 연결이 아무리 일본이라도 점점 책이 덜 팔려가는 요즘 같은 시대에도 이런 중고서점이 유지되게 하는 것 같다.  갑자기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듯한 생각을 했는데, 저자가 살던 아주 조금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책을 읽고 산책을 하는 삶을 걸어볼 방법이 없지는 않다만, 버려야 하는 건 욕심과 미래에 대한 걱정인데, 이걸 쉽게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몇 이나 있을까. 그래도 절약하고 필요 없는 걸 사들이지 않으면 책과 산책으로 가득한 삶이 가능하다는 구체적인 실증사례를 본 것 같아 은근 기쁘다.


삶과 이룬 모든 것들이 어머니가 그린 아들의 인생, 그러니까 어머니의 꿈이 투영된 것 같았던 전쟁영웅, 정치가, 빼어난 작가이자 유명인이었던 로맹 가리의 유서와도 같은 책. 이 책이 쓰이고 1년 정도 후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고 하니 말 그대로 유서가 된 생의 반추가 아닌가.  '새벽의 약속'에서 극화되었던 로맹 가리 자신의 이야기를 좀더 여과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데, 그 삶과 죽음을 보면 로맹 가리는 늘 나에게 쓸쓸함과 허무함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제 겨우 오후 두 시가 되었는데, 벌써 하품이 난다.  아침잠이 없는 편이지만 역시 새벽 네 시에 일어난 하루는 오후가 피곤하다.  커피를 많이 마셔도 하품이 나고 졸음이 오는 건 완전히 이겨낼 수 없고 그저 막상 자려고 누워버리면 잠이 오지 않게 할 뿐이다.  


허름한 아파트이지만 배란다를 화분과 이런 저런 물건으로 둘러서 바깥의 눈을 차단하고 낮은 의자에 앉아 책을 읽기 좋은 자리로 만들었다.  날씨가 풀린 요즘은 그렇게 퇴근해서 그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음악을 듣다 보면 2-3시간이 금방 지나가버린다.  오늘도 그 시간을 즐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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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4-26 07: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새벽 다섯시만 되면 눈이 떠져요. 정신이 맑으면 읽다만 책을 보고, 그렇지 않으면 눈을 붙입니다.

transient-guest 2018-04-26 09:11   좋아요 0 | URL
아침에 일찍 책을 읽는 건 그 나름대로의 맛이 있죠 ㅎㅎ 차나 커피 한 잔 끓일 때 그걸 기다리는 시간까지도 운치가 그만입니다 ㅎ

cyrus 2018-04-26 11:56   좋아요 0 | URL
아침 출근시간이 여유로워 진다면 저도 t-guest님처럼 모닝커피를 끊여서 마시고 싶습니다.. ㅠㅠ

안녕반짝 2018-04-26 1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검의 대가> 오래전에 정말 인상깊게 읽은 책이었는데 여기서 보니 반갑네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저도 잔잔한 위로를 받았어요.
또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것에 대해 자신읽게 밝히기도 했고요.
저는 여행 준비가 너무 귀찮아서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걸 인정하기로 했거든요.^^

transient-guest 2018-04-27 05:04   좋아요 0 | URL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의 작품은 아주 특이한 것 같아요.ㅎ 여행준비 없이 떠나는 여행도 있으니 아예 여행을 제껴놓지 마시구요..ㅎㅎㅎ 저는 사실 무계획여행이 더 좋은 사람인데 막상 너무 무계획하게 가면 어렵게 간 여행을 제대로 누리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ㅎ 자기류가 최고라고 봐요.

이지 2018-04-26 13: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봄바람이 부는 가장 좋은 4월은 밖으로 산책을 다녀야죵!

transient-guest 2018-04-27 05:05   좋아요 0 | URL
물론이죠.ㅎ 근처에 파크가 제법 있어서 좀더 날이 풀리면 산책도 하고 책 한권 들고 나갈 생각입니다.

LAYLA 2018-04-26 15: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에 여러개 담아가네요^^ 책이야기 나눔 감사합니다 :)

transient-guest 2018-04-27 05:05   좋아요 0 | URL
Layla님 안녕하세요!! 저도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