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적 최근에 보게 된(이라고 밖에 쓸 수 없는 게 슬프다) 두 편의 영화는 아주 묘하게도 비슷한 것을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놓고 경쟁한 이창동의 <버닝>과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이 만들어내는 끊임없는 긴장. 혹은 영화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과 영화에서 보여주지 않는 것이 영화를 보는 동안 내내 (내 안에서) 빚어내는 충돌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 영화 <어느 가족>에서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이 그렇게나 믿고 있는, 혹은 제대로 본다고 생각하고 있는 가족이라는 것, 혹은 더 나아가 삶이란 것이 무엇인가요? 인물을 마주 대하게 만드는 후반부의 몇몇 신들은 (역설적으로 카메라의 존재를 드러내보이면서) 보는 이들에게 카메라 너머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라고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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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7-31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시죠? ^^

영화를 잘 보지 않지만, 맥거핀님의 영화리뷰를 자주 읽어보고 싶어요. 제가 생각하는 맥거핀님의 영화리뷰의 매력은 ‘진지한 분석‘이에요. 8년 전, 영화리뷰가 활성화된 시절에 맥거핀님처럼 영화리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너무 뜸하신 거 아니에요? ‘이달의 영화리뷰‘가 폐지된 이후로는 수준 있는 영화리뷰를 만나기가 어려워졌어요. 특히 맥거핀님의 빈 자리가 너무 큽니다.

맥거핀 2018-08-01 15:24   좋아요 0 | URL
cyrus님도 잘 지내시나요? 이렇게 오랜만에 흔적 남겼는데도, 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cyrus님이 책에 집중하셔서 그렇지, 영화 리뷰도 마음먹고 쓰시면 잘 쓰실텐데요. 저는 사실 요새 영화를 많이 못봐서 쓰기가 힘들어요. 아니, 뭐 출퇴근 하면서도 그렇고 집에서도 뭔가를 작은 화면으로 보기는 하는데, 그거는 또 ‘영화‘라는 것과는 다른 것 같아요. 내용은 영화지만, 작게 끊어서 보는 것들은 또 영화라는 것은 아니지 않나...하는 생각도 듭니다. 영화는 결국 큰 화면으로 2시간 정도 ‘견디면서‘ 보는 것이 영화가 아닐까요?

저는 ‘수준있는 영화리뷰‘는 못 쓰지만, 예전에는 그런 영화리뷰를 쓰시는 분들이 조금 계시기는 했지요. 제가 알라딘에 이끌려 들어온 것도 그런 분들의 리뷰를 훔쳐보다가 그렇게 된 건데...그래도 책에서는 알라딘에 아직 좋은 리뷰 쓰시는 분들은 많은 것 같아요. 물론 cyrus님도 그 중에 한 분이구요. 저도 책을 살 때는 아직 알라딘의 리뷰를 많이 참고하고는 있답니다.^^

2018-08-04 0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7 15: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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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의 소설들에 있는 몇 개의 문장들을 곱씹는다. "독일에서의 일은 이제 뿌연 유리창으로 보는 바깥 풍경처럼 희미하다." <씬짜오, 씬짜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생각했던 할아버지는 그저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쇼코의 미소> "여기가 미진 방이었어요." <먼 곳에서 온 노래> "그때 나는 스물일곱 살이었다." <한지와 영주> 별 다른 문장들은 아니다. 어떤 커다란 감정의 진폭을 담고 있지도 않고, 결정적인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도 않다. 그저 과거의 일임을 알리는, 이제는 더 이상 그것이 아님을, 혹은 그러하지 않음을 알리는 문장들일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이 문장들을 읽을 때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문장 그 자체가 담고 있는 것들에 대해 말해보자. "그런데 이제는 내가 생각했던 할아버지는 그저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했던 할아버지, 그저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을 그 할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이 문장은 그 할아버지가 적어도 지금은 여기에 존재하지 않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가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면, 이 문장을 뒤늦게 술회하는 '나'가 그것이 그렇게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으리라 '생각'만 할 필요는 없을테니. 아니면 다른 문장. "여기가 미진 방이었어요."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이, 이 문장은 그저 이 방이 현재는 미진의 방이 아님을, 미진이라 불리는 누군가는 적어도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음을 상기시킨다. 그 혹은 그녀는 어디로 갔는가. 

 

최은영의 소설들에서 소설의 구조로만 봤을 때 흥미로웠던 점은, 이 소설들이 어떤 회고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소설집의 제목이기도 한 <쇼코의 미소>의 세 번째 문장. "쇼코는 해변에 서 있으면 이 세상의 변두리에 선 느낌이 든다고 말했었다." 말했다,가 아니라 말했었다... (문법적으로만 따지면 그렇게 좋은 문장은 아닐지 모르지만) 이 문장은 쇼코가 그렇게 말한 시점이 단순한 (소설적인) 과거가 아닌 그 이전 시점의 과거임을, 그렇게 회상하는 '나'는 현재 다른 시점에 와 있으며, 그렇게 쇼코가 말했던 과거와는 어느 정도 단절된 시점에 서 있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즉 <쇼코의 미소>는 그 모든 사건을 지나온 '나'(소유)가 전체적으로 과거의 이야기들을 회고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위의 쇼코가 해변에 선 느낌을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쇼코와 소유가 처음 만난 어느 시점일 것이며, 그렇게 쇼코가 말했던 것을 회고하는 나는, 쇼코가 없는, 혹은 쇼코와 감정적으로 단절된 채로 지금 어느 순간에 그렇게 회고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과거를 회고하는 것은 <쇼코의 미소> 뿐만이 아니다. <씬짜오, 씬짜오>의 기본적인 구조도 독일에서의 호 아저씨네와의 일들을 회고하고 기록하는 형식이며,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도 어떻게 보면 이상한 액자가 소설의 앞 뒤에 덧붙여져 있으며, <한지와 영주>도 노트를 전하려고 애쓰는 현재의 '나'가 소설의 앞 뒤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 액자들이 왜 필요한 것일까.

 

다시 말해서 액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일반적으로 이야기에 불필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모든 이야기란, 모든 소설이란, 근본적으로 과거의 이야기일 것이며, 그것을 여기 우리 독자들에게 전달해주는 가상의 누군가(전지적 시점의 누군가라도)는 우리가 굳이 그 존재를 생각하지 않아도 이미 존재하고 있을 것이므로. 즉 회고적인 의미에서의 액자, 그러니까 자, 이제 내가 과거의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려줄께, 라는 식의 액자는 일반적인 소설에서는 어떤 특수한 기능을 담당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흔히 이야기되는 후일담 문학에서, 사적 체험의 강조를 위해, 혹은 과거의 패배와 연관이 있어 보이는 현재의 상처들을 보여주기 위해 등장했던 액자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최은영 소설에서의 회고적인 액자는 조금 달라 보인다. 그것은 두 가지와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먼저 하나는 이제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누군가가 겪었던 일들의 의미 혹은 과거의 누군가라는 존재 그 자체의 의미를 현재의 '나'에게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이미 없는 사람들, 그들이 겪었던 일들, 그들이 받은 상처들. 그들이 겪었던 사적인, 그러나 단지 사적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우리 현대사를 가로지르는 모든 일들은, 현재 이 이야기를 덤덤하게 술회하는, 혹은 덤덤하게 술회하려고 노력하는 '나'와 그 '나'의 자리에 서서 이 소설을 읽는 우리들에게 어떤 모종의 회한을 남긴다. "그저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을 할아버지의 어떤 것. 왜 그것을 '나'는 그가 존재하고 있었을 그 때는 알지 못했을까. 왜 모든 회한은 누군가가 사라지고 난 이후에만 남는 것일까.

 

그러나 최은영의 소설들에는 그것만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최은영의 소설들에는 그 과거를 어떻게든 회고하는 '나'라는 존재가 소설을 통해 가로놓여져 있다. 최은영의 소설들에는 어떤 비슷한 형태의 화자들이 있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에서 "엄마의 그런 반응이 놀랍고 한편으로 무서워서 그 일에 대해서 더 듣고 싶지 않았"던, '엄마'의 이야기를 우리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이 소설의 화자 '나'. 혹은 "오랜 시간 동안 엄마를 용서하지 않았었다."라고 술회하는 <쇼코의 미소>의 '나'. 아니면, "이런 세상과 맞서 싸우고 싶지 않았"던 <미카엘라>의 '그녀'. 그러나 회고를 하는 이 시점에서의 그(녀)들은 과거의 그(녀)들하고는 조금은 달라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런데 이제는 내가 생각했던 할아버지는 그저 그의 일부분일 뿐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라는 문장을 지금 이 시점에 쓸 수는 없을테니까.

 

다시 말해서 최은영의 소설들이 과거의 후일담 문학과 갈라지는 지점이 여기에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즉 과거의 일명 '후일담 문학'들의 현재에는 모종의 패배 의식과 쓸쓸함이 감돌았다면, 최은영 소설들의 현재에는 그 과거를 품에 껴안고 나아가려는 묘한 의지가 감돈다. 예를 들어 <쇼코의 미소>에서의 마지막. "그때 쇼코는 그 예의바른 웃음으로 나를 쳐다봤다. 마음이, 어린 시절 쇼코의 미소를 보았을 때처럼 서늘해졌다." 아니면 <먼 곳에서 온 노래>의 마지막. "그건 율랴와 나의 첫번째 여행이 될 터였다." 쇼코의 그 예의바른 웃음을 보는 나, 혹은 율랴와의 첫번째 여행을 떠나는 나는 과거의 '나'가 아니다. 그 모든 일들을 겪어내고 그것을 덤덤하게 술회하려고 애쓰는 현재의 아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나'다. 최은영의 소설들은 거의 매 순간 그렇게 과거를 돌아보고, 그것을 딛고 현재로 혹은 가까운 미래로 나아가려는 현재의 '나'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그것은 <씬짜오, 씬짜오>에서 응웬 아줌마에게 연락을 해 몇 번이나 다른 말을 모두 잊은 사람들처럼 씬짜오, 씬짜오를 반복하는 모습일 수 있고, 지민에게 닿지 않을 편지를 어떻게든 써서 보내는 말자의 모습일 수 있다. 

 

과거를 회고하는 사람에게는 그 과거와 단절하고자 하는 의지가 숨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과거를 이야기라는 형태로 만들어서 나와 분리시켜 두고 싶은 것. 그러나 내 속의 분리하고 싶은 의지를 만들어낸 무엇인가도, 결국 그 '과거'가 낳은 무엇일지 모른다. 그것은 이 책의 표지를 닮았다. 단절하고 싶은 과거에 그 누군가는 고개를 돌린 채지만, 여전히 그 귀만큼은 우리를 향해 열려져 있다. 우리는 결국 그렇게 아주 조금씩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생겨먹은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   

 

아침 8시, 지하철 1호선에서 2호선으로 연결되는 신도림 역에서 곧 들어올 잠실방향 열차를 기다리며, 혹은 사람들 사이에서 애써 자리를 잡고, 작고 조심스럽게 책장을 열어 이 책의 몇 개의 문장들을 보았다. 아니 대부분의 날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꾸벅꾸벅 졸거나, 스마트폰을 열어 지난밤 사이 올라온 기사를 보거나, 이어폰을 꺼내 음악을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출입문 닫겠습니다'라는 저 기계음이 다섯번 연속으로 울리다 못해, 급기야는 '출입문 닫을테니, 그만좀 타라구요!!'라는 바뀐 기계음으로 바뀐 채 들릴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가끔 생각한다. 나는 오늘도 아주 조금씩 나빠지고 있다, 혹은 나빠지러 가고 있다,고.

 

어떤 책을 읽으면 무엇인가가 급격히 바뀐다거나, 어떤 영화를 보면 인생의 무엇인가가 달라진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다만 어떤 책이나 영화들은 아주 조금, 그러니까, 0.00000001% 정도는 나아지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출근 시간에 책을 읽는 것은 꽤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닐까. 그것이 물리적인 피곤함을 가중시켜서가 아니라, 사실 생각의 좁은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 할수록 점점 출근 이후 생각해야 할 것들을 밀어내게 되고, 급기야는 출근 자체를 밀어낼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가끔 어쩔 수 없이 책들을 읽어야만 하는 때가 있다.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아주 조금씩 나를 끌어당겨 지탱시키기 위해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는 결국 그렇게 아주 조금씩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생겨먹은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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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3 0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31 15: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3 0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06 0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영화 <택시운전사>에 대한 스포 있음)

 

  

   

연휴 기간 2편의 영화를 다시 보았다. <택시운전사>와 <변호인>. 두 영화 모두 극장에서 개봉할 때 보았지만, 한 편은 가족들이 보고 싶다고 해서 같이 다시 보았고, 한 편은 TV에서 하길래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극장에서 볼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다시 보고 나니 2편의 영화가 상당히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것은 한편으로 송강호라는 출중한 배우가 두 영화 모두 극의 중심에서 거의 절대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그려내는 두 명의 (이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약간의 허구가 가미된 실존 인물들, 그 인물들은 송강호라는 육신을 입고, 거의 다시 스크린에서 걸어나와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가 두 영화가 '상당히 닮았다'라고 생각한 것은 단지 송강호라는 배우의 절대적인 존재감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내가 가장 크게 비슷하다고 느낀 것은 영화가 끝난 후 남아있는 어떤 묘한 '석연치 않음'과 같은 것이었다.

 

두 영화가 그리고 있는 스크린 안의 두 인물, 그러니까 <택시운전사>의 김사복과 <변호인>의 송우석이라는 인물을 구축하는 방식은 비슷하다. 두 영화는 초반부, 코믹한 터치로 두 인물의 소박한 속물성, 혹은 속물성 속에 드러나는 인간미 같은 것들을 그려낸다. 그것은 가벼운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다. 그 안에는 그들을 영화의 마지막까지 움직이게 하는 동력 같은 것들이 들어있으니까. <택시운전사>의 김사복에게 그것이 가족, 특히 딸을 생각하는 마음이라면, <변호인>의 송우석에게 그것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 끝까지 무엇인가를 완수하겠다는 의지다. 중반부의 큰 사건, 즉 <택시운전사>에서는 광주에서의 일들, <변호인>에서는 '부림 사건'이 그 인물들을 크게 변화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들을 마지막까지 지탱하는 것은 이미 그들이 가지고 있던 마음이나 의지와 같은 것들이다. <택시운전사>의 김사복은 광주로 돌아가기 위해,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딸과 전화통화를 하며, <변호인>의 송우석은 계속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스스로에게 불어 넣는다. 

 

이 변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변하지 않고 있는 것. 어쩌면 그것은 그들이 그 사건들에서 살짝 비껴 서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두 영화의 애초의 접근 방식은 조금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택시운전사>가 광주를 말하기 위해 김사복이라는 인물을 빌려왔다면, <변호인>은 송우석(노무현)을 말하기 위해 '부림 사건'이라는 사건을 빌려왔다. 그러나 그럼에도 두 사건에서 두 인물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건에 비껴 서 있는 것은 사실이다. 김사복은 택시 운전사, 그것도 광주 택시 운전사가 아닌 서울 택시 운전사이고, 송우석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정에 선 단골국밥집 아들을 변호하는 변호사이다. 즉 어쩌면 그들은 당사자가 아니라 한 걸음 비껴서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무엇인가, 그러니까 마음이나 의지 같은 것을 지켜낼 수 있었다. 고약한 질문이지만, 이렇게 묻는다면 그들이 지켜낼 수 있었던 무엇인가, 그리고 누군가가 지켜낼 수 없었던 무엇인가는 선명해진다. <택시운전사>에서 김사복과 독일 기자를 끝까지 도와주는 광주 택시 운전사 태술(유해진)이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김사복이 딸을 생각하는 마음보다 적었을까, 아니면 <변호인>에서 송우석이 고문받는 국밥집 아들 진우(임시완)의 위치에 서 있었다면 그의 의지는 산산이 부서졌을까, 아닐까. 

 

영화는 물론 고약한 질문을 할 틈 같은 것은 주지 않는다. 그저 그들에게 조용히 다른 역할을 부여한다. 바로 영화의 제목이 부여하고 있는 그 역할로서의 자세. 그렇다. 여기 두 영화의 공통점이 또 하나 있다. <택시운전사>와 <변호인>. 택시기사나 변호사가 아닌, 택시운전사와 변호인. 단순히 직업명 그 이상의 무엇을 이 제목은 함의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것은 각각의 영화가 키포인트로 내세우는 장면, 혹은 대사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김사복이 광주로 돌아가면서 딸에게 하는 대사, 손님을 두고왔다,고 말하는 장면이라든가, 송우석이 국가는 국민이라고 재판정에서 일갈하는 장면. 즉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가장 카타르시스를 주는 이 장면들은 이들에게 표면적으로는 직업인의 윤리에 가까운 것이다. 김사복은 광주에서 서울로 손님을 데려다주어야 하는 택시운전사로서의 의무가 있기 때문에 다시 광주로 돌아가야만 하며, 송우석은 변호인으로서 끝까지 최선을 다해 의뢰인이 무죄라는 것을 입증하여야 하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국가가 국민이 아닌, 단지 쿠데타권력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일갈한다.

 

물론 이렇게만 말하는 것은 송우석에게도 그러하지만, 특히 김사복에게는 더 가혹한 것 같다. 김사복이 광주로 돌아간 것은 단지 택시운전사의 직업윤리 때문만은 아니었을 테니까. 그런데 직업윤리 이외의 어떤 것, 이라고만 하기에는 무엇인가 석연치않다. 그렇다면 물어볼 필요는 있겠다. 김사복은 왜 광주로 돌아갔을까. (사실 마찬가지로 <변호인>의 송우석에게도 물어볼 필요는 있다. 그는 왜 진우를 변호하기로 결심했을까. 사무장의 말대로 앞에 놓인 편한 삶을 스스로 걷어차면서 말이다.) 독일기자를 내버려두고 혼자 도망쳐 나왔다는 죄책감? 사람들, 특히 대학생 재식(류준열)을 버려두고 나왔다는 부채감?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재식의 죽음을 확인하는 것은 돌아간 직후이다.) 어떻게든 바깥에 제대로된 소식을 알려야한다는 사명감? 아니면 흔히 말하는 인간에 대한 예의? 아니면 이 모든 것의 총체? 이 중 어떤 것이 답이 될 수도 있고, 이 모든 것이 답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이것이 영화 속에서 묘하게 눙쳐지고 있다는 사실 아닐까.

 

김사복이 운다.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운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제3한강교'를 따라부르다가 울면서 핸들을 꺾는다. 혹은 송우석이 부르르 떨면서 국가권력의 하수인에게 소리친다. 국가는 국민입니다! 이 영화가 사람들에게 기억된다면 각각 기억에 남을 한 장면, 혹은 송강호의 두 개의 명연기. 아니 나는 냉소적으로 이 말을 하지 않았다. 송강호가 복잡한 얼굴로 울 때, 나도 곧 울음이 나올 것 같은 복잡한 얼굴이 되었고, 송강호가 그렇게 법정에서 소리칠 때 나도 같이 소리를 지르는 쾌감을 느꼈다. 그러나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사실 모든 영화는 고도의 속임수라는 것. 송강호 정도 되는 마법사가 나를 속인다면 나는 속아넘어갈 수밖에 없지만, 어떤 석연치않음이 여기에 남아있다. 왜냐하면 이 장면들은 이 영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장면이지만, 중요한 무엇인가를 말하지 않은 채 조용히 눙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니까. 예를 들어 김사복이 기어코 핸들을 꺾는 순간,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그가 왜 핸들을 꺾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복잡한 답이 아니라, 그가 그 순간 핸들을 꺾어 돌아갔다는 (허구적) 사실, 송강호가 그 순간 보여준 명연기이다. 

 

그 명연기를 보는 것도 중요할 수 있지만, 그 질문에 대한 복잡한, 사실은 나오지 않는 답을 생각해보는 것은 보다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사건에 대해, 혹은 이 사건과 비슷한 사건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쩌면 오로지 할 수 있는 것은 답이 없는 복잡한 질문을 생각해보는 것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말할 수 있는 다른 케이스. (뭐 여러가지 의견이 다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영화 <택시운전사>와 같은 사건을 다룬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는 광주를 말하고 있지만, 광주 그 이상을 궁극적으로는 말하고자 하며, 그것은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겹겹이 쌓인 물음들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그렇게 잔인해질 수 있는가, 혹은 그 상황에서 어떻게 그렇게 숭고해질 수 있는가, 혹은 이렇게 숭고해질수도, 잔인해질수도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도대체 무엇인가, 숭고한 인간과 잔인한 인간은 분리되는 것일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이 우리 안에 들어있는가,라는 등의 질문들. 그것은 분명히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들이지만,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해보고 답을 찾아보려는 그 자세는 중요하다. 그것은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그것을 생각해보는 그 인간을 어쩌면 조금이라도 나은 인간으로 만들어줄 수도 있으니까. (물론 이것은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영화 <택시운전사>는, 혹은 영화 <변호인>은 질문에 대해 생각해볼 틈을 주지 않는다. 겨우 질문을 했다하더라도, 답을 찾을 시간을 주지 않은 채, 영화는 조용히 작은 승리로 나아간다. 그 작은 승리, 혹은 불완전한 승리는 묘하게도 직업인의 윤리와 맞닿아 있다. 택시운전사는 결국 손님을 태우고 나와 정해진 목적지에 데려다주고, 변호인은 완전한 무죄는 아니지만, 불완전한 승리를 이끌어낸다. 그리고 그것으로 모자라, 그들에게 개인적인 에필로그까지 기꺼이 부여해준다. 그것은 (그가 아주 조금이라도 공헌했다고 할 수 있는) 발전된 서울 한복판에서 마음 따뜻한 택시운전사로 살고 있는 모습이거나, 동료들에게 변호사 취급도 못받던 송우석이 변호사 99명의 변호를 받는 모습이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작은 승리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작은 승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 적어도 그에게는 작은 승리가 될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작은 승리'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을 보는 스크린 밖의 관객들과 인물들을 분리하지 않은 채, 인간 존재 일반에 대한 어떤 물음들을 할 틈은 영화는 끝내 부여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것은 급격하게 주인공 개인적인 차원으로 재빨리 자리매김되며, 관객의 빈 마음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올 뿐이다.

 

그것이 최근의 영화들, 특히 역사를 다룬 영화들이 취하는 전략은 아닐까. 사건보다는 인물을 내세우는 것. 그 인물을 관객들로 하여금 재빨리 동일시하게 만든 다음, 그들에게 '불완전한 승리', 혹은 '작은 승리'를 부여하는 것. (물론 관객은 승리를 더 좋아하므로, 영화의 결말은 매우 불완전할지언정 어떻게든 승리의 구조가 된다. 어떤 것을 승리의 지점으로 두는가의 차이만 있을뿐.) 그리고 우리는 인물의 편에 서서 그 '불완전한 승리'에 안도하면서 오로지 그 불완전한 승리밖에 거두지 못한, 혹은 설령 패배했을지라도 스크린 속에서 장렬하게 부활한 그들을 기억하겠노라고, 기억해서 언젠가는 '완전한 승리'를 얻겠노라고 다짐한다. 그러나 몇가지는 장담해도 좋다. 영화가 당신에게 주인공의 '불완전한 승리'를 제공해줄 때 영화는 당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특히 송강호 같은 배우가 스크린을 정면으로 쳐다보면서 노래를 부르다가 울음을 터뜨린다면 말이다.) 그 '불완전한 승리'를 제공해주려고 엄청나게 애쓰고 있다는 것. 그리고 적어도 현실에서는 애쓰는 누군가, 스크린 안에 숨겨진 누군가는 없다는 것. 그 때 당신을 구원해줄 수 있는 것은 (질문에 대해 답을 찾으려고) '애쓰던 자신'밖에는 없다는 것.  

 

    

 

덧.  

영화관에서 나는 이 두 편의 영화를 분명히 좋게 보았다. 그것을 감흥이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그런데 두 번째 볼 때에는 그런 감흥이 급격히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이 급격한 감흥과 급격한 무감함은 무엇으로 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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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7-10-09 0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고 이렇게 글을 보니 반갑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시다니... 제가 생각한 건 좀 다른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좋게 흐르고 좋아 보여도 꼭 그것만 있는 건 아닌 것 같을 때도 있더군요 그게 어떤 거였는지 잊어버리고 그런 느낌만 남아있습니다 그건 잘되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닌데 하는 생각일지도 모르고, 이긴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일까 하는 생각일지도 모르죠 이런 생각은 책을 볼 때도 하는군요

책은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도 괜찮지만 영화는 그러기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니 생각할 틈을 주는 영화도 있을지 모르겠네요 영화도 흘러가는 대로 보여주는 것만 보기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 좋겠지요


희선

맥거핀 2017-10-10 23:32   좋아요 3 | URL
네. 저도 희선님 댓글을 보니 좋네요.
영화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고, 사실 영화를 볼 때는 거의 아무 생각없이, 연기에 감탄하거나, 저게 말이 되나..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봐요. 특히 요즘에는요. 사실 위의 영화들도 본문에 썼듯이 ‘두 번째‘ 보지 않았다면 이런 글을 남길 생각을 안했을 겁니다.

그런데 영화도 그렇고, 책도 그렇고 뭐랄까요. 뭔가 찌리릿 전기가 오는 때가 있어요. 살짝 소름이 돋는달까. 아니면 반대로 위에 영화처럼 뭔가 꺼림칙한 무엇인가가 남을 때도 있구요. 그럴 때 그게 뭐일까, 뭐에서 오는 것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영화를 다 본 후 천천히요. 가끔 영화를 보고 나서 이것저것 생각해 보면 좋지 않을까요. 아무리 말도 안되는 생각 같은 거라도..그게 결국에는 아무 생각도 안하게 하는 영화보다는 좋은 것 같습니다.

요새 글도 댓글도 뜸하지요? 희선님 이렇게 바로 찾아와서 읽어주시는데..죄송하네요. 좋은 날들 보내세요. 아직 가을이 그래도 조금은 남은 것 같으니..

2017-10-09 07: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10 2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0-10 2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오랜만에 맥거핀님의 글을 보게 되는군요.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요즘 알라딘 서재에 맥거핀님처럼 정성 있게 영화 리뷰를 쓰는 분들을 만나기 어려워졌어요.

맥거핀 2017-10-10 23:38   좋아요 0 | URL
정성 있는 영화글 cyrus님이 쓰시면 되죠.^^ 뭐 하긴 이렇게 얘기 안해도 정성있게 이런저런 글 쓰실 분이라는 걸 알지만요.

잘 지내셨나요? 오랜만에 알라딘 들러서 반가운 아이디들 보니까 좋네요. cyrus님도 특히 그렇구요. 좋은 날들 보내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2017-10-17 0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다니엘 블레이크, 켄 로치, 2017  

    

 

(영화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는 걷는다. 어깨는 약간 움츠러들었고, 나이가 들어 예전보다는 보폭이 줄고 약간은 조심스러워졌다고 할 수는 있지만, 목표지점을 향해서 정확히 나아가는, 어느 곳에 가서 무엇을 해야하는지 아는 사람의 걸음걸이다. 은퇴를 선언했던 켄 로치가 다시 돌아와 만든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영화가 끝난 후 이상하게도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데이브 존스)의 걸음이다. 어쩌면 단순하게 말해서 그것은 영화 속에서 그가 많이 걷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벗겨진 머리에 비니를 쓰고, 늘 입는 점퍼를 입고 그는 직장을 구하러 돌아다니고(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력서를 돌리기 위해 돌아다니고), 실업 급여를 받기 위해 관공서를 찾아간다. 그는 그렇게 움직여야하는 종류의 사람이다. 목수로 살아온 오랜세월, 움직여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이 그렇게 그의 몸에 배어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생사여탈권을 쥐고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관공서의 사람들이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다른 종류의 것들이다. 전화로 이루어지는 수급 자격심사, 인터넷으로 제출해야 하는 서류, 꼼짝없이 앉아서 들어야하는 의미없는 이력서 작성 강의.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도 할 수 있는, 다니엘이 관공서 건물 벽면에 스프레이로 항의문구를 쓰는 장면은 그래서 묘한 감동을 준다. 그것은 앉아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이루어지는 일종의 퍼포먼스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시작은 흥미롭다. 영화는 암전 속에서 이루어지는 한 전화 통화로 시작하는데, 이 통화는 꽤 길게 이어진다. 영화의 시작부에서 이루어지는 이 암전 속의 통화는 꼼짝없이 어둠속에서 그 내용에 귀기울여야하는 관객에게 그 통화의 내용을 주목하게 하면서, 동시에 어떤 답답하다는 느낌을 시각적으로도 제공하는데, 이는 그 통화의 당사자인 다니엘이 느꼈던 심정이 관객에게 전이되는 효과를 낳는다. 다니엘과 관공서 직원의 통화, 그러니까 심장병을 앓아서 일을 쉬고 있는 다니엘이 실업급여를 받을 대상이 되는지, 혹은 일을 나갈 수 있는 상태가 되는지를 평가하는 이 통화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이 모든 것이 상당히 부조리하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것이 고압적이고 권위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여러가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이루어져야 하는 이 심사가 단순히 행정편의를 우선하여 전화로 이루어진다는 점은 물론이거니와 그 질문들 역시도 매우 부조리하다. (심장병을 앓았던 다니엘에게 팔을 들어올릴 수 있느냐고 묻는 식이다.) 그리고 그 부조리한 방식에 다니엘이 항의하자, 직원은 그런 식으로 항의하면 수급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며 부조리한 질문들을 반복할 뿐이다. 일을 한동안 하지 말라는 의사의 소견서를 받은 다니엘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것 뿐인데도 말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희극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이 부조리한 코믹극은 영화의 내내 이어진다. (그러니까, 역설적인 의미에서 말이다. 사람은 너무 기가 차면 웃음이 나오는 법이니까. 그리고 한가지 덧붙이자면 물론 가장 희극적인 것은 가장 비극적인 것과도 맞닿아 있다.)

 

(예를 들어 그것은 산업의학전문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현장보건관리가 소재인 이강현의 다큐 <보라>에서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예전의 리뷰에서 나는 이 장면에 대해 이렇게 썼다. "영화 내용의 소개에서 미루어 보듯이, 이 영화에는 의사와 노동자들의 연이은 상담들이 빈번하게 출몰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 대화들은 일종의 부조리한 코믹극처럼 보인다. 의사들이 거의 형식적으로 하기 때문에, 혹은 노동자들이 이것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혹은 노동자들이 멍청하기 때문에? 그렇지는 않다. 영화에 나온 의사들은 나름 성의를 가지고 노동자들을 상담하는 것처럼 보이고, 노동자들은 최대한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려 애쓴다.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 거의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노동자들도 알고 있고, 의사들도 알고 있다. 노동자들의 근골격계 질환, 혹은 특정 약품이나 공정에 의한 여러 증상 들은 그 노동을 그만두어야만 호전된다. 그러나 그 노동을 그만두면 누가 이들의 생존을 담보하는가. 거기에 있는 의사들이 이들을 먹여살려 줄건가. 그러므로 노동자도 웃고, 의사들도 그저 웃을 수밖에. 그만두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없으시죠? 하하, 허허." 이 장면에서 이 의사들이 권위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것이 단지 바보같은 형식에 불과할 뿐이며, 지극히 부조리하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영화는 이런 다니엘의 움직임을 그대로 묵묵히 따라가는데 여기에서 보여지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앞에서 말한 희극적인(그래서 비극적인) 부조리가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연대들이다. 그러나 연대라고 해서 어떤 거창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다. 켄 로치가 예전부터 이야기했듯이 그것은 아주 작은 것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누군가가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옆에서 한 마디 거들어주거나, 낡고 부서진 물건들을 고쳐주거나, 택배를 대신 받아주고, 인터넷으로 대신 간단한 서류를 작성해주는 것. 이러한 작은 연대를 보여주는 이 영화에서 켄 로치가 영화적인 트릭을 쓰는 것은 단 한 가지 뿐이다. 그것은 보편적으로 이루어지는 연대이어야 한다는 점. 영화 속 다니엘과 관계를 맺는 이들은 나이나 인종 면에서 의도적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그와 가장 큰 도움을 주고 받는 케이티(헤일리 스콰이어)는 북아프리카 쪽에서 온 이민자 출신 정도로 설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며(예를 들어 영화의 후반부 케이티의 딸이 이민자들의 음식인 쿠스쿠스를 들고 와서 다니엘에게 같이 먹자,고 하는 장면도 있다. 그 대사는 식사를 같이 하자,는 식으로만 자막번역이 되었는데, 맥락은 이해되지만 조금 아쉬운 번역이다.), 그와 관계를 주고 받는 옆집 흑인 청년도 마찬가지이다. 그밖에 작은 도움을 주는 관공서의 친절한 나이든 직원이나 도서관에서 그를 도와주는 흑인 청년, 혹은 다니엘이 관공서 바깥에서 스프레이로 글을 쓰는 퍼포먼스를 벌일 때 그를 찬양하는 노숙자도 마찬가지이다. (켄 로치의 이 보편적인 연대에는 적과 아군을 가르는 선 같은 것은 없다. 예를 들어 관공서의 말단 직원들도 여기에서 배제된다고 할 수 없는데, 그것을 보여주는 관공서의 친절한 나이든 여직원 같은 캐릭터도 영화 속에는 존재한다. 그리고 이런 캐릭터는 켄 로치의 영화에서 그렇게 낯설지 않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이것은 연대와 복지의 어떤 연관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복지도 결국 보편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게는 '선별적 복지'라는 말은 누군가가 말하는 '진보적 보수주의자'만큼이나 우스꽝스럽게 들린다. 영화 속에서도 케이티의 딸이 식료품 지원을 받는다고 놀림을 받았다며 케이티에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이 두 가지, 그러니까 관공서의 고압적인 부조리와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주위 사람들과의 작은 연대는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다니엘(로 상징되는 한 인간)은 이 일련의 부조리함을 통해 자존감을 조금씩 침범당하고 잃기도 하지만, 대신 작은 연대들을 통해 그 침해된 자존감을 조금씩 보충해(회복해)나가며 결국 하나의 인간으로 한명의 시민으로 남는다. 그것은 다니엘의 마지막 선언으로 극명하게 보여지는데, 그 선언은 아마도 켄 로치 자신의 선언이기도 할 것이다. 개도, 보험번호 숫자도, 하나의 화면 속 점도 아닌, 정당한 권리를 지닌 한명의 인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선언. 다시 말해서 이 선언은 영화의 제목에 있는, 다니엘이 스프레이로 관공서 벽면에 썼던 문구의 서두에 있는 그 말 'I, Daniel Blake'와도 맞닿아 있다.

 

켄 로치가 영화 속에서 말해오던 것은 늘 그런 것이었다. 켄 로치의 영화는 심플하다. 켄 로치의 영화는 다니엘의 걸음걸이를 닮았다. 가야할 곳을 알고, 그곳에 에둘러 돌아가지 않고 묵묵히 나아가는 심플한 걸음걸이. 이 영화에서도 켄 로치는 그저 현실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장면들을 차곡차곡 쌓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예를 들어 도서관에서 컴퓨터 좌석이 다 찼다는 말을 다니엘이 듣는 씬이 있다. 보통의 영화에서라면 장면 전환하여 잠시 후 다니엘이 컴퓨터를 사용하는 장면만 보여줘도 될 듯 하지만, 켄 로치는 굳이 이 사이에 다니엘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 거리 상점가를 배회하는 장면을 끼워넣는다.) 그러나 차곡차곡 쌓인 것들이 늘 그러듯이, 이 영화에서 그 쌓인 장면들은 마지막에 힘을 발휘한다. 그의 그 선언이 단지 말뿐인 공허한 선언이 아님을, 그가 차곡차곡 쌓은 영화 속의 여러 장면들이 증명하기 때문이다.

     

켄 로치는 예전부터 그랬듯 여전히 어떤 의미에서는 낙관주의자인 것 같다. 물론 누군가는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에 어떤 낙관적인 현실이 있는가? 영화 속 결말에 어떤 낙관이 있는가? 하지만, 낙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변화할 수 있다는 믿음,이 아닐까. 나는 그 마지막에서 어떤 낙관을 읽어내고 싶다. 다니엘의 글을 케이티가 읽고, 그곳에 참여한 여러 사람들의 면면을 차례대로 비추는 그 마지막. 다니엘과 작고 사소한 관계들을 주고 받았던 여러 사람들, 다니엘이 변화시킨 작은 세계. 켄 로치가 그리던 세계는 거대한 투쟁만이 있는 세계가 아니라 조금 더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그렇게 작고 사소한 관계들, 갈등들이 존재하던 세계였다. 그리고 그것을 관통하고 있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변화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의 영화는 후기에 들어올수록 점점 도리어 낙관적이 되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대체로 영웅을 요구하거나 어렵고 힘든 투쟁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이 한 명의 권리를 가진 시민이라는 점을 자각하고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말처럼 쉽지는 않다. 그것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같은 어떤 결기를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니까. 어쩌면 이것을 영화 속 포스터에 있는 것과 연결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범위내에서의 점핑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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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1-20 02: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크, 맥거핀님의 시선을 통해 보는 영화의 맛은 프랜차이즈 베이커리가 아닌 자체 제작 소규모 빵집 같은^^

켄 로치가 영화로 보여주는 연대의 뚝심은 자기 위치에서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그게 참 존경스러워요.

맥거핀 2017-01-20 14:49   좋아요 2 | URL
그렇습니까?^^ 쓸데없는 얘긴데, 제가 사는 곳 근처에 김XX 베이커리라고 새로 생겼거든요. 그래서 와..이렇게 이름을 걸고 하시는 거면 엄청 맛있겠네..싶어서 신나서 샀는데, 생각보다 너무 맛이 없어서 놀랐어요..왜 굳이 이름을 걸고..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_-

켄 로치가 이왕 은퇴번복한 김에 몇 개 더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칸 황금종려상도 받으셨으니 아마도 한두 개는 더 만드실 것 같은..

AgalmA 2017-01-21 03:47   좋아요 2 | URL
저도 그런 빵집 있어요ㅎ 빵을 워낙 좋아해 지방에 유명한 빵집 있음 찾아가 먹거든요. 그런데 아니 이게 왜....하는 빵집들 종종 있었어요ㅋ;;

은퇴했다 다시 돌아오는 예술가들 워낙 많아 요즘 은퇴 잘 믿지도 않지만ㅎ; 켄 로치 감독은 많이 만들수록 좋을 듯^^

맥거핀 2017-01-23 18:42   좋아요 2 | URL
저도 유명한 빵집이나 맛집 같은데 어쩌다가 가게 되는 일이 있는데요. 그렇게 맛있다고 느껴본 적이 많이 없네요. 사실 줄서고 이러는 걸 별로 안하고 싶어서 맛집 같은 곳에 가도 조금 기다리라고 하면 그냥 나와요.^^;

희선 2017-01-20 03: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영화 앞부분을 보면 어쩐지 화가 날 것 같기도 합니다 다니엘과 같은 마음이 될 것 같아서... 오래전에 주민증 처음 만들 때 일이 떠오르네요 집에 아무도 없어서 전화를 못 받았는데, 그런 사정 같은 건 듣지도 않고 벌금을 내라고 해서 울었던... 지금 생각하니 그때 왜 울었는지 모르겠네요 벌금이 그렇게 많았던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냥 억울해서 그랬던 건지도... 지금도 잊어버리지 않았다니... 지금도 잘살지 못하지만, 그때는 어려서 집이 가난하다 생각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마다 사정은 있겠습니다 그런 걸 다 들어줄 수 없다고 말할 것 같네요 규칙이다 규정이다 하면서...

다니엘도 그런 것에 부딪쳤을 듯 싶네요 가까이 있는 사람과 마음을 나눠서 다친 마음이 좀 나아졌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살아가지 않나 싶습니다 요즘은 이웃과 좀 멀어지기는 했지만, 이웃과 함께 마음을 나누고 사는 사람도 많을 거예요 그 이웃이 같은 나라 사람이 아닐 때도 있고 피부색이 다를 수도 있는 거죠

큰 것도 작은 것에서 시작하잖아요 작은 힘이 결국 큰 힘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게 바로 보이지 않겠지만, 조금씩 하다보면 나아진다고 여기면 좋을 것 같기도 한데... 지금 안 된다면 나중에라도... 얼마전에 이런 말을 들어서 말했습니다


희선

맥거핀 2017-01-20 15:02   좋아요 3 | URL
그렇군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영화에도 나오지만 행정이란 게 받는 사람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행정을 행하는 사람 중심이지요. 그러면서도 뻔뻔스럽게 행정‘서비스‘라고 하는데 말입니다. 사실 주민증 같은 거는 그 자체가 논란의 소지가 많은 것이죠. 나라에서 일괄적으로 주민등록을 강제한다, 그리고 위에서 말씀하신대로 벌금을 매긴다,는 거 자체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지문날인도 받고 말이죠.

그렇죠.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하죠. 그렇게 마음을 나누고 서로 돕고 사는 거죠. 연대라고 하면 거창해 보이고, 연대 나온 사람만 해야 할 것 같고 그러지만(-_-), 그게 별 게 아니라는 것을 영화가 다시 보여주는 것 같아요. 저는 딱딱한 인간이라 이웃들과 마주쳐도 가끔 눈인사만 합니다만..뭐 그래도 필요한 일이 있으면 도와야죠.

결국 힘이 없는 사람들의 생존 방식이란 그런 게 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입으로만 국민통합을 외치는 통치자들이 가장 쉽게 써먹는 전략이 분열시키고 고립시키는 거니까요. 위에서 말한 ‘선별적 복지‘ 같은 것도 그런 것의 일환일 것이구요.

희선 2017-01-21 02:18   좋아요 2 | URL
일본은 주민증이 따로 없어서 의료보험증이나 다른 걸로 한다고 하더군요 주민번호 어쩐다는 말도 들은 것 같기도 한데... 지문 찍은 거 생각났어요 그런 거 하는 거 한국밖에 없을까요 범죄를 예방한다는 말로 처음에는 찍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지문이나 DNA 같은 걸 경찰한테 주기도 하잖아요(이건 보통 일이 아닐 때군요 그런 책을 봐서) 한국 사람은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모두 지문을 찍는다니...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그거 기분 별로 안 좋았습니다

살면서 잊어버려서 그렇지 여러 가지 안 좋은 일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곳하고는 별로 상관하고 싶지 않기도 하달까 ‘연대 나온 사람만 연대하는 건가’ 하는 말 재미있네요 이런 말 재미있어 하다니... 저도 이웃하고 친하게 못 지내요 모르는 사람이어도 도움이 필요할 때 조금이라도 도우면 괜찮겠죠 그런 것이라도 해야겠습니다


희선

맥거핀 2017-01-23 18:49   좋아요 1 | URL
저도 외국의 경우에는 주민등록시스템이 있는 곳이 별로 없는 것으로 알아요. 사회보장번호 같은 것은 있지만, 그것은 복지안전 차원이고, 우리나라처럼 일종의 관리 형태를 가지진 않죠. 어떻게보면 후진적인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긴 뭐..주민세 같은 것을 아직도 걷는 것을 보면 말이죠. 주민세라는 것은 예전의 인두세와 같은 것이니까요.

요즘에는 이웃의 개념이 희미했졌지만, (특히 대도시 같은 경우 말이죠.) 아직도 이웃의 도움이 필요하다 싶을 때가 종종 생기죠. 뭐 그리고 싫든 좋은 아파트 같은 곳에서는 주차 문제니 층간소음 문제니 공동관리 문제니 뭐니 해서 같이 무엇인가를 처리해야하는 경우들이 있구요. 이웃들과 얼굴이라도 트고 지내는 게 좋기는 합니다. (가끔 너무 극성스러운 이웃 빼고는요.^^;)

오늘은 정말 추운 날씨로군요. 건강에 유의하세요.

2017-02-02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2-09 0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09 2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14 1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교사, 김태용, 2017

 

 

(스포일러 있습니다.)

 

   

어떤 영화를 볼까 망설였다. 최근에 거의 극장에 가지를 않아서 후보군은 많다. 먼저 첫번째 후보군은 별로 실패하지 않을 것 같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봤고, 볼 것을 권하고 있는 목록들이다. 흥행을 이어나가고 있는 <마스터>, 꽤 흥미로운 스토리를 가진 <패신저스>, 관객들에게 꿈의 체험을 가져다준다는 <라라랜드>. 아니면 다른 후보군도 있다. 믿고 보는 감독들의 영화들, 그러니까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이나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 같은 영화. 이 영화는 그 사이에 애매하게 끼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두 가지 이유에서 이 영화를 골랐다. 하나는 감독의 전작 <거인>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이것이 현재의 시장에서 꽤나 모험적인 시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 시장에서 여성 원톱 혹은 투톱 영화는 드물다. 처음 이 영화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여성 두 명이 전면에 있는 그 포스터 때문이었다. 최근에 한국영화에서 이렇게 여성 두 명이 전면에 있던 포스터가 있던가? 이해영의 <경성학교>(공교롭게도 이 영화도 배경이 '학교'다) 혹은 이언희의 <미씽: 사라진 여자> 외에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최근의 한국영화들은 남성들을 여러명 출연시켜야 흥행할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것은 <마스터>가 다시 한번 증명하고 있다.) 물론 나는 여기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에 다시 케케묵은 줄을 긋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리고 노파심에서 첨언하건대 이 영화가 무슨 페미니즘 영화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약간 반농담으로 말하자면 사실 제목부터가 반페미니즘이라고 할 수도 있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구글에서 '여교사'를 검색해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다만 이것이 모험적인 시도이며, 개인적으로 모험적인 시도를 좋아한다고, 그래서 골랐다고 강변하고 싶을 뿐이다.  

 

   

김태용의 영화 <여교사>에는 크게 두 가지의 축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계급이라는 축(흔히 말하는 금수저, 흙수저)이며, 다른 하나는 치정이라는 축이다. 여기에 다른 하나의 축도 더 작동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영화는 그것을 거의 무시하거나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것은 교사와 학생의 관계라는 윤리의 축인데, 글쎄... 이 축마저 작동하면 너무 복잡하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그 축은 이제 더 이상 그렇게 우리 관객들에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인지, 별로 심각하게 다루지 않는다. (재미있는 것은 여교사로 나온 김하늘이 오래전 드라마 <로망스>에서 같은 역할을 맡은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때 오로지 문제되던 것은 이 윤리의 축이었다. 하기는 <로망스>는 오 필승 코리아,가 울려퍼지던 해의 드라마였다.) 아무튼 영화 상에서 그 윤리는 거의 희미해졌다. 적어도 교사 효주(김하늘)에게나 다른 교사 혜영(유인영)에게나 죄책감 같은 것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죄책감이 비어버린 공간을 채우는 것은 다른 것들인데 그것은 앞서 이야기한 계급이나 치정과 같은 것들이다.

 

이것은 일종의 삼각형으로 작동한다. 계급의 측면에서 보면 두 명의 흙수저가 있고, 한 명의 금수저가 있다. 치정의 측면에서 보면 두 명의 여교사가 있고, 한 명의 남학생이 있다. 계급의 측면에서는 당연히 흙수저가 금수저보다 약자이며, 치정의 측면에서는 잃을 것이 많은 (여)교사가 더 약자이다. (물론 이 경우에는 당연히 반대로 말할 수도 있다. 일종의 권력을 가진 교사가 학생보다는 더 강자라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겠지만, 일단 재하의 캐릭터가 그렇게 그려지지 않았으며,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것이 여교사와 남학생 사이의 관계라는 점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 반대를 상상해보라. 남교사 두 명과 여학생 한 명이라고 가정해보면, 이 영화는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효주는 이 약한 것 두 가지를 모두 가졌다. 그녀는 아주 간단히 말해서 계약직 여교사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를 상상하기는 별로 어렵지 않다. 이런 영화에서 불안한 삼각형의 고리는 필연적으로 해체되기 마련이며, 변화가 일어나는 쪽은 그 고리에서 늘 가장 약한 쪽이다. 다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변화가 어느 방향인가 하는 점일 뿐이다. 

 

이 마지막에서 영화는 결국 가장 파국적인, 혹은 가장 비극적인 결말로 향해간다. 사실 이 마지막 부분의 구성은 꽤나 흥미로운데, 이야기의 흐름이 급박하기도 하거니와 설명이 되지 않는 빈 공백을 남겨놓기 때문이다. 마지막 직전에 효주는 결국 백기투항을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혜영에게 투항한 효주는 혜영과 함께 (아마도 혜영이 묵는 것처럼 보이는) 호텔에 간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 정도의 추가의문점이 생긴다. 하나는 왜 하필이면 호텔인가,라는 점이고 - 이 공간에 대해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 다른 하나는 이 호텔 씬이 하필이면 이런 구도로 시작하는가,라는 점이다. 이 마지막 씬에서 효주는 거의 혜영의 하녀처럼 보인다. 물론 이 두 가지는 부차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효주의 투항과 이 호텔 사이에는 무엇인가가 생략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효주가 혜영에게 무릎을 꿇었던 운동장 장면과 효주가 주방에 있고, 샤워를 마친 것처럼 보이는 혜영이 효주에게 심부름을 시키며 누워서 자기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재잘거리는 이 호텔 장면 사이에는 감정의 진폭이 있으며, 그 사이에는 생략된 무엇인가가 들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먼저 말해야하는 한 가지. 이 영화는 어떤 생략들을 주무기로 삼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영화의 시작에서부터 그런 것은 잘 드러나는데, 영화는 캐릭터를 설명하려는 씬들을 생략한 후 곧바로 이야기로 들어간다. 어떤 교사가 임신하고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이사장의 딸 혜영이 새로운 교사로 온다. (사실 갑작스럽게 이렇게 툭 자르고 들어가는 것 또한 일반적인 한국영화들에서 잘 보여지지 않았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효주는 그 혜영에게 노골적으로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도리어 혜영은 효주와 친해지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말이다. 여기에서 의문. 효주는 왜 혜영에게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보이는 것일까. 다른 교사들의 말대로 혜영에게 먼저 나서서 친한 척을 해도 모자랄 판인데 말이다. 

 

영화에서 생략이란 사실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생략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공백은 상상을 통해 이야기를 여러 결로 다채롭게 만들기는 하지만, 지나친 생략은 관객에게 어떤 풀리지 않는 의문을 만들어 지치게 만들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에서는 약간은 독이 되는 듯한 느낌이다. 효주의 캐릭터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고 효주와 혜영의 관계를 먼저 드러내는 것은 흥미로운 시도이긴 하지만, 어떤 의문들을 만들고 그 의문들은 결국 영화의 마지막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앞에서 말한 일종의 '공백'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는 영화의 마지막들을 보면서 효주의 행동이 이해가 되면서도, 한 가지 '사소한 질문'을 하고 싶어졌다. 결정적인 트리거는 무엇이었을까. 재하(이원근)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였을까, 아니면 자신이 사랑했던 재하(와의 관계)를 혜영이 너무 하찮게 여겨서였을까. 둘 중의 어느 하나라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굳이 무게를 재어 본다면 그 중의 어떤 것이 더 무거울까.

 

약간 도식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처음이 더 무겁다고 한다면 그것은 치정의 무게이고, 나중이 더 무겁다고 한다면 그것은 계급의 무게이다. 그 둘 중의 어느 쪽일까. 나는 그 질문, 그 무게를 들여다보는 것이 이 영화에서는 이상하게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조금 더 이야기하자면) 우리와 마찬가지로 효주도 그 무게를 잘 몰랐던, 혹은 여전히 모르는 척하고 싶었던(그래서 자존심을 조금이라도 지키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녀는 그곳에 굳이 재하를 부르고 무게를 달아보려 한다. 사실 이미 답은 나와있고, 자신도 답을 아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말이다. 영화의 서늘한 점은 사실 그 마지막의 파국적인 결말에 있지 않다. 아마도 가장 서늘한 점은 흙수저들이 가졌던 거의 유일한 무기이자 가능성이자 희망인, 사랑마저도 이 영화에서는 부정된다는 사실이 아닐까. 도식적으로 말한 김에 조금 더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계약직 여교사 효주와 가난한 남학생 재하의 사랑은 존재한 적이 없었고(아니 존재한 적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마저도 혜영의 장난감이라고 말해야하니까.), 효주는 그 과정에서 오래된 남자친구와의 관계도 끝나버린다. (한 가지 더 첨언하자면 결국 이 오래된 남자친구도 재하와 크게 다르지 않아보인다는 사실이다.)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 씬을 다시 기억해보자. 영화의 시작부, 임신한 정규직 여교사가 휴직에 들어가자, 교감은 계약직 여교사들에게 임신을 하면 재계약을 하지않도록 계약서를 받는다. 그리고 마지막 홀로 남은 효주는 빈 교무실에서 혼자 남아 무엇인가를 먹는다. 이 처음과 마지막 장면이 상징하는 것이 있지만 나는 그보다는 다른 것을 말하고 싶다. 이미 그 이전에 그녀가 무엇인가를 홀로 먹는 것을 본 적이 있으니까. 남자친구가 짐을 챙겨서 나가고 텅 빈 집에서 그녀는 홀로 아침을 먹었다. 그녀는 쓸쓸하고 위태롭게 보였다. 서늘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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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12 1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죠? 이 영화, 개봉하기 전부터 노출에 관한 (언플 성향이 짙은) 언론 보도가 있었어요. 영화가 기대에 미치치 못해 실망한 관객들이 많았을 겁니다.

맥거핀 2017-01-13 00:51   좋아요 1 | URL
제 글은 뜸했습니다만, 저는 cyrus님 글 계속 잘 보고 있어서 그렇게 낯설지 않네요.^^ 잘 지내셨나요?
말씀하신 기대는 ‘노출‘에 관한 기대겠지요? 뭐 그런 것을 기대하고 보신 관객이라면 분명히 실망하셨을 겁니다만, 한편으로는 그렇게밖에 홍보를 할 수 없는 영화사의 선택이 이해되기도 합니다. 사실 표면적으로는 내세울 게 별로 없는 영화이기도 하고 또 안타깝게도 그런 게 먹히기도 하는 게 현 추세니까요.

AgalmA 2017-01-13 09: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느므느므 반갑^0^!
효주(김하늘)-혜영(유인영) 구도 보니 드라마 밀회에서 혜원(김희애)-영우(김혜은)이 떠오릅니다. 두사람이 처음 소개되는 장면 아주 인상적이었죠. 혜원이 영우가 정부와 밀회를 나눈 호텔로 찾아가 그녀를 수습해주면서도 모멸을 당하던 장면.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저 장면처럼 딱 그랬죠. 김희애의 대단한 카리스마에도 불구하고 두 여인의 당당함이 부딪히던 인상적인 장면였죠.

맥거핀님 이런 글 엄청 기다렸음^^!

맥거핀 2017-01-14 15:12   좋아요 1 | URL
네..저도 반갑습니다. 오래만에 돌아와도 환영도 해주시고 좋네요.^^
제가 <밀회>를 참으로 띄엄띄엄봐서 잘 기억이 안나기는 하는데요. 영화상에서 그래도 혜원에게는 어떤 당당함이 있는데, 영화상에서 효주는 사실 꽤 안쓰러워요. 조금 더 둥글둥글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은데..그런데 둥글둥글함이 흙수저의 덕목은 아니잖아요. 흙수저도 까칠하게 살 수 있는 건데 왜 그렇게 살 수 없도록 구조가 되어있는지..마지막에 그녀가 홀로 무엇인가를 먹는 그 씬이 참으로 안쓰럽게 보였습니다.

희선 2017-01-13 23: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글로 만나서 반갑습니다

남자일 때는 남교사라고 쓰지 않는데 여자일 때는 쓰더군요 이게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기도 해요 여자중학교나 여자고등학교에 다닌다 해도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라 하면 될 텐데, 여중생이나 여고생이라고도 하더군요 저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어요 그런 제가 신기하기도 합니다(오래전 일이어서 확실하지 않을지도 모르겠군요 거의 안 했을 거예요) 일본에서 그렇게 써서 한국에서도 그렇게 쓴 것인지, 확실한 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읽지는 않았지만 다자이 오사무 소설에는 <여학생>이 있더군요 한국에서는 여중이나 여고에 다닌다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이건 좀 다른 뜻이기도 하죠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우연히 효주가 무엇이든 다 가진 혜영한테서 하나쯤 빼앗겠다고 한 걸 봤습니다 그게 제자인 것 같은데, 그것마저 잘 되지 않다니... 그런 마음으로 학생한테 다가갔다 해도 마음이 조금 기울기도 했을까요 예전이었다면 선생님하고 제자가 그러면 아주 많이 뭐라 했을 텐데, 이제는 그런 걸 크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 해도 현실에서는 좀 어렵겠지요 시간이 흐른 다음에 만날지라도... 그런 일이 아주 없는 건 아닌 듯합니다

가난한데 사랑도 제대로 못하다니, 어쩐지 슬프군요 상대가 괜찮은 사람이 아니어서 그렇기는 하겠지만... 가지지 못한 사람은 뭐든 안 된다, 는 생각이 들 것 같기도 합니다 꼭 그런 건 아니겠지요


희선

맥거핀 2017-01-14 15:18   좋아요 1 | URL
뭐 정확히 말하면 차별적인 용어 맞지요. 남학생이라든가 여학생이라든가 하는 용어는 차별적인 느낌이 없는데, ‘여교사‘라고 하면 조금 그런 게 있죠. 그래서 저도 위에서 쓸 때 조금 망설였는데, 뭐 일단 영화 제목부터가 ‘여교사‘이니까요. 예를 들어 특정 직군에서 특별히 한쪽 성별이 적거나 하면 앞에 그렇게 ‘남‘이나 ‘여‘를 붙일 수도 있겠지만(예를 들어 ‘간호사‘) 교사의 경우에는 도리어 여교사가 훨씬 많은데도 말입니다.

그게 카피였죠 아마? 모든 것을 다 가진 너에게 하나쯤 뺏으면 안되나..뭐 그런데 굳이 따지자면 이 영화에서는 효주의 그 말 마저도 결국 실현된다고 볼 수 없으니까요. 이야기로 보면 꽤나 무거운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독의 전작 [거인]도 꽤나 무거워서 영화 초반부에는 그보다는 덜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더 무서운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