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 없는 한밤에 밀리언셀러 클럽 142
스티븐 킹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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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은 후 쓰는 리뷰입니다.

    

   

'스티븐 킹의 창작론'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그의 책 <유혹하는 글쓰기>는 창작론 따위는 재미없고 지루할 것이라는 편견을 깨뜨리는 책이다. 그 책은 스티븐 킹의 문학적 자서전에서부터 창작의 기본적인 원리들과 작가로서 갖춰야 할 자세들(그러니까 일종의 총론), 창작의 기술들(각론), 글을 쓸 때 실제적으로 써먹을 팁들 모두를 담고 있으며, 동시에 풍부한 입담을 통해 그의 소설처럼 술술 읽혀내려가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개인적으로 특히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은 책의 말미에서 그가 실제로 원고를 수정하며 보여주는 자잘한 팁들인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그의 소설을 읽는 재미의 핵심이 무엇에서 나오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바로 소설의 '속도감'인데, 그는 원고를 수정하는 기본은 결국 '삭제'이며, 그것은 불필요한 단어를 생략하는 등의 문장쓰기에서부터 하다못해 쓸데없이 거창한 주인공의 이름을 줄이는 것에까지 해당한다고 말한다. 즉 그의 원칙이란 명료하게 서술하여 속도를 유지시키며, 독자를 끝까지 읽게 만드는 것이다. "묘사와 대화와 등장 인물을 창조하는 모든 기술도 궁극적으로는 명료하게 보거나 들은 내용을 역시 명료하게 옮겨적는 (그리고 그 불필요하고 지긋지긋한 부사들을 안 쓰는) 일로 귀결된다. (p.240)"

     

킹의 이 책 <별도 없는 한밤에>는 그의 이런 원칙 실천의 장이다. 그것은 주인공의 이름같은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 헨리, 테스, 다아시, 밥 등의 짧고 평범한 이름들, '1922'의 주인공 윌프리드의 이름은 살짝 긴 것도 같지만, 어차피 그는 이 글에서 계속 '나'로 서술되고 있으니 이름따위야 알게 뭐람 - 다른 조금 더 큰 부분까지 해당되는데, 몇 가지를 예로 들어 보자. 중편 및 단편 4편을 묶은 이 책에 가장 처음 등장하는 소설 '1922'는 다음의 문장으로 시작한다. "나 윌프리드 릴런드 제임스는 지금부터 나의 죄를 고백하고자 한다. 1922년 6월, 나는 내 아내 알렛 크리스티나 윈터스 제임스를 살해하고 시체를 오래된 우물에 유기했다. 내 아들 헨리 프리먼 제임스도 이 범죄를 거들었지만, 헨리는 그때 열네 살이었으니 법적 책임은 물을 수 없다. 헨리는 내 꼬드김에 넘어가 살해에 가담했다. (p.11)" 이 문장을 읽은 다음 소설의 나머지 부분들을 미뤄둔 채 천천히 읽을 수 있을까? 불확실하거나 모호한 것은 없다. 윌프리드, 그러니까 나는 아내를 죽였으며, 아들도 그 사건에 가담시켰다. 이 사건은 도대체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이 아내를 죽이는 지난한 과정이 200페이지가 넘는 이 소설의 끝까지 이어지는 것일까. 그러나 킹은 질질 끌 생각 따위는 없다. 불쌍한 알렛은 50페이지가 채 넘기도 전에 이미 누비이불에 둘둘 말려진 채로 썩은 냄새가 나는 우물 밑바닥에 던져진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즉 킹은 재료를 차분히 준비하는 것에 요리의 모든 시간을 보낼 마음 따위는 없다. 재료는 이미 후라이팬 안에 던져졌고, 더 이것저것 고민할 이유도 여유도 없다. '빅 드라이버'의 테스는 역시 200페이지에 가까운 이 소설에서 채 30페이지가 지나기 전에 '빅 드라이버'를 만나며, '행복한 결혼 생활'의 '다아시'가 남편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킹이 일단 재료부터 냄비 속에 던져놓고 보는 초보 요리사는 당연히 아니다. 킹은 요리의 맛을 내기 위해 두 가지를 첨부하는데, 하나는 재료에 대한 밑간이다. 깔리는 암시들, 다음과 같은 문장들. "나는 아내를 죽인 것보다 아들에게 그런 짓을 한 것이 훨씬 후회스럽다. 왜 그런지는 이 글을 읽다 보면 알 것이다. (p.12)"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 나는 비로소 깨닫게 됐다. '쪼까오다'와 '쫓기다'가 얼마나 비슷하게 들리는지를. (p.47)" "테스의 운명은 그렇게 간단히 결정됐다. 원래부터 지름길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이었으니까.(p.236)" "다아시는 길을 걸을 때 중력이 자신을 땅에 붙들어 줄 거라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행복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그날 밤 차고에 들어갈 때까지는. (p.473)" 순간의 결정으로 갈리는 운명, 이미 결정나버린 운명. 그것은 어떻게 그들에게 절망을 선사했을까.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끝일까. 그릇에 가득 담긴 음식을 한입씩 베어물 때마다 뿌려놓은 밑간이, 아니 뿌려놓은 문장들이 맛을 곱씹게 만든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맛있는 요리가 그렇듯이, 그것은 한 번의 행위로 만들어지는 결과물은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재료는 갈아야하고, 어떤 재료는 볶아야하고, 또 어떤 재료는 삶아야한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 합쳐졌을 때 맛있는 요리가 나온다. 마찬가지로 킹의 이 소설들은 1막으로 이루어진 연극이 아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1922'에서 월프리드가 고백한 아내에 대한 살인, '빅 드라이버'에서 테스와 빅 드라이버의 만남, '행복한 결혼생활'에서 남편 밥의 비밀 모두, 이야기의 초반에 이미 밝혀진다. 그렇다면 나머지 페이지들을 도대체 무슨 수로 채울 것인가. 이 이야기들은 모두 끝났다고 생각한 시점에서 다시 시작한다. 가장 무서웠던 이야기들은 끝나는 것 같았지만, 그것은 단지 1막의 끝일 뿐이며, 이야기는 더 무섭고 잔혹한 2막과 3막을 준비하고 있다. '빅 드라이버'에서 테스는 '빅 드라이버'를 만나고 소설의 시작에서 60페이지 정도가 지난 후 집으로 돌아온다. 벌써? 그렇다면 소설의 나머지 100페이지는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실망하지 마시라. 2막과 3막이 준비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에 킹은 잊지 않고 적절한 양념들을 추가한다. 테스의 아주 잘못된 것처럼 보이는 선택들, 물씬물씬 솟아나오는 조바심들. 그렇게, 그렇게 하지 말란 말이야, 제발. 촉발된 독자의 조바심은 식욕을, 아니 독욕을 돋군다.

      

그러나 킹의 요리들은 아마도 집나간 입맛들을 돌아오게 만드는 것에만 머물러있지는 않은 것 같다. 좋은 요리사들이 만드는 좋은 요리가 그렇듯이 그것은 맛있기도 하지만, 몸을 건강하게 해준다. 그리고 좋은 소설들은 물론 몸이 아니라 정신을 건강하게 해준다. 이 소설들을 이렇게 바꿔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지극히 미국적인 공간에서 그려내는 미국이라는 가족 사회의 망가진 초상. 이 소설들이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 하나는 공간이 서사를 끌고가는 힘이다. '1922'에서 세밀히 묘사된 외따로 떨어져 있는 작은 농장들(나, 윌프리드가 아내를 죽이기로 결심한 것도 결국 땅 때문이었다), '빅 드라이버'의 "정을 주세요 정을 드릴게요"라는 간판이 걸려있는 버려진 가게, 아니면 '행복한 결혼 생활'에서 완벽히 정리되어 있는 것 보이지만, 아주 더러운 것을 몰래 숨겨놓고 있는 밥의 차고. 할리우드의 (공포) 영화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그 자체로 불길하고 무섭고 막막한 공간들. 다른 하나는 결국 이것이 가족이라는 것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미국 사회의 알 수 없는 단면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지극히 사적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그래서 그 안에서 어떤 공포 서사가 진행되고 있어도 알 수 없는 가족들의 내밀한 서사가 있다. '1922'나 '행복한 결혼 생활'은 말할 것도 없고, '빅 드라이버'의 어머니와 아들, 그리고 '공정한 거래'도 결국 가족의 이야기이다. 이 부서져가고 있는 가족의 초상들, 그것이 토대가 되어 떠받치고 있는 미국 사회라는 불안한 무엇에 대해. (예를 들어 요즘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지지율을 보면 저쪽도 참 답이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결국 이 소설집 <별도 없는 한밤에>는 그가 그려내는 세계의 연장 선장에 있다. 그의 세계란 미치광이 아버지들이 중심이 되어 벌이는 가족 공포의 세계이다. 외따로 떨어져 있는 폐쇄된 공간에서,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그 공간에서 벌이는 아버지들(남자들)의 피의 서사. 그는 그것을 지금껏 여러 작품에서 그려왔고, 그것은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1922'의 아버지와 아들이, <샤이닝>의 아버지와 아들과 겹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하다. 이 대물림되는 미치광이들. 그들은 미쳐가는 것일까, 아니면 그 오래전 죽은 아버지들의 영향으로 이미 미쳐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그들은 성실하게 납세하고 주말에 교회를 가고,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책을 읽는 농부이자, 훌륭한 회계사이자 17년 간이나 무료로 봉사하는 보이 스카우트 지도자들이기도 하며, 동시에 "우리 군인들을 응원합니다! 아프간디스탄(철자는 킹이 일부러 틀리게 쓴 것이다)에서 승전 기원!!"이라는 문구가 붙은 곳에서 성실히 트럭을 몰며 일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물론 이것은 킹의 농담이지만, 여기에서 한 남자가 생각나기도 했다. <11/22/63>에 등장하는 케네디를 살리기 위해 애쓰는, 킹의 세계에서 보기 드문 선한 남자 제이크 에핑 말이다). 성실하고 좋은 가장인 그들에게는 다른 세계가 있다. '1922'에 등장하는 '음흉한 남자'의 세계, 혹은 '행복한 결혼 생활'에 등장하는 다아시의 거울 속 다른 세계. 그리고 물론 스티븐 킹이 그려내는 미국도 우리 눈에 보이는 미국이 아닌, 우리가 보지 못하는 그러나 엄연히 존재하는 다른 세계의 미국이다.

      

아무튼 그런 것을 다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스티븐 킹의 600페이지가 넘는 이 소설은 200페이지의 체감속도로 넘어가는 그런 소설이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이 리뷰에서 가장 언급을 적게 한 '공정한 거래'라는 짤막한 단편이 가장 마음에 들었는데, 그것은 이 소설이 가장 잘 쓰여진 것처럼 느껴져서라기보다는 이 소설이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부분이 있어서였다. 소설을 읽다보니 어린 시절 <환상특급>을 두근거리면서 보던 기억이 떠올랐다. 보고난 후 잠을 잘 이룰 수 없게끔 만드는 공포, 혹은 서스펜스가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끝까지 보게 만들었던 재미, 그리고 거기에 담긴 적당한, 그러나 서늘한 교훈까지 말이다. 그래, 내 어릴 적 <환상특급>의 이야기들도 항상 이런 식으로 끝나곤 했지.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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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5-09-23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환상특급류는 넘 좋은데.. 요즘 장르(드라마)물 아껴놨던거 몰아보느라 정신못차린상태.. 그와중에 메르세데스는 너무 재미없어서 질질 흘려읽었어요.. 길긴 또 왜이리긴지.. 왜지..왜때문이지.. 타고난 이야기꾼은 맞는데 유머코드,탐정코드 별로 저랑 안맞아요(느낌법 안쓰기). 호러는 좋은데 말이죠. 그렇지만 좀비.. 또 지루할까봐 안볼라그랬는데 600페이지가 200페이지로 둔갑.. 접수! 잘지내나요, 맥거핀님?

2015-09-24 1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25 1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15-09-26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름 짧게 쓴다고 했는데 맨 처음에 쓸 때는 길게 썼네요 일부러 그런 걸지도 모르겠네요 1막 2막 3막까지 가는 이야기군요 어떻게 될지 알고 싶으면 멈추지 못하고 보기는 하는군요 요새는 그런 책을 못 봤습니다 어떤 때는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기대가 되기도 하는데, 그런 일도 자주 없군요 이 책은 그런 기분으로 보신 듯하네요 책을 보면서 그러면 안 돼 하는 사람은 꼭 그렇게 하죠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미치광이 아버지라... 스티븐 킹은 왜 그런 걸 쓸까 싶네요 진짜 아버지일 수도 있고 그 아버지는 다른 걸 나타낼 수도 있겠네요

명절 잘 보내세요 잠깐 달도 보고... 늘 무슨 달이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보름은 달마다 찾아오는데... 명절에는 평소와는 다른 달이 될지도 모르죠


희선

2015-09-30 17:4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