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플래쉬>, <꿈보다해몽>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3월이 지나가기 전에 3월에 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남겨놓고 싶다. 3월에 본 영화라고는 하지만, 사실 3월 중순 이전에 본 영화들이라, 기억에 남아있는 것들이 많지 않다. 영화를 본 직후에 무엇인가를 쓰는 것과 영화를 보고나서 일정 시간이 지난 후 무엇인가를 쓰는 것은 나름의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를 보고 나서 한참 있다가 무엇인가 기록에 남기는 것은 희미해지기는 하지만, 그것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은 그만큼 (나에게) 중요하게 받아들여졌다는 의미도 되겠지. 그것은 무엇일까.  

 

 

먼저 <위플래쉬>. 이 영화는 음악을 보여주는 영화이지만, 나는 보는 내내 이 영화가 일종의 스포츠 영화를 연상시킨다고 생각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신체를 이용하여 정확한 동작을 해내는 것이 중요한, 그래서 예술과 스포츠의 경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체조나 피겨스케이팅 같은 스포츠, 혹은 신체언어를 이용한 예술인 무용이나 발레와 같은 것 말이다. 즉 이 영화는 음악을 다루는 영화이기는 하지만, 음악을 영화에서 나타내는 방법이 예술가의 고뇌나 개인적인 일화, 혹은 그 '음악' 자체를 들려주는 것만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서 음악도 일종의 신체 예술이라는 것. 예를 들어 체조에서 정확한 동작을 정확한 타이밍에 실수 없이 해내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드럼 연주에서도 정확한 위치를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강도로 타격하는 것이 중요하다(사실 드럼이 아니라 다른 악기라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양쪽 모두 그것을 지속시킬 체력과 근력, 즉 신체의 지탱이 필요하다. 

 

그래서 <위플래쉬>의 촬영은 이런 신체를 이용하는 스포츠나 예술을 다루는 영화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예를 들어 이 영화가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블랙 스완> 같은 영화를 연상시킨다면, 그것은 내용상의 측면(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자)에서도 그러하지만, 한편으로는 촬영 같은 부분에서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다양한 클로즈업의 활용을 통해, 신체 그 자체의 움직임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점점 분열되어가는 니나(나탈리 포트만)에게 주목하게 만들었던 이런 타이트한 촬영은 이 영화 <위플래쉬>에서도 비슷하게 보여진다. <블랙 스완>에서 발끝이 지면과 충돌하면서 토슈즈에 배어나오는 피를 클로즈업하는 것이 관객에게 고통(이자 쾌감)을 전이시켰다면, <위플래쉬>에서는 손에 아무렇게나 칭칭감은 붕대에서 배어나오는 피를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는 것은 그의 고통(이자 쾌감)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즉 이 영화는 음악을 다루는 영화이지만, 이상하게도 음악을 자꾸 신체언어로 바꾸려드는 것 같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과 같은 장면이 영화에는 있는데, 앤드류(마일즈 텔러)가 중요한 공연에서 결국 연주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어떤 연습의 부족이나, 정신적인 문제, 심한 긴장과 같은 문제가 아니라 말 그대로 그의 육체가 고장이 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는, 음악은 결국 몸으로 하는 것이라는 문제, 혹은 음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몸이라고 이상한 역설을 시도하는 것처럼 보인다(<씨네21> '김중혁의 바디무비'에서 왜 아직 이 영화를 다루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는데, 왜냐하면 음악을 다루기는 하지만, 그것은 지속적으로 음악에 대한 몰입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약간 비유를 섞어서 말하자면 음악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동이 자꾸 눈에 보이는 땀, 피 혹은 악보의 음표로 치환되어 지속적인 피로감을 준달까. 다시 말해서 음악을 즐기러 갔는데, 고통을 체험하게 된달까.

 

그것은 이 영화가 한계를 넘으려는 자의 이면을 그리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다시 스포츠 영화의 화법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그간 많은 스포츠 영화들은 한계를 넘어서려는 자들을 즐겨 묘사하여 왔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일반적인 스포츠 경기를 보며 한계를 이미 넘어선 사람들의 전면에 있는 그 성취만을 주목했다면, 스포츠 영화들은 그 이면에 있는 한계를 넘기까지의 그들의 고통을 즐겨 그려오곤 했다. 앤드류가 한계를 넘어섰는가, 아닌가의 문제는 말많은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놓는다고 해도, 결국 이 영화는 앤드류가 그런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여정의 어느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는데, 물론 그것에서 교육에 대한 어떤 문제들을 생각해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사실 나처럼 교육학을 전공한 사람들의 상당수는 이 영화를 그다지 좋아할 수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는 수월성교육의 끝판왕이며, 수월성교육이라는 것을 평소에 찬성했던 교육학자들도 이와 같은 극단적인 수월성교육에는 그리 찬성표를 던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앤드류가 한계를 넘어서 버드, 즉 찰리 파커와 같은 뮤지션이 된다고 해도, 그 와중에 희생양이 되었던 다른 학생들의 인생, 즉 플렛처(J.K.시몬스)가 죽음에 이르게 했던 다른 제자의 삶과 같은 것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이를 '교육'이라는 것과 전혀 무관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플렛처는 실질적으로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영화 속에서 사실 플렛처가 유일하게 강조하는 것은 그저 '마이 템포'이다. 그리고 그는 학생이 그 템포에 맞출 때까지 계속 같은 것을 반복시킬 뿐이다. 학생은 그 템포가 어느 정도인지도 정확하게 모르고, 그것을 맞출 방법이 어떠한 것이 있는지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채, 그저 공포 속에서 같은 행위를 반복할 뿐이다. 소통의 단절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반복, 이를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앤드류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이를 플렛처에게 그대로 되돌려준다. 즉 지금까지 내가 당신의 템포에 맞추었으니, 이제 당신이 나의 템포에 맞추라는 것.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지점에서 둘은 은밀한 공명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서 적어도 그 공명은 음악에 대한 공명이 아닌, 어떤 방법론의 공명처럼 보인다. 일방적인 마이 템포로의 방법론. 다시 말해서 앤드류가 나중에 누군가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입장이 된다면 그는 플렛처 교수와 아주 비슷한 방법론을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아니 어쩌면 그는 플렛처에게 음악보다는 그런 방법론을 사실 배우고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앤드류는 자신이 싫어하는 과자도 타인을 위해 팝콘 속에 담아오는 것 정도는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후에 여자친구를 대하는 방식을 보면 그는 생활마저도 '마이 템포'로 하려든다. 그것이 교육학 석사를 다 마치지 못하고 때려친 나라도, 이 영화를 마음으로 좋아할 수 없었던 이유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서 있는 것과 같은 영화도 있다. 이광국의 <꿈보다 해몽>. 이 영화가 서 있는 것은 플렛처가 그토록 싫어했던 '굿잡'의 위치이며, <위플래쉬>에서 앤드류의 아버지의 방법론이다. 좌절하려고 하는 사람들, 혹은 힘들어하는 사람들에 보내는 따듯한 격려. '꿈'이라는 말에는 양가적인 속성이 있다. 그것은 실현될 수 없는 것, 허망한 것, 결국 닿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희망,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점, 혹은 희망을 가지려는 자세 그 자체를 말하기도 한다. <꿈보다 해몽>에서의 꿈은 전자보다는 후자에 훨씬 가까우며, 그것은 제목 그 자체가 한편으로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꿈의 무게는 현실보다 가벼울 수도, 무거울 수도 있다. 그러나 꿈은 그것이 현실보다 가볍다고 해서 무조건 들고 있을 수도, 혹은 현실보다 무겁다고 해서 무조건 내려놓을 수도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꿈을 받아들이는 자세, 즉 다른 말로는 해몽이다. 즉 누구나 현실과 꿈의 무게를 재지 않고, 그 꿈을 꿀 수 있는 자유, 그리고 그 꿈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유, 동시에 또 내려놓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광국의 이야기 직조 방식과도 연관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광국은 전작 <로맨스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이야기의 얼개를 이리저리 연결하는 방식, 이야기가 이야기를 불러오고, 현실과 꿈이 뒤섞이고, 처음의 실마리가 끝과 만나다가 다시 사라져버리곤 하는 기이한 연결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즉 일반적인 영화에서 관객은 어떤 이야기의 선을 잡고 영화를 보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광국의 영화에서는 그 선은 사라졌다가 종종 다시 나타나며, 그때마다 관객은 꿈에서 현실, 다시 현실에서 꿈으로 빠져든 듯한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된다. 즉 처음에는 꿈과 현실, 혹은 이야기와 현실의 경계가 명확해보였지만, 그 경계는 점점 사라지고 나중에는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경지에 이른다. 이 영화를 독해하는 방식은 그 얼킨 실타래를 어떻게든 찾아내 감독이 어딘가에 남겨둔 꿈과 현실의 경계를 찾아내는 것일까. 나는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보다 좋은 방식은 꿈과 현실을 굳이 나누려 들지 말고, 그 얼킨 실타래를 스스로 잘라붙여 이어보는 것이다. 우리가 이상한 꿈을 꾸고 난 후, 그 끊어진 꿈의 조각들을 스스로 이어붙여보는 것처럼 말이다. 즉 영화를 통해 꿈을 꾸었으니, 그 해몽은 스스로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쩌면 삶이란 이 영화에서처럼 늘 얼개가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며, 그것이 때로는 종종 더 나은 결과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혹은 좋은 결과를 말해주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말해주는 것과 같은 장면이 이 영화에는 있는데, 꿈을 해몽해주는 형사(유준상)와 그의 누나(서영화)의 이야기 같은 것이 그것이다. 뇌출혈 같은 것으로 쓰러졌다가 회복해가는 누나를 형사는 돌보고 있는데, 누나는 쓰러지기 전에 달력에 동그라미 쳐둔 날짜가 무슨 날을 의미하는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형사는 누나가 여행가려고 정해둔 날이었나 보다는 식으로 눙치지만, 그 날은 사실 누나가 죽으려고 정해둔 어느 날이었다. 그러니 삶의 얼개가 더 잘 들어맞았더라면, 즉 누나가 뇌출혈로 쓰러지는 일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더 나쁜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물론 더 좋은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 얼개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을 한바탕 꿈이라고 한다면, 중요한 것은 그 꿈의 전개보다는 그 꿈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의 문제, 즉 해몽이다.

 

이광국의 영화에서는 이처럼 종종 마음을 건드리는 장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위에서 말한 형사가 사실 그날이 누나가 죽으려고 정해둔 날이었음을 몰래 알게 되는 장면, 혹은 전작 <로맨스조>에서 초희(이채은)가 우연히 촬영장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적힌 대본을 보는 장면 같은 것들 말이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힘든 상황에 처해 있지만, 이야기를 통해 그들에게 따듯한 위로를 건네는 것과 같은 마법같은 장면들. 여러 사람들이 지적하였듯이 이광국의 영화에는 홍상수 영화의 인장들이 여럿 새겨져 있다. 꿈과 현실을 뒤섞는 것, 영화에 떠도는 죽음의 그림자, 인물의 이동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카메라(카메라는 좀처럼 인물을 따라가는 법이 없다. 한걸음 곁에서 묵묵히 지켜볼 뿐이다.), 그리고 빈번하게 등장하는 줌인과 줌아웃. 그러나 홍상수의 영화와 이광국의 영화는 약간 결이 다르다. 예를 들어 홍상수의 줌인이 주변의 인물을 프레임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라면, 이광국의 줌인은 보고자하는 인물을 더 가까이 끌어당기는 것이다. 홍상수는 카메라를 현실에 놓고 명계의 세계를 들여다보지만, 이광국은 카메라를 명계에 놓고, 현실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홍상수의 여인들은 겉으로는 연약해보이지만, 속은 누구보다도 강하고, 이광국의 여인들은 겉은 강해보이지만, 속은 누구보다도 여리다. 즉 이광국 영화의 그 결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훨씬 따듯하게 느껴진다. 

 

<씨네21>의 김지미 평론가는 994호에 실린 비평에서 이 영화가 전작의 동어반복이며, 너무 나이브한, 동화같은 순진한 이야기라고 평했다. 동화같은 순진함. 대체로 우리가 분노보다 위무에 더 박한 평가를 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 평은 조금 가혹해보인다. 김지미는 이 글의 부제를 '<꿈보다 해몽> 속 순진한 어른들이 도달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달았다. 그 현실은 <위플래쉬>와 같은 현실일 것이다. 오로지 최고만이 살아남는 세계. 그 최고가 되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계. 그것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꿈보다 해몽>보다 <위플래시>가 더 각광 받고 있는 그 현실(적어도 관객수라는 측면에서라면 말이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보자. 어쩌면 이러한 현실에서 더욱 말할 수 없는 이야기는 최고가 아니라면 꿈은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보다는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도 어떻게든 꿈을 가지려 노력하자는 이야기가 아닐까. 현실에 더 잘 맞춰주고 있는 것은 <꿈보다 해몽>보다는 <위플래쉬>인데, 그것을 나이브한 동화라고만 말해야만 할까. <위플래시>의 마무리는 개운치않은데, 그것은 내용보다도 그 싹둑 잘라버리는 영리한 쿨함이 보여주는 씁쓸한 뒷맛이다. 나는 그보다는 구질구질하고 시시콜콜한 그 <꿈보다 해몽>의 마무리에 더 손을 들어주고 싶다. 구질구질하지만, 그것이 나에게는 더 맛보고 싶은 맛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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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5-03-30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욜인가, 시내 도서관에서 병원으로, 병원에서 집으로 또 데이트. 무한 전력 질주를 했는데 예매한 <뷰티풀 라이>는 결국 취소하고 말았어요. 차로 날아가도 시간을 놓칠 것 같아서 장봐서 음식 만들고 보쌈 사와서 먹고 그냥 놀았어요. <꿈보다 해몽>이 뭐지..하고 보니까 우리동네 예술관이랑 영화의 전당에서 상영하고 있는데, 그제 간만에 해운대에 진입했더니 거긴 뭐, 갈때마다 외국도시로 변모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아찔한 빌딩, 각 잡힌 네온사인, 조깅하는 외국인들, 점점 더 발전하는 바다. 공연장, 미술관, 백화점, 극장, 바다까지 모여있으나 주말에 마비 상태가 되는 이 동네는 내가 진입할 곳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 더 봐요, 맥거핀님. 그리고 글 써 줘요! ^________________^

2015-03-30 18: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30 2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31 1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31 1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01 14: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5-03-30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플래쉬 보고 싶었는데 맥커핀님 리뷰 보니 엌;
그런 거 같아요. 요즘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 아닌가 하고요. 오디션과 멘토 문화, 각종 자기계발서에 기댄 성공심리. 예전엔 뛰어난 뮤지션들 다 독학해서 자수성가한 경우잖아요.
아래 우리가 연결해나가야 할 꿈으로 마무리지으셔서 좋았어요 :)

맥거핀 2015-03-31 12:4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Agalma님. 위플래쉬는 잘짜여진 영화이긴한데, 좋아할 수 없었고, 꿈보다해몽은 전작에 비해 밀도는 적었지만, 좋았어요. 아마도 위플래쉬 같은 영화가 요즘의 세태에 더 맞는다고 해야겠지요. 그래서 더 흥행하는 것일수도 있고..그렇다고해도 이 영화에 대한 열광이 조금 의아해보이기는 해요.

아이리시스 2015-03-31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알람이 오니까 좋네요 :) 점심 먹어야죠, 배고파요ㅠㅠ

맥거핀 2015-04-01 13:59   좋아요 0 | URL
나는 알람 다 꺼놨어요. 뭐 사실 북플이 나에게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임..^^;;

아이리시스 2015-04-01 15:52   좋아요 0 | URL
어디 마땅히 기록이 불가능하니까 북플을 쓰는 거죠. 올해는 다이어리를 안 샀거든요. 넘 바빠서 다이어리를 날마다 들여다볼 시간도 없;; 날짜가 왜 한번 펼칠때마다 2-3일씩 훅훅 가있는지.. 3일 이상 지나면 뭐했는지 기억도 잘 안납니다.. 맨날 노니까요ㅠㅠ 맘같아서는 완전히 비공개해놓고 혼자만 기록하고 그저 노트같은 걸로 사용하고 싶은데. 사실 그래서 저 계정 하나 더 있어요! 가끔 메일주소와 비번이 나도 헷갈리는 다른 계정!! 알람은 댓글알람만 초기부터 해놨는데 소수정예댓글이라 알람이 많이 안 와서(!) 좋은 것 같아요, 물론 다수정예댓글이라도 좋겠죠. ^^;;

맥거핀 2015-04-01 15:56   좋아요 0 | URL
흐흐. 아이리시스님 이중생활하는 거 고백했따~. 저는 사실 알라딘 주로 지하철에서 많이 보거든요.(지금은 PC 앞이지만) 북플로도 보고, 알라딘 앱으로도 보고 그러는데, 북플은 이상하게 데이터도 많이 먹고 정이 안가요. 그래서 주로 알라딘 앱으로 봅니다. 알라딘 앱으로 서재도 보고 책도 검색하고 그래도 나한테는 충분해요. 그래서 북플을 잘 안쓰게 되는데..그래서 북플에 다른 사람들이 막 이 기능 좋다, 저 기능 좋다 하셔도 그게 뭐가 좋은 건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그냥 단순하게 댓글 달릴 때만 좋습니다.

아..그래도 아이리시스님이 요새 무슨 책 보는지는 북플로 꾸준히 체크하고 있어요. ㅋㅋ(이걸 왜 체크하고 있는지..)

아이리시스 2015-04-01 16:04   좋아요 0 | URL
응, 그거 좋아요, 그런 자세. 체크해야죠. 저도 친애하는 이웃님 몇 분 체크함. 아..이분들은 요즘 책 안 읽나.. 글도 좀 쓰지..

나 뭐 읽는지 체크당하라고 북플이 있잖아요.. 혼자 읽지마.. 뭐 읽는지 맥거핀님에게 알려.. 댓글 달리면 알려줄게.. 답글도 좀 달고.. 독서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고.. 다 같이 읽는 거라고.. 대신 데이터는 좀 많이 빼앗아갈게.. 나도 살아야 하니까.. 대신 표지 화질 좋지.. 책 좀 사라고..책 사라고..책 사라고.. (결국 못 이기는 사람이 책삼) 근데 그게 이런 순서대로 가나요? :)

저는 마지막으로 책 샀던 게 도서정가제 이전이었던 것 같아요.

맥거핀 2015-04-01 16:07   좋아요 0 | URL
아..말씀을 듣고 보니 이웃님 독서생활 체크하기라는 아주 중요한 기능이 북플에 있었군요. 나는 계속 북플을 안함으로써 아이리시스님이 내가 무슨 책을 보는지 궁금하게 하겠음..

나도 요새 거의 새책은 안사고 중고서점에서만 좀 샀어요. 그런데 이번에 적립금 들어와서 그냥 새책 몇 권 질러봤음...역시 그래도 책은 중고책보다는 새책 지를 때가 쾌감이 더 높아요.

아이리시스 2015-04-01 16:23   좋아요 0 | URL
그럼요, 책욕심은 버린 척 하는 거지 버려지는 게 아니란 걸 날마다 더 깊게 깨달아요. 중고보다 새 책이 좋고, 신간이 좋고 컬렉션을 완성시키는 게 좋죠. 이 마음을 알라딘 서재에서는 이해받으니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

2015-04-01 16: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01 15: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01 16: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01 16: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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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1 16: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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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1 16: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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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2 1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15-04-02 0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악 영화에서 자주 보여주는 건 감동인데, <위플래쉬>는 그것과는 좀 먼 듯하네요 음악이 나오지만 교육이 보이는군요 가끔 음악도 안 좋게 가르치는 사람이 있더군요 그냥 놔두면 자기 감성대로 피아노를 잘 칠 텐데, 뭔가에 잘 맞게 치기를 바라고 그것대로 하지 않으면 피아노 치는 사람을 힘들게 하더군요 그런 식으로 가르치면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도 싫어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음악을 그만둘지도...

한계를 넘으려고 할 때 여기저기 다치고 그러는군요 이 말을 보니 그런 거 자주 본 듯합니다 운동 경기가 아니더라도... 자기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꼭 그렇게 다치고 피 흘려야 할까요 진짜 그렇게까지 되지 않는다 해도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군요 그것도 자신이 하고 싶어야 하는 거지 억지로 시키면 하고 싶지 않을 듯합니다 그것을 잘 따라하는 사람도 있겠죠

본래 뜻과 다르게 좋게 보는 것도 괜찮겠죠(그런데 누나가 나은 다음 다시 그런 마음을 먹는다면... 누나가 죽으려고 한 것을 알았으니 이야기를 해볼지도 모르겠군요 그것보다 시간이 지나서 마음이 바뀔 수도 있겠네요) 꿈은 크지 않아도 좋다고 봅니다 작은 것을 이루면서 사는 것도 즐거우니까요


희선

맥거핀 2015-04-02 13:02   좋아요 0 | URL
네..영화에서도 그래서 음악을 그만두게 되는 사람들이 나오지요. 하나의 찰리 파커를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포기자들을 만들어내도 좋은 것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제 경우에는 그 마지막 음악이 뭔가 울림을 주지 못했어요. 뭐 사실 음악은 음악이고, 내용은 그 별개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같은 사람은 자꾸 이야기와 음악을 연결짓게 되는군요.

위에도 그런 얘기를 했지만, 사실 교육의 이야기라고 볼 수는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교수도 실질적으로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것은 없지만, 사실 앤드류도 무엇을 배운다고 말할 수가 없어요. 즉 그가 그렇게 열심히하는 것에는 단순히 배움 이상의 무엇인가가 작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욕망 이상의 어떤 것들 말이죠. 그것이 그에게 좋은 방향으로 작용할지 안할지는 사실 영화의 마무리를 봐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어쩌면 이 영화의 또 하나 위험한 점이겠지요.

네..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작은 것을 이루면서 사는 것도 즐겁습니다. 꿈이 크지 않아도요. 적어도 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도 제 꿈이 무엇인지 조금 알았으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