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하는 지하철에서 3편의 영화를 보았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링컨>, 레오스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코스모폴리스>. 어쩌면 이 첫문장을 보신 분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출근을 도대체 어디로 하기에, 3편이나?


아니, 그 3편의 영화를 (읽어)보았다,는 말이다. 허문영의 <보이지 않는 영화>에 실린 3편의 리뷰. 사실 지하철에서는 영화를 (거의) 보지 않는다. 나는 영화는 절대적으로 사이즈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작은 스마트폰 화면으로 들여다보는 영화, 더구나 사람들에게 이리 떠밀리고, 저리 떠밀리는 상황에서 보는 영화라면, 그것은 이미 영화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어떤 의미에서는 거의 그것은 그 영화를 싫어하게 만드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작은 화면으로, 게다가 안좋은 화질로 본 어떤 영화를 우연히 극장에서 다시 보게 된 경우가 있었는데, 내가 본 영화는 그 영화가 아니었다. 전혀 다른 영화로 나에게는 받아들여졌다.


내가 서두에서 일종의 낚시질을 한 것은,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허문영의 글들이 적어도 영화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일정 부분을 본 것과도 같은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위에 쓴 3편의 영화를 사실 아직 모두 보지 못했고, 영화 소개 프로그램이나 예고편 등으로 짧게 본 것이 전부이지만, 그의 묘사는 이상하게도 영화의 일정 부분을 본 것처럼 느끼게 한다. 사실 그의 묘사력이 뛰어난 편이 아닌데도 그렇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그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가 묘사하는 그 장면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글을 읽으면서 그 장면을 머릿속에서 계속 이미지화할 수 밖에 없다. 사실 실제의 영화(장면)를 보는 것도 거의 같다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는 스크린을 들여다보고 있지만, 그 스크린은 이미지화되어 우리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우리는 같은 장면을 봐도 다르게 기억한다. 그리고 내가 그 이미지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이미지는 더 생생해진다. 보지도 않은 영화의 이미지가.


허문영은 계속 질문을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질문의 빈도라기보다는 사이즈다. 허문영이 묻는 것은 어떤 장면의 의미나, 그 장면이 소구하는 무엇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 장면이 불러오는 영화라는 것의 작동방식이다. 혹은 그 장면이 단적으로 드러내보이는 영화라는 것의 메커니즘이다. 그 질문들은 점점 커져, 거의 걷잡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특히 오늘날의) 영화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폭력 이미지, 그것은 어떤 식으로 작동하고 있는가. 혹은 영화는 죽음을 어떤 식으로 넘어서는가, 혹은 넘어서려고 애쓰는가. 아마도 누군가는 이 마지막 문장을 보고 코웃음을 쳤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떠한 것도 죽음을 넘어서지 못하는데, 고작 영화따위가?


그렇다. 사실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도전이다. 허문영은 일단 벽을 먼저 세우고는 그 벽을 넘어서려고 애를 쓴다. 그 과정에서 벽은 점점 더 단단해지고 거대해진다. 어느 틈에 가면 벽을 넘어서려고 애쓰는 것인지, 그 벽을 더 단단하고 거대하게 만드려고 애쓰는 것인지 모호해진다. 그러나 그의 글들이 흥미로워지는 것은 이 순간이다. 거대한 질문과 작은 답, 혹은 거대한 질문에의 도전. 그리고 예정된 실패.


개별 영화들을 다룬 2부보다, 영화의 윤리라는 거대한 질문에 도전한 잡문 성격의 1부가 더 흥미로운 것은 이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글을 쓰면 늘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은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답을 찾아서 제시하려는 욕망. 나는 당신보다 이 영화에 대해 이 만큼 더 알고 있어, 그러니 그것을 말해줄께,라는 식의 소아적인 욕망. 그래서 질문은 자신이 답을 낼 수 있도록 늘 빈곤해지고, 유혹에 쉽게 흔들린 글들은 이제 영화가 아닌 것을 다른 것을 보기 시작한다. 영화가 아닌, 자신이 본 영화, 자신이 만들어낸 이미지들.


영화를 보면서(어쩌면 세상을 보면서도) 왜 우리는 눈앞에 현전한 것을 종종 보지 못하며, 거기 없는 것을 종종 보았다고 느끼는가.(p.7)


그래서 그는 예정된 실패를 알지만, 거대한 질문을 쌓아나가는 것이 아닐까. 자신이 만들어낸 이미지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결국은 계속 볼 수밖에 없다. 계속 봄으로써 자신이 만들어낸 이미지에 계속 배반당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게 보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반복하여 본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우리의 욕망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고자 하는 욕망, 그 욕망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허문영은 말한다. "우리가 응시해야 할 것은, 이 한 편의 영화 이전에 그 욕망과 충동일 것이다 (p.247)."

그것이 아마도 그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영화'이다.



덧.

그래서 물론 나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링컨>, 레오스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코스모폴리스>, 이 3편의 영화를 봄으로써 내가 만들어낸 이미지에 배반당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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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8 00: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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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2 01: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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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4 16: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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