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나, 그렇지만 나와 분명히 다른 존재. 그림자다. 나와 빛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검은 자아다. 그림자는 칠흙같은 어둠에서는 잠시 나를 떠난다. 내가 땅에 발을 디디고 있는 한 변함없이 나와 꼭 붙어있다.

 

박경현 시인의 <그림자 절제 수술>이라는 시가 있다. '그림자를 잘라내자 / 내 머리보다 앞서가고 / 내 키보다 길어지는 / 오만의 그림자.' 시의 첫 연은 오만의 그림자를 잘라내자고 한다. 도려내고 싶은 그림자는 둘째 연에서 노래한다. '내 마음 검어지면 더욱 짙어지고 / 내 가슴 깨끗하면 좀더 옅어지는 / 변덕의 그림자.'라고.

 

빛을 등지고 서면 자신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 칼을 꺼내 몸을 구부린 채 내 발에 붙어있는 그림자를 도려낸다고 가정해 보자. 땅에 깊숙히 상처가 입혀질 것이다. 나는 내 그림자를 떼어낸 것인가? 조심스럽게 일어서서 왼쪽으로든 오른쪽으로든 한 발자국 옮겨 보자. 맙소사. 그림자는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다시 내 발에 딱 달라붙는다. 애꿎은 땅만 패였다. '가이아'만 화났다.

 

'그림자'는 그렇게 나의 일부다. 감추는 것이 있을때 누가 뭐라는 사람이 없는데도 깜짝 놀라 주변을 본다. 아무도 없다. 내 그림자만 있다. 그림자는 진짜 내가 누구인지 안다. '그림자 스타일(shadow style)'의 영화 포스터는 이런 점을 착안한 경우가 많다. '과거의 나' 또는 '다가올 나'에 대한 암시도 있고, 감춰진 나를 드러내기도 한다.

 

 

 

<[스타워즈 : 에피소드 1, 1999]의 포스터>

 

 

[스타워즈] 팬이라면 다스 베이다(아나킨 스카이워커)가 루크 스카이워커의 아버지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이 불멸의 시리즈는 에피소드 4부터 6이 먼저 만들어지고 나서야 에피소드 1부터 3까지 만들어졌기 때문에 에피소드 1에 등장하는 어린 아나킨 스카이워커가 나중에 다스 베이다가 될 것이라는 것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포스터에서부터 엄청난 스포일러를 노출하고 있어도 누구하나 토다는 사람이 없다. 이 시리즈가 순서대로 제작되었다면 이 포스터는 거의 '자폭'수준인 것이다.

 

순수한 소년의 뒤 쪽으로 길게 뻗은 그림자는 '비장미'까지 풍기면서 이 우주 대서사시로 관객을 초대하고 있다. 왜 소년은 우주 최고의 악당이 되었을까,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포스터는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이미 결론을 알고 있어도 우리가 극장으로 가는 이유이다. 

 

 

 

<[오멘, 1976]의 포스터>

 

 

'데미안'을 기억하시는지. 헤르멘 헤세의 그 '데미안' 말고, 바로 포스터 속 꼬마 말이다. 오컬트 영화의 고전, [오멘] 속 '데미안' 말이다. 지금 이 순간도 어렸을 적 이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오싹함이 등골을 서늘하게 한다. 악마의 숫자 '666'과 창백하고 무표정한 데미안의 시선들...

 

포스터는 데미안의 그림자를 악마의 짐승으로 나타낸다. "경고는 이미 있어 왔다. 오늘 뭔가 섬찍함을 느꼈다면, 그게 바로 '징조'가 아닐지 생각해 보라"는 카피가 검은색을 배경으로 섬뜩하게 다가온다. 과연 데미안은 정말 적그리스도 '악마의 씨앗'이었을까? 초현실적 장면 하나 없이 최상의 공포를 이끌어낸 리처드 도너 감독의 솜씨에 경의를 표한다.

 


 

<[스콜피오, 1973]의 포스터>

 

 

 

버트 랭카스터, 알랑 드롱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출연한 첩보영화지만 낯설다. 우선 '다음 영화'에서 제공하는 줄거리를 참고해야 겠다.

크로스(버트 랭카스터 분)는 미국 CIA의 아랍 지역 첩보전 일선에서 뛰고 있는 베테랑 전략가이다. 하지만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강대국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게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식한 그는 더 이상 그 게임의 소모품으로 남기를 거부하고 탈출을 계획한다. 그는 표면상으로는 적이지만, 이상과 신념이 같은 벗인 소련측 아랍 지역 첩보원 자코프(폴 스코필드 분)를 통해 미국 측의 정보를 소련에 넘기고, 탈출 자금을 챙기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사실은 미국 CIA에 의해 감지되고 첩보부장은 그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한편, CIA와 계약을 맺고 크로스의 지휘 하에 요인 암살 등의 일을 하던 프랑스인 로리에르(알랑 드롱 분)는 크로스와 함께 일해오면서 그에게 인간적인 정과 강한 신뢰감을 느낀다. 그러던 중 CIA 상부로부터 크로스를 제거하라는 요청을 받자 로리에르는 혼란에 빠지는데...

                                                                                                   Daum 영화

 

'스콜피오'는 첩보원의 암호명일 것 같다. 아무래도 주인공 크로스의 암호명일 가능성이 크다. 근데 위키백과를 찾아보니 알랑 드롱이 연기한 로리에르의 암호명으로 나온다. 그는 조직을 배반한 크로스를 잡아야 하는데, 웬지 CIA 뜻대로 될 것 같지 않다. 어쨌든 총을 들고 달려오는 저 사나이는 드리워진 그림자를 볼 때 로리에르임에 분명해 졌다.

 

 

그림자는 사람만 따라다니는 것은 아니다. 사물도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생긴다. 그런데 무생물의 그림자도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까?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코튼 클럽]의 포스터에 단서가 있다.

 

 

<[코튼 클럽, 1984]의 포스터>

 

 

공황시대 갱들이 사용하던 기관총 아래 드리워진 그림자는 엉뚱하게도 나팔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2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코튼 클럽' 무대에 서는 일명 '딴따라', 딕시(리처드 기어 분). 무법천지였던 당시 나팔만 불어서는 생존할 수 없었을 터. 그는 총을 잡지만 그 모습은 그의 진짜 모습이 아님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포스터다. 사물의 그림자를 통해 주인공의 정체성을 부각한 한 발 더간 썩 괜찮은 작품이다.

 

 

지금부턴 좀 다른 그림자가 등장한다. 지금까지의 그림자는 정체성에 대한 암시였다면 이제부터 보게 될 '그림자'는 들키고 싶지 않은 주인의 속마음을 표현한다.

 

 

 

 

<[검슈, 1971]의 포스터>

 

 

 

'탐정인데 탐정아닌 것 같은' 탐정 영화, [검슈]의 포스터다. 'gumshoe'는 '고무창 구두', '고무 덧신'을 뜻한다. '검'과 '구두'의 함성어인 이 단어는 미국에서는 '형사' 또는 '탐정'이라는 속어로 쓰인다. 복장이나 외모 등 겉모습은 그럴듯한데 그림자는 뭐에 놀란 듯 총까지 떨어뜨리려고 한다. 속으로는 엄청 쫄아 있음을 나타내는 것 같다.

 

 

 

<[죽은 자는 체크무늬를 입지 않는다,1982]의 포스터>

 

 

 

채크무늬의 그림자가 화들짝 놀라고 있다. 사실 이게 그림잔지, 놀라는 건지 놀리는 건지 단정할 수도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재미를 보지못한 스티브 마틴의 코미디 중 하난데 주인공 뒤에 체크무늬의 정체가 뭔지 궁금해서라도 영화, 찾아 봐야겠다. 일단 그림자로 치고 본다면, [검슈]의 포스터와 같은 부류로 볼 수 있겠다.

 

 

 

내 그림자는 어떤 그림자가 되어야 할 지 생각하면서 마지막으로 앞서 언급했던 박경현 시인의 시 <그림자 절제 수술> 전문을 싣는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길 바라면서...

 

 

그림자 절제 수술

                                    박경현


그림자를 잘라내자.
내 머리보다 앞서가고
내 키보다 길어지는
오만의 그림자.

그림자를 도려내자.
내 마음 검어지면 더욱 짙어지고
내 가슴 깨끗하면 좀더 옅어지는
변덕의 그림자.

그림자를 줄여보자.
내 모습보다 품위 있고
내 몸집보다 풍만한
거품의 그림자.

그림자를 지워보자.
햇빛 피하면 엉큼하고
달빛 아래선 음흉스런
불손의 그림자.

숨기고 감추는 게 많을수록 늘어지고
밝히고 드러낸 게 적을수록 넓어지는
선명한 낙인(烙印)의
그림자를 떼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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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5-09-04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피소드 1> 처음 나왔을 때 저 아나킨 스카이워커 그림자 포스터 보고 <오멘> 생각했었습니다. 햐~~ 정말 잘 만들었구나....하는 생각도 하구요 ^^

호서기 2015-09-04 16:13   좋아요 0 | URL
붉은돼지님 반갑습니다. ^^